1996년에 발생한 페스카마 15(PESCAMAR No.15)호 사건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1996년 8월 3일 남태평양에서 조업중이던 온두라스 국적의 참치잡이 배 패스카마 15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인데
페스카마호라는 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선상반란 혹은 선상살인사건은 기억할 만큼
당시 꽤나 큰 충격을 주었고 '그것이 알고싶다' 에서 다룬적이 있는 사건입니다.
만화가 박인권 작가님께서 선상반란이라는 제목의 만화로도 출간되기도 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시절 이사건의 변론을 맡았는데
대선후보시절 이사건이 거론되어 다시 조명받기도 한 사건입니다.
2등항해사 조선족 전재천을 포함한 조선족 선원 6명이 선장의 하선결정에 앙심을 품고
한국인 1등항해사를 제외한 7명의 한국인선원과 자신들의 범행을 반대하던 같은 조선족 선원 1명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을 흉기로 살해하거나 바다에 던져버리는 방법으로 총 11명의 선원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시작합니다...
페스카마 15호는 1996년 6월 3일 부산에서 한국인 선원 7명과 인도네시아 선원 10명을 싣고 출항합니다.
페스카마호는 1978년 건조된 온두라스국적의 승조인원 25명의 254톤급의 참치조업 어선으로
모자란 선원의 승선을 위해 6월 15일 괌에 입항해 대기하고 있던 7명의 조선족 선원들이 승선시키고
페스카마호는 배는 사모아 근해에서 조업을 시작합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3D직종의 기피현상으로 인력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원양어선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고 부족한 선원의 자리를 외국인 선원들이 메우게 되었지만
의사소통의 문제가 발생했고 나온 대안이 조선족 선원들이었습니다.
1992년 중국과 수교로 조선족 동포들의 취업이 가능해졌고 같은 동포라는 점때문에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페스카마호에 승선한 7명의 조선족중 2등항해사 전재천을 제외하면
나머지 6명의 조선족 선원들은 원양어선 경력이 전무했습니다.
6월 27일 사모아 인근 바다에서 페스카마호의 첫 조업이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조업중 일이 더디거나 실수를 할 경우 욕설은 기본이고 구타도 심심찮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처음해보는 고된 뱃일이 순조롭게 풀렸다면 그게 더 이상했겠죠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배를 탔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의 노동에
조업중 쳐지는 선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폭언에
조선족 선원들은 자신들을 사람답게 대해달라며 조업 첫날부터 조업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첫날부터 조업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선장 또한 첫날부터 조선족 선원들에게 자신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앞으로의 조업이 어떻게 될지 답이 나와 있었기에 조업이 끝나고 규율을 잡는다며
선장은 조선족 선원들에게 기합을 주는 일이 발생합니다.
(*기합이라고 했지만 규율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폭행이 이루어졌다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첫날부터 힘든조업환경 때문에 조업거부와 하선을 요구한 조선족 선원들이었지만
그들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배를 타기위해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었죠
그들 대부분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승선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원양어선 취업에 필요한 서류를 꾸미기 위해 브로커의 손을 빌려야 했고
발급이 불가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많은 뇌물을 관리들에게 주어야했죠
거기에 중국에서 괌까지 오는 항공비와 교통비 승선 보증금 500불 까지 걸어야 했는데
계약위반으로 인한 강제하선시 맡긴 보증금을 돌려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
그 돈은 자신들이 중국에서 10년치 월급이 넘는 큰 돈이었고
중국에 진 빚과 승선보증금 까지 날릴 수 있다는 사실 알게되자
체념하고 조업에 참여하게 하게 되었지만
위에 언급했듯 처음 겪어보는 힘든일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고
큰 마찰 없는 인도네시아인 선원과 비교가 되어가 되어버린 상황이라
그들의 감정의 골도 점점 깊어졌습니다.
선장은 어군을 찾아 이동하는 시간동안 선원들은 어구와 장비등를 정비하고
식사와 개인정비및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군을 만나면 조업이 시작되는 환경에서
어디 바다에 참치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을겁니다.
조업이 한바탕 끝나면 먹고 씻는 시간조차 아까워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을 자는 경우도 허다하다하니
작업환경과 노동의 강도가 어떨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지요
7월 30일 조선족 선원들은 조업중 단체로 조업을 거부하는 사건이 다시 발생합니다.
하루 8시간의 근로시간을 준수를 조건으로 조업환경을 개선해달라는 요구였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줄때까지 조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의 취침시간은 2~6시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짧게는 몇시간 길게는 10시간 이상의 투망과 양망이 반복되는 그곳에서
그들의 요구는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것이라 선장은 이를 계속 묵과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페스카마호의 선장은 더 이상 조선족 선원들을 데리고 조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다음날인 7월 1일 선상징계위원회를 열어 조업거부와 명령불복종 등의 사유로 하선을 결정하고
새로운 선원을 받기로 합니다.
하선시 하선에 필요한 서류작업등 몇가지 절차가 필요했는데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선원을 받기를 원한 선장은 조선족 선원들이 먼저 하선시킨 뒤
하선증명서를 발급하는 방법으로 하선증명서 없이 하선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선장은 조선족 선원들에게 하선사실을 통보하고
회항으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조선족 선원이 부담한다는 각서를 작성하게 합니다.
이미 중국에서 10년을 일해도 다 갚지 못하는 큰 빚을 지고 온 이들이었는데
선장이 내민 각서에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큰 돈을 변상해야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예상과 달리 하선명령을 받게된 조선족 선원들은 크게 당황합니다.
요구사항을 철회하고 성실히 조업에 나서겠다며 선장에게 매달려 보았지만 선장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페스카마호가 회항한다는 소식이 주변 선단에 알려지자 근처 선박에서 환자후송 요청이 들어옵니다.
환자는 기관사 실습을 나와있던 고등학생 실습생 이 모군(가명 당시 19세)이 었습니다.
맹장염 수술을 받기위해 2일 페스카마호에 올라타게 된 것이었죠.
이 군을 태운 페스카마호는 조업을 중단하고 사모아 어군기지로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위에 언급했듯 조선족 선원들은 중국에서 큰 빚을 지고 배를 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강제하선도 모자라 조업손실분까지 자신들이 물리겠다는 선장의 말에 조선족 선원들은 크게 분노합니다.
자신들을 강제 하선 시킨다는 사실에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모색하는데
빚쟁이들에게 쫒기다 칼을 맞아 죽으나 고기밥이 되나 죽는건 마찬가지라며
고기밥이 되더라도 배에서 뭐라도 해보고 배위에서 죽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숫적으로 불리한 자신들이 한국인 선원들을 한명씩 제압하고 인도네시아인 선원들을 감금시켜
배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고
배를 탈취해 일본으로 이동하는 동안 냉동창고의 나무를 뜯어 땟목을 만들어
일본근해까지 배로 이동해 배를 침몰시킨뒤 땜목을 이용해
일본으로 밀항자는 구체적 계획까지 나오게 됩니다.
다음날인 8월 3일 새벽 자신들이 세웠던 계획을 실행합니다.
(기사나 관련자료를 찾아보면 범행일자가 7월 2일 혹은 7월 3일로 조금씩 틀린데
7월 2일 이 군이 후송을 위해 배에 탑승하고 7월 3일까지 정상적인 교신이후 교신이 두절되어
실종신고를 한 것으로 볼 때 7월 3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들의 계획을 알 리 없었던 한국인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깊은잠에 빠져있던 밤
선장 김 모씨(가명 당시 33세)는 선장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른 선박에서 무전이 왔다는 핑계로 선장을 조타실로 불러냅니다.
조타실에 선장이 들어오자 대기하고 있던 조선족 선원들은 선장 김 씨를
참치잡이 작살과 칼 도끼등을 이용해 살해 합니다.
선장을 살해한 뒤 나머지 선원들도 선장이 찾는다는 핑계로 한명씩 깨워 조타실로 데리고가
온갖 흉기로 무장한 조선족 선원들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합니다.
이때 조타실에서 나는 비명을 듣고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이 뛰쳐 나왔는데
조선족 선원들은 그들을 위협해 맹장염 수술을 받기 위해 후송중인 이 군을 갑판으로 끌어게합니다..
끌어낸 이 군을 살해하라고 강요했고 3명의 인도네시아인 선원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이군을 산채로 바다로 던져 버렸는데
이 군을 던진 바다는 상어가 자주 출몰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운항에 필요한 한국인 1등항해사 이 모씨(당시 32세)를 제외한 한국인 선원 6명과
후송을 위해 배에 탔던 고등학생 실습생 이 군까지 살해한 뒤
범행을 모의할 때 반대하고 실행할때까지 동조하지 않은 조선족 김 씨(가명)와
범행에 동조하지 않은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을 냉동실에 가둬 동사 시킵니다.
(냉동창고 고장으로 자신들의 의도대로 되지않자 창고에 있던 이들을 끌어내
쇠파이프로 폭행해 살해한 다음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다른 내용의 기사도 있습니다.)
배를 탈취해 자신들의 지배하에 놓는데 성공한 조선족 선원들은 혹시라도 다른배와 조우 할 경우
자신들의 범죄가 탄로날 것을 염려해 범행을 벌인 곳을 돋보기까지 사용해가며 핏자국을 지웠고
통신회선을 모조리 끊어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합니다.
8월 3일 교신을 끝으로 페스카마호의 교신은 끊어지자 회사에서는 페스카마호를 실종신고 합니다.
연락두절이 되었지만 8월 13일 페스카마호의 입항일에 맞춰 대체선원을 대기시키곤
페스카마호가 입항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약속된 8월 13일이 지나도 페스카마호는 입항하지 않았습니다.
교신이 끊어지고 약속된 날짜에 페스카마호가 입항하지 않자 주변의 선단에서도 페스카마호를 찾기위해 애썼지만
망망대해에서 통신조차 되지 않는 페스카마호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 었고
이미 페스카마호는 일본을 향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흔적을 찾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죠
일본으로 향하는 동안 조선족 선원들은 계획대로 땟목을 만들기 시작했고
자신을 살려놓기는 했지만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1등항해사 이 씨는
조선족 선원들의 감시가 소홀해지는 틈을 타 인도네시아인 선원과 무언의 눈빛을 주고 받으며
배를 재탈환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3주간의 시간이 흐르고 8월 24일 페스카마호는 일본 도리시마 부근을 지나던 중
연료소모로 배가 기울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항해사 이 씨는 지금 수리하지않으면 배가 더 기울어져 침몰하니 긴급 수리가 필요하다 말했고
자신이 배를 수리 할 수 있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니 도와줄것을 요청합니다.
먼저 기울어진 배의 균형을 잡기위해 기울어진 어창으로 들어가 균형을 맞춰야 된다고 말했고
그들이 어창에 몰려 들어간 어수선한 틈을 타 인도네시아인 선원과 힘을 합쳐 문을 잠궜고
배를 재탈환 하는데 성공합니다.
재탈환에 성공한지 얼마지나지 않은 시간 근처를 지나던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정이
기울어진채 표류중인 페스카마호를 발견하고 접근합니다.
어업순시선을 발견한 1등항해사 이 씨는 어업순시선까지 직접 헤엄쳐가 신고하였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안보안청에의해 갇혀있던 조선족 선원 전원체포되어
그들의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들이 체포되고 밝혀진 사건은 일본에서 속보로 알려졌고
한국에서는 배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온두라스,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와 일본까지 5개 나라가 관련되어 있어
즉시 인도는 힘들었고 관례대로 최초 발견국인 일본이 1차 조사를 하고
피해자가 제일 많은 한국에서4일뒤인 8월 28일 공해상에서 선박과 선원을 인도받고
8월 31일 부산항에 입항해 본격적 조사에 들어갑니다.
피해자들을 동사시키거나 혹은 쇠파이프와 칼 도끼등으로 잔혹하게 살해해 바다에 던져졌는데
19살의 피해자는 산채로 물에 던져졌다는 사실에 언론에서는 매일 신문1면을 장식했습니다.
더불어 참극의 원인이 그동안 만연해왔던 원양어선의 열악한 조업환경과 가혹행위였고
한국인 선장과 선원들이 외국인 선원들을 극한까지 몰며 조업을 시킨 이유가
고정급이 아닌 어획량에 따른 성과급을 받는 다는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언론은 연일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바빴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의견도 비난과 동정으로 양분되었는데
가해자는 동정을 받고 피해자는 비난을 받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들의 재판에 써달라며 전국에서 성금이 전달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1심에서 해상강도살인, 사체유기, 폭력 등으로 6명 전원 사형이 선고 판결이 나오지만
2심에서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문재인 변호사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분이 맞습니다.)
변호를 맡으며 주범으로 지목된 전재천을 제외한 5명은 무기로 감형되고
1997년 7월 25일 대법원에서는 피고인들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범죄에 동조해야했던 3명의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은
당시의 상황이 고려되여 불기소 처분(사건에 대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않음)을 받고 사건은 종결됩니다.
이사건의 흥미로운점이 있습니다.
주범으로 알려진 전재천은 수사과정과 재판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인정되지 않았고
그를 수사했던 수사관은 그가 사건의 주범임을 확신한다는 것이죠
둘의 상반된 의견을 보자면
전재천은 당시 배에서 자신이 상황이 다른 선원들과 많이 달랐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선원이 아닌 2등 항해사였던 자신은 다른 조선족 선원들 처럼
폭력의 대상도 아니었고 그들에게 원한을 가질일도 없어 살해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죠
범행에 가담한것은 사실이만 다른 선원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동참한것일 뿐이고
자신이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사망한 조선족 김 씨 처럼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주범으로 몰린이유에 대해 조선족 선원들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제일 연장자였고
선장과 항해사등 한국선원들과 자주 부딪혀야하는 항해사라는 위치때문에
배에서 중재자의 역활을 했는데 그때문에 주동자로 지목된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더 이상한 점은
전재천을 주동자라고 진술한 공범들의 말이 엇갈린다는 점입니다.
중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수사관의 반협박에 어쩔 수 없었다며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이도 있었고
전재천이 사건을 주도했고 그가 사건의 주범이 맞다는 지금까지도 주장하는 이도 있고
사건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다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죠
하지만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수사관의 말은 전재천과 달랐습니다.
전재천은 대학을 나온 교사출신의 가장 연장자였고 그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컸습니다.
자신은 주범이 아니고 다른 인질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 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치밀한 계획을 짜기 힘들었을것이라 말했습니다.
사건을 계획하고 서로의 역활을 나누고 실행후 사건은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사건현장을 돋보기까지 들고다니며 핏자국을 제거하고 살해 후 시신을 처리하고
일본으로의 밀항하는데 뗏목을 만드는 치밀함을 볼 때
모든 계획은 그의 머리에서 나온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습니다.
수사중 전재천은 거짓말을 교묘히 섞어 진술을 계속 뒤엎었고
그의 반복된 진술번복으로 수사에 혼선이 올 정도 였다고 말했는데
만약 그가 주범이 아니고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다면
그가 수사에 혼선을 주며 계속해서 진술을 뒤엎을 이유가 없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의 과잉수사 논란에 대해서도
수사본부가 차려지고 청와대와의 직통전화가 설치되어 매일 수사보고를 할만큼
높은분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었고 기자들도 수사본부 앞에 진을 치고
수시로 드나드는 곳에서 강압적인 수사가 이루어 졌다는 말은 말이
자신이 사건을 직접 수사를 지휘했던 입장에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자신은 그가 주범임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덧붙여 전재천이 특별사면으로 감형되어 무기수신분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런 극악무도한 사건의 주범이 무기로 감형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좋지 않았고
이런 사람들은 하늘을 보면서 살게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전재천이 었다면 그 상황에서 범행을 주도할 이유가 있었을까? 라는
합리적 생각을 해보면 전제천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긴하지만
사건의 진실은 범죄현장에 있던 그들만이 알고 있겠죠...
사족을 달자면
주범 전재천은 노무현, 문재인 두분의 대통령과 인연이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중 특별사면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시절 그의 사건을 변론하기도했죠
확인된바 아니지만 카더라에 의하면
주범 전재천의 부인이 변호인의 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관광을 핑계로
외출했다가 잠적해 불법체류로 돈을 벌어 귀국했다는 카더라도 있고
전재천 일당의 만행을 알리고 처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1등항해사 이 모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선상에서의 죄상이 알려지면서 숨어사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선원들은 고정월급이 아니라 어획량에 따라 자신들의 월급이 달라지는 성과급을 받았기에
더 많은 고기를 잡기위해 외국인 선원들을 극한의 조업환경 몰았던거죠
외국인 선원들을 하루 취침시간은 2~6시간에 불과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일하고 받은 월급은 고정급으로 한달에 190불에 불과했습니다.
임금체불과 저임금 차별대우와 위험한 조업환경 문화적 차이 의사소통 등의 문제등으로
갈등과 폭력이 일어나기 쉬운환경에서 갈등을 해소하고 그들을 다독여야할 선장들도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보다는 찍어누르는 방식으로 운영해왔기에
참극은 이미 예견되어있었죠
이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이런 끔찍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았으면 합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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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na.co.kr/view/AKR20160620092400051,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6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