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한 송이의 꽃으로 천지에 봄이 왔음을 알려라
게시물ID : lovestory_951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elltrow
추천 : 0
조회수 : 12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04/02 22:51:05
옵션
  • 창작글

  

세계일화 世界一花

 

 

 

아이야, 아빠는 엊그제 엄마와 함께 읍내 미용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꽃집을 들렀다. 집 근처 농협에서 저렴한 카라 몇 송이를 샀는데 홀로 두기에는 허전해 곁들인 친구들을 찾았지. 조팝나무 한 가지를 사서 나누어 잘라 넣고 군데군데에는 빛바랜 살구와 분홍, 잿빛 사이 어디쯤 있어 보이는 카네이션 몇 송이를 장식했지. 우리는 네가 식사하는 자리 바로 뒤에 그 화병을 올려두었단다. 열심히 밥 먹는 네 모습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금 더 화사하게 보고 싶어서. 갈아입히면 곧바로 범벅투성이가 되어 버리는 네 옷가지를 보아도 이제는 덜 화가 나더라.

 


 

아빠는 요즘 매일 같이 꽃을 보면서 산다. 벚꽃도 지천이거니와 동다헌에는 작약도 피었다 떨어지고, 수선화도 가득하지. 능수매화는 흐드러졌다가 꽃비가 내렸다. 기억나니. 며칠 전 할머니와 산책하러 가던 길에, 할아버지와 킥보드 타러 가던 길에 너는 꽃비를 맞았어. 정작 너는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뭐 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꽃 그 자체는 아닐 테니까. 꽃은 어디에 두는지, 무엇과 함께 있는지가 중요하고 아빠는 네가 꽃잎 사이에 서 있어서 행복했단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화병이고, 그림이고, 대지니까.

 


 

꽃병은 꽃을 돋보이게 한단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지. 꽃병은 꽃을 품어서 지키고, 꽃의 언어를 우리가 들을 수 있게 풍족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꽃병은 산과 들과 대지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서 예로부터 자연을 굳이 내 몸 가까이 두려고 갖은 힘을 들였지. 예술이란 단어의 예(藝)는 본래 한자로 꽃과 나무를 잘 가꾸는 일을 뜻했다. 저 먼 산에 서 있는 꽃과 나무가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굳이 그걸 파 와서 내 정원에 심어야만 성이 풀렸다. 하지만 살던 곳이 바뀌면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모든 생물이 매한가지라 예나 지금이나 식물을 살리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던 듯해. 그래서 예술이란 작게는 저 먼 곳에 있던 식물을 죽이지 않고 잘 살리는 일이었고, 크게는 자연의 완벽함을 내 영역 안으로 옮겨와 인위적으로 훌륭히 살려내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꽃병은 후자를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고, 우리 가족이 하는 찻일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있단다.

 

 

 

 

최예원 테오리아.png


 

 

 

얼마 전 남해에 잠깐 내려와 쉬고 계시는 네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던 길에, 카페에 들렀는데 거기에 예쁜 꽃을 그리는 화가 한 분이 사시더라. 아몬드꽃 같기도 하고, 목련 같기도 한데 무슨 꽃인지 묻지는 않았어. 그냥 그 그림이 네 놀이터 근처에 두면 어울릴 것 같아서 갖고 싶었지. 그림을 살 돈은 없고 그래서 포스터를 주문해 두었단다. 엊그제 도착했다고 하니 조만간 가져와서 심심한 액자에 넣어 꽃이 다 지는 늦은 봄에 거실에 걸어 두어야겠다. 아이야. 너는 청명에 태어난 사람이니 평생 꽃과 나무와 함께 살아갈 운명이겠구나. 한 송이의 꽃으로 천지에 봄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되어도 좋지만, 네가 그 세계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담는 소박한 꽃병이 되어도 아빠는 좋겠다. 이미 너는 우리 가족에게 세상에 핀 단 하나의 꽃이니까.

 

 

 

 

청명날 앞에서,

우리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아빠로서 많은 이들과 함께 축하하고 싶어

야심한 밤에 분위기에 한껏 취해 이렇게 글을 남겨봅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