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민음사 판 롤리타 번역에 대해서 vol.2 (스포가득)(스압가득)
게시물ID : readers_376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kdakkdak
추천 : 0
조회수 : 5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6/20 02:55:23




https://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readers&no=18805




안녕하세요.

롤리타를 다시 읽는 김에 

롤리타 원서랑 민음사 판이랑 같이 보다가 오역이 너무 심해서 

검색해보다 위의 링크글을 알게되서 해당글에 댓들 달려고 오유 가입했어요!

원래는 댓글만 달려고 했는데 저도 제가 

확인한 오역이나 아쉬운 번역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따로 글을 써봐요.

게시글 제목을 뭘로 할지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아 

예전에 작성된 링크글 제목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롤리타는 읽다보면 2부에서 고비가 오는 듯 해요.

험버트와 롤리타가 미국 전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여러 공간에 대한 서술이 폭포처럼 밀려들어오고,

여행이 끝난 후에도 둘 사이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비틀어지기 시작하면서 화자인 험버트도 한층 더 말을

꼬아가면서 하거든요.


민음사 판에서 1부의 번역은 사실관계가 틀렸다는 느낌이 많이 들지는

않는데 2부의 번역은 뒤로 갈수록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틀리게 번역한 문장이 많아집니다. 

전체적으로 소설이 진행되고 험버트가 더 많이 말을 꼬아가면서 역자가 

힘에 부쳐한다는 인상이 느껴졌어요. 


아직 다 읽지는 않았고 2부 23장까지 읽었는데 

지금 제 손에 문학동네 판은 없어서 두 판본의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제가 느끼기에 민음사 판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생각나는대로 정리해보려합니다. 

대략 링크글과 겹치지 않는 부분에서 기억나는 오역이나

아쉬웠던 번역을 살펴볼게요. 





1.


 ......쿨프의 처녀는 

 돌아서서 문고리를 잡을지도 몰라.

 나는 따라가지 않을 거야. 프레스카도 그래.

 저 매춘부도 안 갈 거야.  p.25


 ...Fräulen von Kulp

 may turn, her hand upon the door;

 I will not follow her. Nor Fresca. Nor

 that Gull.



주인공 험버트가 파리에 있던 시절 썼던 혼성 모방 시입니다. 

무엇에 대한 혼성 모방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T.S.앨리엇의 [Gerontion]이라는 

시의 모방이었어요. 

 

앨리엇의 시에서는 황량한 집의 이미지를 통해서

점점 어떤 위기감이 고양되는데 험버트의 시에서는 그 위기가 농담거리로 

패러디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앨리엇의 시에서는 나머지 인물들이 쿨프의 처녀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원문에서 쿨프의 처녀는 Fräulen von Kulp라고 표기되는데

이 단어는 사람의 이름인 [폰 쿨프 양]이라는 번역이 적합해 보여요. 

[Gerontion]에 대한 정식 번역은 없는 것 같은데 매춘부로 번역된 Gull도 

보통 갈매기라고 옮기는 듯 합니다. 역자가 어떤 맥락에서 갈매기 대신 매춘부라고 

의역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

 


 우연히. 만일 내가 심각한 살인이라도 저지른다면... <만일>이라는 말에 유의하라...(중략)

 당신이 만일 나를 죽도록 괴롭히고 싶다면 그저 나를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순간적으로 

 불같이 폭발해 버릴 것임을 기억하라 (아마 이 모든 게 잘 고쳐지리라)

 때로 나는 꿈 속에서 누굴 죽이려 한다.  p.67



   Incidentally: if I ever commit a serious murder . . . Mark the "if." (중략)

 If and when you wish to sizzle me to death, remember that only a spell of insanity could

 ever give me the simple energy to be a brute (all this amended, perhaps).

 Sometimes I attempt to kill in my dreams.



험버트가 자신의 일기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을 가정하는 문장입니다. 

이 서술에는 한가지 트릭이 있는데, 현재 험버트는 살인을 저지른 죄로

구속이 된 상태에서 본인의 기억에 의존해 잃어버린 일기를 다시 작성합니다. 

그리고 일기에서 본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을 가정하는 부분에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정황(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을 덧붙입니다.

게임에 비유하자면 2회차 플레이어를 위해 준비된 컨텐츠에 해당되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아마 이 모든 게 잘 고쳐지리라]라는 문장은 [아마 이 부분은 수정되었을 것이다]라는

번역이 자연스럽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지 않더라도 amended라는 동사는 과거형이고 

수정될 것이라는 해석보다는 수정되었다는 해석이 자연스러운데,

심지어 같은 챕터 안에서 같은 동사를 사용한 다른 문장은 잘 번역을 해놓고

왜 미래에 대한 가정으로 문장을 번역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원문의 spell of insanity라는 단어도 소설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단어인데

의역보다 직역을 했으면 어떨까 하는 문장이었습니다. 



3.


 

 "싫어, 키스 놀이 같은 것은 생략하고 빨리 밥 먹으러 가요" 

 내가 화들짝 놀란 것은 바로 그때 였다.  (중략)

 

 "왜 그러시나요, 아가씨?"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다 웅얼거린다(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그걸 알아야 한다면, 아빤 길을 잘못 접어든 거예요"

 "그럼 옳은 걸 가르쳐주세요"

 "조금 있다가 전부" 꼬마 난봉꾼이 말했다. 

 그대가 기어오른다. 그대의 가슴이 쿵쾅거린다. 격정에 휩싸여 나의 남성을 불태운다.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는 소리. 멈춤. 다시 덜컹거리는 소리. 복도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죽음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대를 앗아가지 못하리. 여리디여린 소녀여, 오! 그대, 생각할수록

 사랑스럽구나. 그 어느 것도 그대를 앗아가지 못하리.  p.166



 She said: "Look, let's cut out the kissing game and get something to eat." 

 It was then that I sprang my surprise.   (중략)


 "What's the katter with misses?" I muttered (word-control gone) into her hair.

 "If you must know," she said, "you do it the wrong way."

 "Show, wight ray."

 "All in good time," responded the spoonerette.

 Seva ascendes, pulsata, brulans, kitzelans, dementissima. Elevator

 clatterans, pausa, clatterans, populus in corridoro. Hanc nisi mors mihi

 adimet nemo! Juncea puellula, jo pensavo fondissime, nobserva nihil

 quidquam



일단 아쉬운 번역으로 가져왔지만 이 부분은 번역하기 굉장히 어려운 문장이긴 합니다. 

원문에서 마지막 구절은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라틴어가 아니라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어휘를 라틴어 뉘앙스의 발음이 

나도록 변형한 단어들이 섞여있습니다. 

 

지금이야 이런 문장을 쉽게 검색해 볼 수 있지만, 번역 작업을 할 당시에는 이런

기상천외한 문장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려웠을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민음사 판에서도 번역된 문장 바로 옆에 원문을 실어놨습니다. 

저도 검색으로 찾은 해당 문장에 대해 토론을 하는 스레드를 읽고 내용을 유추하게 되었어요.

 

토론에서 다른 부분들의 의미는 비교적 쉽게 정리되었는데 Seva라는 단어의 해석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다가 프랑스어에서 활력이나 포도주의 향을 의미하는 sève의 

변형 같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저는 이 의견이 제일 그럴 듯 해 보였습니다.


토론의 내용을 참고해서 제 임의대로 해석해보자면,

 

 

도취된 향기가 솟구친다, 맥동한다, 불타오른다, 간지럽힌다, 혼을 빼놓는다. 

엘리베이터가 딸깍거림, 멈춤, 딸깍거림, 복도에 모여있는 군중들.

죽음 외에는 그 누구도 그대를 앗아가지 못하리!

작고 여린 소녀여,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분명 번역이 어려운 문장이긴 하지만, 마지막 [nobserva nihil quidquam]

변형된 단어가 없는 라틴어인데 [그 어느 것도 그대를 앗아가지 못하리]로 

기본적인 의미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도록 의역한 것 같아 아쉬운 느낌입니다. 


또한 원문을 살펴보면 중략 이후의 내용에서 험버트는 단어의 앞글자를 바꿔서 말합니다. 

이는 깜짝 놀란 험버트가 말의 '형식'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듯 보입니다. 

따라서 원문의 [word-control gone]에 대한 번역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라는 해석보다 [통제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온다]라는

해석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3.5 

이 부분에 대한 사족 

    

(번역에 대한 내용은 아니니까 읽기 번거로우시면 그냥 넘어가세요)


 

 

험버트의 통제할 수 없는 말은 굉장히 정교하게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키스하는데 무슨 문제 있어?]라는 의미의 matter with kisses

katter with misses라고 잘못 말합니다. 여기서는 원래의 의미가 

잘못된 의미보다 더 우세해 보여요. 


그 다음에 험버트가 잘못 말하는 ["Show, wight ray."]의 원래 의미는

[옳은 방법을 알려줘]이지만, 이 말은 [Show, white ray]

즉, [밝은 빛을 내려줘]라고도 읽히는 듯 합니다. 

작가인 나보코프가 교묘하게 두 문장이 동시에 성립하도록 

Let me know 대신 Show라는 동사를 

사용한 점에 주목해 보세요. 

여기서는 원래의 의미와 잘못된 의미가 서로 비등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통제할 수 없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험버트는 더이상 영어로 말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전도된 형식이 더 우세해집니다. 

이 구절의 마지막 문장은 

[작고 여린 소녀여,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라고

해석되는데 어째서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까요?

그가 바로 직전에 밝은 빛을 요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험버트가 잘못 내뱉은 말은 단순히 의미없는 말이 아니며

원래 했어야 할 말에 종속된 말도 아닙니다. 

그 말들은 완전히 독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나보코프의 세련된 방식, 

그저 선형적으로 양을 늘려가는 방식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빛을 내려줘]라는 이전의 문장을 단순한 우연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이 세련된 방식이 정말로 감탄스러워요. 

 

 

저에게 나보코프의 글은 '짙은 은유'로 다가오는데

이 구절들에서 그 질감이 특히 압축되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사람들이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 혹은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는 방식이 '직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원관념과 거길 향해 다가가는 보조관념의

명확한 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방식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잘못된 의미와 참된 의미의 관계,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관계가 사라집니다. 

둘은 모두 고유한 현실을 갖고 있고 무엇이 원관념이고

보조 관념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은유'에 가까운 방식이고 

비유적으로 말하면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는 호접몽과 같지요.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험버트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퀼티의 관계도

유사한 질감을 전달합니다. 

개인적인 의견과 취향이지만 민음사 판의 역자는 번역의 질 뿐 아니라,

사실주의와 반사실주의를 명확히 갈라놓는 입장에서 

번역을 한 것 같아 아쉽기도 했습니다.   








일단 1부에서 생각나는 건 이 정도입니다. 
링크글에도 1부의 번역에 대한 지적이 있긴 한데
2부만큼 오역이 막 쏟아지지는 않아서
책을 읽을 때 크게 유의하면서 읽지 않아 기억에 덜 남은 것 같아요. 
아래부터는 2부에 있는 내용입니다. 







4.



 그때는 그녀도 나도 뇌물이라는 돈의 위력이 나중에 나의 신경과 그녀의 도덕을 

 얼마나 황폐화시킬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p.202



 In those days, neither she nor I had thought up yet the system of

 monetary bribes which was to work such havoc with my nerves and her morals

 somewhat later.

 

 

번역본에서는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뇌물'과 같은 용돈을 이미 주고있으며,

그 파급효과를 예상하지 못한 듯이 서술합니다. 

원문은 험버트가 롤리타를 쉽게 다루기 위해 '뇌물'을 주는 방식을 아직 

고안하지 못했다고 쓰여있습니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아직 뇌물을 생각해내지 못한 험버트가 

롤리타를 다루기 위해 사용하는 세 가지 비열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1부의 도취된 사냥꾼 여관에서 롤리타가 비어있는 자신의 지갑을 

보여주자 험버트는 '그걸 채우는건 시간 문제야'라고 농담으로 답하는 

장면에서 나중에 지급하게 될 뇌물의 존재가 처음 암시됩니다. 





5. 



 로는 경치를 보는 눈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여기저기 황홀한 곳들을 지적하면

 굉장히 화를 냈다. 우리들의 별 가치 없는 행로의 주변에 늘 존재했던 그 섬세한

 아름다움에 꽤 오랬동안 노출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경치에 대한 그녀의 

 이런 반응들을 인식할 수 있었다.  p.207


 

 Not only had Lo no eye for scenery but she furiously resented my

 calling her attention to this or that enchanting detail of landscape; which

 I myself learned to discern only after being exposed for quite a time to the

 delicate beauty ever present in the margin of our undeserving journey. 

 

 

번역본에서 험버트가 오랜 시간이 걸려 인식한 것은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로의 분노지만, 

원문에서 그가 오랜 시간이 걸려 인식한 것은 로의 분노가 아니라 풍경이 지닌 [별 가치 없는 행로의 주변에 늘

존재했던 그 섬세한 아름다움]입니다. 

 

1부에서 있었던 아쉬운 번역은 말그대로 아쉬운 번역이 많았는데 

2부가 시작되면서 아쉬운 번역이 아닌 오역이 점차 등장합니다. 





6. 



 그림과 같은 경치가 보여주는 역설이랄까.  p.207


 

 paradox of pictorial thought,

 

 

바로 다음 문장입니다. 역설의 주체는 그림과 같은 '경치'가 아니라,

이미지로 떠오르는 그림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 다음 문장에서 험버트가 어린 시절 유럽의 세면실에서 

미국의 풍경을 그린 오일 클로스 그림을 보았고 

처음에는 미국에서 보게된 풍경을 그 그림의 복제로 보았지만

점차 그보다 더 생생한 아름다움을 지닌 대상으로 보게되었다는

서술이 이어집니다.

 

결국 오일 클로스 그림에 대한 기억이 역설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림과 같은 생각이라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맥락을 따질 것도 없이 [thought]라는 명확한 단어를 왜 의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들은 롤리타라는 소설 속에 있는 프루스트적인

순간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7.



 띄엄띄엄 죽 서 있는 나무들의 그름자가 지평선 앞에 드리워져 있고

 클로버가 깔린 들판 위에는 아직도 따가운 정오의 햇살이 내리쬔다.

 그리고 클로드 로렌 풍의 구름은 점점 사라지는 배경과 대조되어 

 뽀얗게 푸르른 창공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아니 그건 다시 비를

 잔뜩 머금은 엄한 엘 그레코 풍의 수평선이 된다. 그리고 흘끗 보이는 

 목이 검게 탄 농부, 졸졸 흐르는 물과 거친 초록색 옥수수밭이 교차되어 

 캔자스의 어떤 곳은 꼭 부챗살이 펼쳐지듯 줄지어 돌아갔다.  p.208

 

 

원문에서 나보코프는 하나의 풍경이 여러가지 인상을 가졌거나,

혹은 여러 풍경에 대한 인상이 하나의 풍경으로 합쳐지는 듯한 뉘앙스의 문장을 

구사합니다. 번역본의 문장은 오역은 아니지만 나보코프의 의도를 잘 살리지

못한 채 개별 풍경에 대한 묘사처럼 읽힙니다. 


원문을 가져오는 대신 원문을 임의대로 해석하자면,

 

 

 지평선을 배경으로 한 줄로 늘어선 나무들의 실루엣과

 클로버로 뒤덮인 들판 위에 떠있는 여전히 뜨거운 정오의 햇살과

 점점 사라지는 배경과 대비되어 겹겹이 쌓인 구름이 안개처럼 자욱한 푸른 하늘에

 선명하게 새겨진 클로드 로렌 풍의 구름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건 다시 잉크 같은 비를 잔뜩 머금은 엄격한 엘 그레코 풍의 지평선이었거나,

 미라처럼 검게 탄 농부의 목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거나, 

 캔자스의 어딘가에서 은빛으로 졸졸 흐르는 물과 거친 초록색 옥수수밭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줄무늬가 부채꼴 안에 배열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건 다시]를 기준으로 각각 3개의 풍경이 위아래로 놓여있고

위아래의 문장이 서로 대응하도록 문단이 구성되어있습니다. 


원문에서는 위아래의 문장에 동일하게 horizo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번역본에서 그걸 각기 지평선과 수평선이라고 떨어뜨려 번역하여 

나보코프의 의도와는 다르게 완전히 별개의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역자가 외래어 사용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실루엣을 그림자라고 번역해서 해당 내용이 땅에 지는 그림자를 말하는지,

어떤 물체가 빛을 등져서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지 

혼란을 야기합니다. 




8. 



 밤에는 큰 트럭들이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색색가지 불을 켜고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뒤에 온 작은 세단에 밀려나곤 했다.  p.208


 

 At night, tall trucks studded with colored lights, like dreadful giant

 Christmas trees, loomed in the darkness and thundered by the belated little

 sedan.

 

 

번역본은 트럭 뒤에 세단이 붙은 상황을 보여주지만, 

원문에서 '뒤에서 나타났었다'라는 의미의 [loomed]라는 동사의 주어는 트럭입니다. 

따라서 원문은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거대한 트럭이 세단의 뒤에 따라붙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상황을 정반대로 그려놓으니 (트럭이 세단을 향해) '천둥 같은 경적을 울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thundered]에 대한 해석이 번역본에서는 쏙 빠져버리고 

뒤에서 나타난 세단에게 어째서 트럭이 얌전히 '밀려나서' 길을 비켜주는지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9. 



 독립, 미주리, 옛 오리건 산길의 출발점.  p.213


오리건 트레일이 시작되는 도시 인디펜던스를 고유명사로 

해석하지 않고 독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10.



 위층에는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는 그 낡은 가짜를 조금 페인트칠했다.  p.247


 

 Upstairs he had a studio--he painted a little, the old fraud.

 

 

이 번역은 특히 황당합니다. 문장이 꼬여있지 않은 데도 

[그림을 그렸다]라는 동사를 [페인트칠했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문장은 비어즐리에 정착한 험버트의 이웃 게스톤 고딘과 

그의 집을 묘사하는 부분 중 일부입니다. 

원문을 해석하자면, 

[그는 위층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오래된 사기꾼에 관한 그림 몇 점을 그렸다]

가 될 듯합니다. 

 

게스톤은 험버트가 평가절하하는 인물인 동시에 여러모로

험버트와 겹쳐지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게스톤의 스튜디오에는 동성애 성향을 지녔던 여러 작가들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고 이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암시 중 하나 입니다. 

 

다음 문단에서 험버트는 그의 집보다 자기 집에서 그와 체스를 두는 편을 선호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동성애에 대한 험버트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공교롭게도 1부의 램즈데일에서 샬롯은 험버트가 이층의 방에서 하숙하기 전에

그 방을 [세미 스튜디오]라고 불렀습니다.  




11.



 쌍쌍이 음악회를 즐긴다. 대리석처럼 고요한 얼굴의 프랑스인 둘이 나란히 

 앉았고, 험버트 씨의 음악 좋아하는 어린 딸은 아버지의 오른쪽에, 그리고

 W 교수의 음악 좋아하는 어린 소년은 G.G 씨의 왼편에 앉았다.  p.257



 Enjoying, in duplicate, a concert: two marble-faced,

 becalmed Frenchmen sitting side by side, with Monsieur H. H.'s musical

 little girl on her father's right, and the musical little boy of Professor W.



원문에서 프랑스인의 곁에 나란히 앉은 대상은 다른 프랑스인이 아닌

험버트의 딸과 W 교수의 아들입니다. 즉 대칭을 이루고 앉아있는

두 명의 대리석 얼굴의 프랑스인은 각각 험버트와 게스톤 고딘(G.G)입니다. 

 

번역본에서는 두 프랑스인이 나란히 앉았다고 서술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각각 소녀와 소년을 끼고 앉은 험버트, 게스톤과 

두 프랑스인이 다른 인물로 비쳐지도록 서술되었습니다. 




12.



 이바 로즌은 프랑스에서 온 귀여운 아이였는데, 뛰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완벽한 사춘기의 모습이라든가 방황하는 눈빛, 튀어나온 

 광대뼈등이 통찰력 있는 아마추어에게는 그런 대로 매력이 있었다. (중략)

 다른 민족과 피가 섞인 위대한 붉은 머리 종족이었다.  p.258



 Eva Rosen, a displaced little person from France, was on the other hand

 a good example of a not strikingly beautiful child revealing to the

 perspicacious amateur some of the basic elements of nymphet charm, such as a

 perfect pubescent figure and lingering eyes and high cheekbones. (중략)

 her likes--the great clan of intra-racial redheads;

 

 

이바 로즌이 프랑스 출신이라는 점을 설명할 때 원문에서 [displaced]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이는 단순한 이민보다 망명의 의미로 해석되는 표현입니다. 

험버트가 비어즐리에 정착한 1948년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녀는 2차 대전 시기 프랑스에서 망명온 유대인으로 보여집니다.

 

중략 이후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녀의 붉은 머리에 대한 

험버트의 인종적 시선이 드러납니다.

[intra-racial redheads]를 직역하자면, [내부의 - 인종적인 붉은 머리들]인데

전체 문장을 의역하자면, 

[그녀의 동족들은 근친상간에 가깝게 교배하여 

그들의 인종적 특징인 붉은 머리를 유지하는 대단한 족속들이다] 

라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분명 번역이 어려운 문장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intra]라는 단어를 다른 민족과 피가 섞이다라고

번역했을까요..?

 

여기서 등장한 붉은 머리의 이미지는 롤리타가 참여하는 연극

[도취된 사냥꾼들]에서 여섯 명의 사냥꾼들이 쓰는 붉은 모자에서 

반복됩니다. 




13.



 모나의 어머니가 받았다. "예, 집에 있어요" 그러고는

 어머니 특유의 정중한 즐거움에서 뜻없이 웃으며 소리친다.

 "로이한테서 전화 왔다!"  p.276



 Mona's mother answered: "Oh yes, she's in" 

 and retreated with a mother's neutral laugh of polite pleasure 

 to shout off stage "Roy calling!"

 

 

이 장면은 연극을 배우기 시작한 롤리타가 점차 자신을 

속이려한다는 인상을 받은 험버트가 그녀의 거짓말을 

파헤치기 위해 롤리타의 친구 모나에게 전화하는 장면입니다. 

 

모나의 어머니는 험버트를 로이(모나와 썸을 타는 남자 아이)로

착각하고 로이에게 전화가 왔다고 모나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번역본에서는 험버트를 로이로 착각한 모나의 어머니가 

뜬금없이 자식 또래의 남자 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영어는 존댓말이 없기에 문제가 없지만 한국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직역한 문장으로 보입니다. 

 

덕분에 모나의 어머니가 험버트의 전화를

일부러 로이라고 소개하는 상황인지,

단순히 험버트를 로이라고 착각한 상황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오역이 많다는 점을 염두해 두고 다시 읽어보니 

그제야 이 장면이 이해가 되네요.  




14.



 한 열 발자국쯤 떨어진(신은 잘 보이지 않지만 아직 우리와 함께 있다)

 전화 부스의 유리 속에서 그녀는 줄을 오그려쥐고 수화기에 바싹 밀착하고 있다가

 나를 곁눈으로 보고 얼른 몸을 돌리더니 급히 수화기를 놓는다.  p.280



 some ten paces away Lolita, though the glass

 of a telephone booth (membranous god still with us), cupping the tube,

 confidentially hunched over it, slit her eyes at me, turned away with her

 treasure, hurriedly hung up, and walked out with a flourish.

 

 

험버트와 크게 싸운 롤리타가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험버트가 그 뒤를 쫓다가 공중 전화 부스 속의 롤리타를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괄호 속에 있는 [membranous god]을 직역하면 

막(횡경막 같은 생물의)의 신이고 이를 다듬으면 [장막의 신]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문장은 미친 듯이 롤리타를 뒤쫓아온 험버트의 앞에

여전히 공중 전화 부스의 유리가 놓여있는 상황을 

[여전히 우리 사이에는 장막의 신이 놓여 있었다]라고 표현하는 동시에

그들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다음 문장에서 롤리타는 180도 태도를 바꿔 험버트에게 

살갑게 다가가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장막의 신으로 인해

그녀의 태도가 모종의 음모를 숨긴 거짓된 태도라는 인상이

짙어집니다. 

 

번역본은 글쎄요... 의역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앞 뒤 문맥을 파악했어야하지 않았을까요?




15.



 집을 향해 가고 있는 어린 순례자가 다시 밤나무 성으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에 나타났을 때는 적어도 약 한 시간 반 정도가

 흐른 뒤였다.  p.289


 At least an hour and a half must have elapsed when this homeward-bound little

 pilgrim appeared on the winding road leading to Chestnut Castle.

 

 

롤리타와 다시 떠난 여행에서 험버트는 캐스빔이라는 마을에 들렀습니다. 

그는 마을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순례자들이 등장하는 옛 그림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볼일을 마치고 숙소를 향해 돌아가는 

험버트를 그림 속의 순례자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으므로 어린 순례자보다

작은 순례자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입니다. 




16. 



 예상했듯이 불쌍한 시인은 제3장, 그 불어로 말하는 부분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단다. 기억나? [너의 애인 시멘에게 말하는 것을

 잊지 마라. 호수가 아름다워 너를 그곳으로 안내하겠다.] 아름다운 행운이여!

 [너를 그곳에] - 혀가 꼬이는 것 같아!  p.303



 "As expected, poor Poet stumbled in Scene III when arriving at the bit

 of French nonsense. Remember? Ne manque pas de dire þ ton amant, Chimõne,

 comme le lac est beau car il faut qu'il t'y mène. Lucky beau! Qu'il t'y

 --What a tongue-twister! 



여행을 떠난 롤리타에게 모나가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험버트는 이 편지에 무언가 감춰져 있다고 느끼지만 심신이 지친 상태여서

깊게 파고들기를 포기합니다. 

 

이 편지에서 모나는 연극에서 자신이 맡았던 시인을 연기하면서

프랑스어로 된 대사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모나가 두 번 반복해서 언급하는 프랑스어 [너를 그곳에]는 

험버트를 쫓아오는 퀼티에 대한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 부분은 번역을 하더라도 

원문의 단어를 주석으로 달아주었다면 어땠을까하네요.  




17.



 로가 익살스레 차를 굴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엔진도 분명히 움직인다.

 내 기억엔 엔진도 끄고 비상 브레이크도 걸어두었는데,  p.311



 I could make out Lo ludicrously at the wheel, and the

 engine was certainly running--though I remembered 

 I had cut it but had not applied the emergency brake;

 

 

타이어가 펑크난 상황에서 험버트가 자신을 쫓아오던 퀼티에게

다가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로가 차를 움직이는 상황입니다. 

원문에서 험버트는 비상 브레이크는 걸어두지 않았다고 기억하네요.




18.



 그 상자의 권총을 주머니 속에 넣어두라구 - 그래야 때가 되면 정신 이상으로

 저질렀다고 변명할 수 있잖아.  p.312



 -to transfer the weapon from box to pocket

 --so as to be ready to take advantage of the spell of

 insanity when it does come.



퀼티의 추적에 점점 미쳐가는 험버트가 총을 꺼내기 쉬운 위치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spell of insanity]라는 표현이 반복된 문장입니다. 

또한, 이득을 취하다라는 의미의 [take advantage]라는 표현도

소설에서 중요하게 반복됩니다. 

 

소설 내내 누군가가 다른 이의 약점을 이용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며

이후에 험버트가 퀼티에게 읽도록 시키는 자신의 시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해당 표현들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이런 단어들의 뉘앙스를 살릴 수 있는

번역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쉽습니다. 

 

의역된 문장의 내용도 문맥에 잘 맞지는 않습니다. 

번역본은 살인 이후 변명거리를 만들어야한다는 내용이지만

원문은 '자신이 미쳤을 때 상대에게 쉽게 총을 쏠 수 있도록'이라는 

내용으로 읽힙니다. 




19.



 어떤 신비스런 의식의 수행자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녀가

 어른의 행동을 천연스레 흉내내는 동안, 나는 그녀를 어떤 

 전략적인 지점에서 지켜보곤 했다. 어둠 속에서 신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흉내내는 행동, 젊은 새엄마를 처음 대할 때 표정,

 푸릇푸릇한 과수원에서 짓밟힌 풀 냄새를 맡을 때, 그녀의 

 교묘하고 가늘고 아기 같은 손으로 [없는] 사물을 잡는 흉내를 

 낼 때 등.  p.312



 when I would observe her from some strategic point while she, like a

 hypnotic subject of a performer in a mystic rite, produced sophisticated

 version of infantile make-believe by going through the mimetic actions of

 hearing a moan in the dark, seeing for the first time a brand new young

 stepmother, tasting something she hated, such as buttermilk, smelling

 crushed grass in a lush orchard, or touching mirages of objects with her

 sly, slender, girl-child hands.



험버트가 롤리타가 연극을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장면을 

회상하는 문장입니다. 

번역본에서 연습의 일환으로 롤리타가 어른의 행동을 흉내냈다고 쓰여있지만,

원문에서 그녀는

[sophisticated version of infantile make-believe] - [어린 아이들이 하는 행동의 그럴듯 하고 정교한 여러 양상들]

[produced] - 연출합니다. 

 

번역문에 포함된 롤리타가 연습하는 행동에 대한 구체적 예시들을 읽어보면

그녀가 어른보다 아이의 행동을 연습한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19.5

다시 한 번 사족

 

 

저는 이 문장에 대한 번역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그 이유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 번역된 문장은 명백히 목적어를 잘못 해석 했을 뿐 아니라 그 외의 뉘앙스에 대해서도 

역자가 지나치게 많이 개입했습니다. 

 

나보코프는 롤리타가 어린 아이의 행동을 정교하게 연출했다고 서술했을 뿐,

흉내내었다고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롤리타의 연기가 흉내라면 이는 주어진 기준(흉내의 원본)에 의해 얼마나 잘했고 못했는지에 대한

정량적 평가의 대상으로 환원됩니다. 

 

롤리타의 연기와 롤리타가 지닌 아름다움은 어떤 원본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미국의 풍경이 오일 클로스 그림의 복제에서 벗어나듯이 

험버트에게 롤리타는 에너벨의 복제에서 벗어납니다. 

험버트에게 롤리타란 그 자체로 날개를 갖고 날아가버리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롤리타라는 소설은 분명히 프루스트의 취향을 계승하고 있으며

정신 분석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의 패러디를 담고있습니다. 




20.



 그녀의 테니스는 젊은이가 꾸며낼 수 있던 최고의 연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런 흉내내기가 현실을 재는 척도였을 테지만 말이다.  p.314



 Her tennis was the highest point to which I can imagine a young

 creature bringing the art of make-believe, although I daresay, for her it

 was the very geometry of basic reality.



번역본에는 흉내내기라는 여전히 미묘한 뉘앙스가 깔려있습니다. 

[최고의 연기]라는 표현보다 [믿음직한 예술] - [the art of make-believe]이라는 표현은 어떨까요?

 

험버트에게 롤리타의 테니스와 롤리타의 연기는 분명히 다른 대상입니다. 

그녀의 테니스가 좀 더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닌 램즈데일에 있던 시절의 롤리타와 이어진다면,

그녀의 연기는 배신의 음모를 감추고 있는 절망적인 아름다움으로서 

비어즐리에서 험버트를 배신하는 방법을 배우는 롤리타와 이어집니다. 

 

이 문장이 포함된 챕터 내내 롤리타가 테니스 치는 모습에는 속임수가 없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롤리타가 테니스를 치는 와중에 어두운 비어즐리 생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밝은 미소를 험버트를 향해 지어주는

대목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번역된 문장의 두번째 부분에 적합한 해석은

[감히 말하건데,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런 믿음직한 예술이 현실을 이루는 척도였을 테지만 말이다]

라고 보여집니다. 

두번째 문장 또한 특정한 의도를 갖고 이루어지는 연기와 구분되는 테니스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21.



 그녀는 일상에서 그토록 잔인하고 교묘했지만 공을 다룰 때는 순진하고

 솔직하고 친절했다. 그래서 아무리 투박하고 불완전해도, 승리를 향해

 찌르고 미는, 이류지만 단호한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p.316



 She who was so cruel and crafty in everyday life, revealed an

 innocence, a frankness, a kindness of ball-placing, that permitted a

 second-rate but determined player, no matter how uncouth and incompetent, to

 poke and cut his way to victory.



두 문장이 [그래서]라는 접속사를 통해 형식적으로는 인과관계로 묶여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긴밀히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순진하고 솔직한 것과 그녀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이류 선수가 되는 것에 

대체 무슨 인과관계가 있나요? 

 

두 번째 문장을 원문에 맞춰 해석하면,

[그래서 그녀를 이겨먹기로 마음먹은 이류 선수가 아무리 무례하고 무능하더라도 

쉽게 승리를 허용하고 말았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번역된 문장에서는 [permitted] - '허용했다'라는 동사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번역 되었습니다. 




22.



 그들은 로가 순진하게 나를 돕고 받쳐주는 약 오십 번의 연속 강타를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공이 그녀 머리 위로 날아 코트 밖으로 나가서 그녀를 헐떡거리게 했던 연타가 중단될 때까지.

 그러자 나의 소중한 연인은 승리의 기쁨에 들뜬다.  p.318



 they fell to admiring very vocally a rally of some fifty exchanges that Lo 

 innocently helped me to foster and uphold--until there occurred a syncope 

 in the series causing her to gasp as her overhead smash went out of court, 

 whereupon she melted into winsome merriment, my golden pet.

 

 

우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역자가 지나치게 외래어 사용을 경계합니다. 

이 문장이 포함된 챕터 내내 백핸드, 포핸드, 드라이브, 발리, 스매시, 랠리 등등 테니스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굳이 한국어로 풀어써서 읽을 때 직관적이지 않은 문장들이 반복됩니다. 

분명 이전 챕터에서 롤리타가 테니스를 배우는 장면에서 역자가 백핸드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둘째로 원문에서 롤리타가 날린 스매쉬가 라인을 벗어나서

포인트를 잃은 상황이 롤리타를 향해 오는 공이 코트 밖으로 나가

포인트를 얻은 상황으로 뒤바뀌어 있습니다. 

 

롤리타가 승리의 기쁨에 들뜬다는 무리한 의역은 인심 좋은 덤처럼 보입니다. 




23.



 화장실을 다녀온 뒤 나는 바에서 독한 술을 한 잔 마시고, 보복전을 시작한다.  p.320


 After a visit to the purling men's room and a stiff drink at the bar,

 I started on my return march.

 

 

테니스를 치던 험버트가 전화를 받으러 호텔 로비에 왔다가 테니스 장으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원문에서는 [return match] - '재시합'이라는 단어를 비틀어서

[return march] - '다시 돌아가는 행진'이라고 재치있게 표현합니다. 

 

역자가 충분히 의역을 할 수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선택된 단어의 뉘앙스가 너무 자극적입니다. 

재시합 대신 보복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읽는 입장에서

보복이라는 단어의 뉘앙스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됩니다.




24.



 "나한테 으르렁거릴 필요 없어" 그는 이상스럽게 기가 죽어 불평을 한다.  p.404


 "You need not roar at me," he complained in his strange feminine manner.



퀼티와 복수를 위해 찾아간 험버트가 대치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기가 죽었다는 표현에 해당하는 원문은 [feminine manner]입니다. 

원문의 표현대로 문장을 해석하자면,

[그는 이상스레 여성적인 태도로 불평을 한다] 

입니다. 

 

언뜻 보면 충분히 의역을 할 수 있는 문장으로 보이지만, 

이 문장은 조금 뒤 총을 놓고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표현과 대응합니다. 

 

[ 그리고 갑자기 그는 거센 힘으로 나를 덮쳤다. 권총이 옷장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그는 정력적이라기보다 성급했고.... (중략)]

 

퀼티는 이상스레 여성적인 동시에 정력적이라기보다 성급한 태도를 지닌 성적으로

모호한 존재이며 이는 앞에서 나왔던 여러 장면들과 이어지는 중요한 테마 입니다. 

 

 

이를 나열해 보자면,


1)험버트가 프랑스에 있던 시절 님펫인 줄 알고 관찰했던 실루엣이 중년 남성의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장면

 

2)캠프에 있는 롤리타를 데려가기 전날 밤 험버트가 꾸는 괴상한 양성애자와 관계를 맺는 꿈

 

3)공중화장실에 대한 험버트의 이상한 거부감은 기본적으로 롤리타를 감시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불안감으로 보이지만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그려진 표지판

(남자-여자, 존-제인, 재크-질, 그리고 숫사슴-암사슴까지)에 대한 거부감으로도 읽힙니다. 

 

4)게스톤 고딘에 대한 험버트의 평가와 두 인물 사이의 유사성

 

5)험버트에게 퀼티를 여성이라고 소개하는 롤리타의 말

 

6)자신을 성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밝히는 퀼티

 

 

이 테마에 대한 글은 따로 글 한 편을 써도 꽤 길어질 듯 합니다. 

어쨋든 소설에 대한 중요한 단서 중 하나를 평범한 느낌이 들도록

의역한 점은 아쉽습니다. 








일단 생각나는 건 이정도입니다.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원래는 명백하게 사실관계를 잘못 번역한 문장을 정리하려 했는데

쓰다보니 욕심이 생겨 개인적인 취향에서 아쉬웠던 

문장까지 두서없이 적어버렸네요.

 

번역된 책과 원서를 비교하며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아쉬웠던 점이 많아서 놀랐어요.

 

 

찾아보니 민음사 판과 문학동네 판의 번역을 비교한 글이 많던데

어느 번역이 더 낫냐는 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애초에 이런 시적인 문장에 대한 번역은 정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문장들을 완벽히 번역할 수는 없다는 점은 역자의 능력과는

별개의 사실인 것 같아요. 

원문을 읽을 때 도움이 되도록 기본적인 내용들을 전달한다면

어떤 번역이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민음사 판의 번역은 원문의 기본적인 내용을 잘못 번역한 

점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오탈자나 고유명사가 통일되지 않는

문제는 독자가 잘못된 편집이라는 걸 감안하고 알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데, 

민음사 판 롤리타는 원서를 읽지 않는 독자는 판단할 수 없는 지점에서 

번역이 덜 다듬어진 느낌이었어요. 

 

 

나보코프는 번역에 민감한 작가였습니다. 천재들이 쓴 완벽한 문장에

완벽한 번역을 해야한다는 입장이었지요. 

 

그와 대비해서 흥미로웠던 입장은 보르헤스의 입장이었어요.

천일야화에 대한 강의에서 자신이 읽었던 여러 판본들을 언급하면서

진정 완벽한 글은 시간의 우발적인 작용에서도 살아남는 글이라고

말하거든요. 

 

롤리타라는 신뢰할 수 없는 저자를 둔 소설을 쓴 나보코프가 

누구보다도 작가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점은 사뭇 신기합니다. 

번역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두 작가가 했던 강의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어요. 

 

 

어쨌든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저도 생각을 정리해볼 글을 쓰도록

글을 작성하셨던 링크글 작성자 분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