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산나물과 엄마와 차
어릴적에는 나물이 참 싫었다. 시골에서 자란 촌놈이 먹을게 뭐 있었겠냐 싶겠지만 생각보다 시골사람들이 잘 먹고 산다. 농협 하나로마트에 가면 먹을 것이 널렸다. 양 많고, 품질 좋고. 생산지가 곧 소비지니 얼마나 신선하겠는가. 게다가 여기는 바닷가다. 육해공이 다 좋다. 우리는 단백질을 사랑하고, 질 좋은 생선도 싸고 맛나다.
지금에 와서야 이 나물도 맛있고, 저 풀떼기도 맛있지만 어릴적에는 정말 나물이 싫었다. 나물 좋아하는 어린이가 어디 있겠나. 이름도 모르고 상 위에 오르니까 그냥 먹어야 했던 그 쓰고, 떫고, 비리고, 지나치게 아삭이는 것을 넘어 뻣뻣하고, 풀냄새 나는 그 나물거리들. 어머니는 절에 갔다 오시는 날이면 더 싱싱하고 더 푸짐하게 나물거리들을 장만해 주셨는데 그런 날은 정말 밥 먹기가 싫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나는 말 잘 듣는 막내아들이고, 우리집은 반찬투정 없는 곳이라는 법칙이 깨지면 안 되었으니까. 그건 기본적인 밥상머리 교육이었고, 그렇게 난 한 상에 서너 가지가 넘어가는 갖가지 나물들을 다 먹어치워야만 했다.
왜 그렇게 싫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드는 생각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물이 싫었던 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고, 어쩌면 조금만 싫을 수 있었는데 더 싫어져버린 이유는 내가 나물을 스스로 진지하게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거라고. 물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을 수도 있다. 나물이 나를 거부했을 수도 있다. 나물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가 나빴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때는 나물이 내 몸속에 들어와 알 수 없는 이유로 알 수 없는 작용을 해서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다 큰 어른이 된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나물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용기가 있었더라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까. 논산훈련소에서 군생활을 할 때 내 선임 중 한 명은 경호학과 출신의 운동하던 사람이었다. 190에 육박하는 키에 100키로가 넘어가는 스펙의 그 근육질 남자는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로 차렷자세 한 나를 군화로 차서 3미터는 넘게 날려보냈다. 관물대에 쌓여 있던 모포가 떨어지고 서랍장이 열리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여자친구의 사진이 떨어졌다. 그 선임은 그녀의 사진을 주워들고 실실 웃으며 가버렸고 나는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다. 갈비뼈가 소중한지, 그녀가 소중한지 저울질 해볼 틈새도 없었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일말상초 시절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버렸고, 사라진 사진과 함께 인연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 선임이 아직까지 무당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뭘 가져갔는지는 모르겠다. 액운인가. 천운인가. 어쨌거나 그 때 내가 사진을 돌려주세요 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다면 뭔가 조금 달라졌을까. 일병 말 호봉 때 나간 9박10일 정기휴가에서 그녀의 변심을 되돌리기 위해 조금 더 과감해질 수 있었을까. 정작 건네보지도 못한 비싼 꽃다발을 사면서는 왜그리 히죽거리며 좋아했을까. 용기없는 자여. 감히 미래의 내가 말하건데, 그녀를 만났어도 그녀는 그 꽃다발을 받지 아니했을 것이니라. 그녀는 지하철에서 당신이 다시 손을 잡아도 재차 뿌리쳤을 것이며, 그 선임에게 사진을 돌려달라 말했다면 갈비뼈 하나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물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냈어야 했다. 나물은 그냥 싫은 것이지만, 동시에 싫어하지 않을 이유도 충분하니까. 스물이 넘어서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나물을 그토록 싫어하던 그 시절부터 채식을 시작하셨다. 나는 그녀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비로소 어른이 된 아들로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효도를 하게 되었다. ‘들어드리기’. 무교인 나와 다르게 어머니는 부처님을 마음 깊이 존경하셨고, 존경하는 그 깊이만큼 가르침을 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믿으셨다. 어머니는 가족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셨고, ‘해야 할 일은 그저 해야 할 뿐’이라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분이셨다. 절에 가지 않게 된 시절부터는 매일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기도를 올리셨다. 그리고 채식을 하셨다. 어머니의 입에서 라면스프의 맛과 생선의 고소함, 고기의 육즙향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셨을 때 그녀는 향기가 나는 채소들의 싱긋함과 다채로움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갖가지 산나물을 좋아하셨고, 땅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다양한 채소를 심어 직접 길러 드셨다. 작년에는 강황까지 셀프로 제작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뭐 말 다했지. 어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차를 마시며 이렇게 조곤조곤 이야기하셨다. “너는 이번 생의 목표가 뭐니? 나는 최대한 떳떳하게 살고, 덜 상처주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서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아들로서 듣기 힘들었던 그 한 마디. 동시에 눈감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인간으로서 가지는 무한한 존경심. 그래서였겠지. 어머니는 나물을 좋아하셨다. 그리고 이젠 나도 나물을 좋아한다.
차가 좋은 순간이 언젠줄 아는가? 나는 특히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그 순간이 너무 좋다. 비밀처럼 베일에 싸인 그 사람의 껍질을 벗겨내고 한 1미리 만큼 더 가깝게 느껴지는 장면이 참 좋다. 정작 그 사람이 내게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용기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이해하게 된 결과라 더 마음에 든다. 생각해보면 세상 원리가 그렇다. 고등학교 때 수학이 어려워서 미칠 것만 같았을 때 수학의 정석을 세 번 풀어보라는 누군가의 말을 들었다. 정말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말 그대로 다 읽고, 다 풀었다. 쉽다고 넘기는 것 없이, 정석처럼 세 바퀴를 돌았더니 글쎄,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잡다하게 열 권의 문제를 닥치는대로 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정면으로 마주본다는 건, 외면하지 않는다는 건, 용기를 낸다는 건 상대방의 베일을 벗기는 가장 쉬운 지름길이란 걸 어릴적에는 몰랐다. 차를 마시며 어제는 그 선임을 용서했고, 내일은 헤어진 그 여자친구를 이해하겠지. 그리고 오늘은,
새로 일구는 밭을 간다. 아침에 홀로 차 마시면서 생각해보니 그 자리에 산나물이 제격일 것 같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여기에는 머위도 심고, 취나물도 심고, 부지깽이나물도 심어야지. 돋아나는 능수단풍의 새싹과 더불어 가을이 되면 하늘은 푸르고, 붉은 단풍은 물들어 머리를 숙이고, 그 아래에서 여전히 산나물들은 빳빳하니 초록빛 머리를 들고 붉은색 푸른색 서로 어울려 한층 더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나는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하고, 그러면 혹시 모르지. 나도 조금 더 괜찮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