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 대선 때 저는 내심 트럼프 당선을 기대했었습니다. 별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런 놈'이 어떻게 한 국가를 망가뜨리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어차피 남의 나라 정치다보니 그다지 진지하게 여기지 않은 것도 있었지요.
2023년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을 넘어 전세계 민주정치에 악영향을 끼친 대사건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2016년 당시에만 해도, '설마 미국이 저런 바나나 리퍼블릭에서나 당선될 것 같은 놈을 뽑겠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무식, 무지, 부도덕, 상스러움, 쇼맨십. 아 물론 미국 사람들 멍청한 건 유명하지만, 그래도 여태 당선됐던 클린턴, 부시, 오바마를 보면 정치적 논란은 있을지언정 적당히 품위는 있었던 양반들이었고, 적어도 미국은 밑바닥은 상스러워도 윗대가리는 능력 있고 교양있는 자들이 포진해 있다 라는 통념이 있었으므로.
트럼프가 활용한 대안 우파의 정서, 즉 반지성주의적 음모론과 탈진실적 사고방식, 백인우월주의, 이민자 혐오 등은 트럼프 등장 이전에도 사회 밑바닥에 존재해 왔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지닌 자들도 지들끼리 모여 쑥덕거리고 인터넷에서나 활개를 쳤지,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딥스테이트니 하는 소리들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들 개개인은 힘없는 서민에 불과했고, 그런 소리를 대놓고 하는 순간 사회적인 응징과 눈초리를 받을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되는대로 내뱉었고, 그들의 아이돌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사회적 제재를 받지도 않았을 뿐더러, 합법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기까지 했습니다. 트럼프의 그런 행보는 대안우파에게 용기를 주었고, 과거에는 사렸을 만한 발언들을 점차 대놓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말하자면 대안우파 '혼모노'들이 등장한 거에요. 나름 민주주의 본산지라는 미국에서 벌어진 일을 본 다른 선진국 대안우파들은? 그들도 용기를 얻어 궐기합니다. 미국과 밀접한 한국은 말할 것도 없지요.
민주당 지지자들이 윤석열의 방약무인한 행보를 보면 많이 느꼈을 감정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저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고 나쁜 짓을 하지?' 과거에도 거짓말하고 나쁜짓하는 정치인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교묘한 알리바이와 법적 모호함을 활용해 미꾸라지처럼 설쳤지, 그런 최소한의 '성의'도 없이 멧돼지마냥 일을 저지르는 '중앙정계 정치인'은 없었습니다. 극우 유튜버나 일베의 주장을 공식 정견발표에서 그대로 읊고, 잘못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면 흡사 술자리에서 불콰해진 얼굴로 손을 내젓는듯한 투의 성의없는 대통령실 발표로 갈음하는 그런 놈은 처음입니다. 외교 참사를 일으키고, 거듭된 거짓말을 하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문재인 탓을 하고, 문재인 정부 인사들을 억지 기소로 탄압하며 노조와 전장연을 조질수록 지지율이 올라가는 희안한 대통령입니다. 그 또한 '혼모노'들의 아이돌이기 때문입니다.
진앙지인 미국도 여전히 트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후발주자'인 한국이 뭔가 해결책을 마련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그래도 미국은 미국인지라 일단 연임을 막긴 하더군요. 트럼프 사태의 핵심은, 과거에는 선출직의 정치적 금기로 여겨졌던 '제재를 받지 않는 부도덕한 방약무인함'이 오히려 정치적 '혼모노'들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지지율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점 입니다. 강조하건대 '제재를 받지 않는'입니다. 그 제재가 법적 제재일 수도 있고 물리적 제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제재를 강구하는게 사회 복구를 원하는 세력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명확히 제재를 받는 것을 보여주어야 '혼모노'들을 수면 아래로 밀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