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도 없이 전자결재로 오전반차를 띡 올리고 퇴근한뒤 팀장님 전화와 카톡을 다 안받고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친구들을 배웅하고 두시간동안 정처없이 걷다가 집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남편와 아이를 보내고 누워있다가 8시가 되어 팀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뭐야 어떻게 된거야?
제가 몸이 너무 안좋아서요
오늘 몸이 안좋을걸 어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어제는 마음이 너무 안좋아서요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오전반차쓰고 오후에 출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줄줄 흐른다.
어제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너의 고민은 나의 고민과는 너무 결이 달라. 너의 고민은 해결책이 너무 뚜렷해. "싫다" 라고 말하고 안하면 돼. 그런데 너가 그걸 못해.
유통 쪽 회사에서 3년 정도 일하다보니 사는데서도 을이고 파는데서도 을이고 그런게 신물이 나서 자사제품 자사브랜드가 있는 회사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제조회사로 왔다.
처음엔 모든게 다 좋았다. 신사옥. 깨끗한 환경. 여유로운 분위기. 맛있는 구내식당. 나는 우리팀 대리님의 백업으로 충원된거였고 경력직으로 왔지만 새로운 일을 배운다는 설렘에 부풀어 있었는데
입사 후 두달 정도 지나고 대표님이 회사를 두 개 가지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 갑자기 신사업을 만들었다며 팀장은 나를 그일에 투입했고 대표님이 같은 전혀 다른 회사의 유통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하던거니까, 잘하지 않겠냐고.
? 그때 싫다고 했어야 했는데 그땐 아직 맡은 일도 프로젝트도 없었으니까 그냥 주어진 일이니까 열심히 했다. 월급 받으니까 당장 뭐라도 했다.
한달 정도 지나고 그 전혀 다른 회사의 회의에 불려갔다. 높으신 분들이 여기 와서 여기 일을 더 배우라고 했다. 어차피 여기 일을 해주니까 여기 와있는게 좋을 거라고 했다.
50년은 된듯한 아파트형 공장. 온 건물을 휘감고 있는 담배냄새. 낡고 깨지고 군데군데 전등이 나간 공용화장실. 정신없이 일하는 바쁘고 초조한 표정의 사람들. 끔찍한 직원식당.
싫다고 했다. 원래 회사가 좋다고 했다. 나 이러다 여기 회사 다니게 되는거 아니냐고 물었다. 팀장님은 그럴일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결국 삼개월동안 일주일에 두번씩 그쪽 회사로 출근하는 걸로 협의했다. 삼일은 원래 회사에 출근해서 그쪽 회사의 업무를 보고 이틀은 그쪽 회사에 출근해서 그쪽 회사의 업무를 본다.
이왕 가는거 좋게 마음 먹었다. 원래 회사보다 집도 가깝고. 출퇴근 시간도 앞뒤로 삼십분 정도는 알아서 조정하라고 배려해주고. 확실히 업무적으로 바로바로 해결되는 것들도 있고. 그쪽 팀장님 노하우도 틈틈이 전수받고.
그렇게 약속한 삼개월에서 두달 반이 지났다. 밥먹다 물었다. 팀장님 저 이번달까지만 파견가는 거지요? 팀장님이 대답이 없다.
지난주 금요일, 팀장님이 커피한잔 하잔다. 저 커피 방금 마셨는데요? 아니; 얘기좀하자고...
설마했지만 그쪽 팀장이 아예 일년만 나를 파견해달라고 했단다.
강요하는거 아니라고 했다. 너가 결정하는 거라고 했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된다고 했다.
그럼 저는 아예 그쪽 사람이 되는 건가요? 그쪽 회사로 이직하는 건가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쪽 회사와 연관된 이 사업이 내년에는 없어질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 돌아오면 된다고 한다. 이쪽 회사의 니가 면접볼때 하고 싶다고 했던 그일 할수 있다고 했다. 너는 엄연히 이쪽회사 사람이고 이쪽회사 소속이라고 했다.
생각해본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쪽회사에 출근해서 그쪽회사의 업무를 본다. 나는 이쪽회사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밥도 같이 먹지만 업무적으로 아무런 연계가 없다. (그쪽회사 업무는 나와 팀장님만 본다) 내가 이쪽회사에 있어도 나는 이쪽회사의 일을 할 수 없다. 애초에 내자리였던 대리님의 백업으로는 이미 다른팀에서 보직이동으로 데려와서 충원했다. 이쪽회사엔 내업무가 없지만 나는 이쪽회사 사람이고 내가 그쪽회사로 아예 다니기 시작해도 나는 그쪽회사 사람은 아니다.
어찌됐던 월급만 따박따박 받으면 되는거 아닌가요?
업무효율을 따지면 그쪽회사에 가는게 맞지만 최악의 근무환경. 그냥 계속 이쪽회사로 출퇴근하면 몸만 있고 이도저도 아닌 위치. 팀장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했지만 이미 날 보내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이 어겨졌고 신뢰가 깨졌다.
어제는 그쪽회사로 출근하는 날이었고 그쪽회사 팀장이 날보자마자 묻는다. "생각해봤어요?"
그냥 현상유지할게요. 일주일에 두번 오잖아요.
그걸로는 부족해요. 내가 옆에 끼고 가르칠 게 많아요. 어차피 여기 일을 하는 거잖아요. 그게 더 편한게 맞잖아요.
맞는말이다. 그래도 싫어요. 그냥 싫어요. 가 안나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 걸까? 이쪽회사? 저쪽회사? 어차피 대표가 같으니까 둘다? 어차피 월급 따박따박 나오니까 된거 아닌가?
이성적으로는 가는게 맞는데 그래야 다들 편해지는데 내맘속에서 싫다고 비명을 지른다. 창고같은 사무실. 감옥같아. 밥 맛없어. 주차 끔찍해. 커피머신도 없어. 화장실 최악이야. 애초에 여기 면접봤으면 절대 안다녔을 곳이야.
그럼 안간다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맞나?
매주 목요일 오전마다 그쪽회사 회의가 있다. 짧게는 한시간 길게는 오전 내내 이어지는 그 회의가 끝나면 맥이 탁풀리고 끝났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이 오면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다가 수요일쯤 되면 두근거림이 최고조가 된다. 회의에 대한 부담감.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 목소리 말투. 은근한 질책. 당연하게 하는 요구사항. 그걸 다 수용하는 나.
그래서 오늘은 반차내고 그회의에 안갔다. 다들 날 흉보겠지. 책임감 없다고 질책하겠지. 어차피 놓지도 못하면서 우선 회피하는 나.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하기 싫은 나. 싫다고 한 후의 후폭풍이 두려운 나. 사회 초년생조차 아닌 나. 그런데 여전히 바보같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