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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1. 조국을 향해 앞으로(3)
“결혼은 했지?”
“선생님은요?”
“타국에서 결혼하기가 쉽겠니?”
“저는 했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데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때에도 관심있게 그녀를 지켜보기는 했지만 특별한 감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소련에서도 가끔씩 떠올리기는 했었지만 역시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녀도 지금 혼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여자였다. 그런데 아직 자신은 미혼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워낙 오랜만이라 그만큼의 시간 간격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타국생활에서 쌓였던 외로움이 그녀를 보자 분출되는 것일까.
그녀도 마동주의 눈빛을 읽었다. 기분이 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그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소녀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감상 같은 것이었다고 믿고 있었던 터였다. 그녀만이 아니라 학습하던 여학생들은 거의가 마동주를 짝사랑했다. 혁명에의 확신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젊은 혁명가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동주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것을 알고 난 지금 왜 마음이 이렇게 야릇한 지 모를 일이었다.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사실은요, 꼬뮨과 결혼했어요, 선생님.”
“...... 완전히 노처녀구나. 어서 시집을 가야될 텐데.”
묘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마동주는 애써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들은 지나온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니?”
“당요?”
“왜, 무슨 일이 있니?”
“무슨 일이 있긴요.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서로의 이야기 끝에 이어진 마동주의 본론에 당황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그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꼭 해야 할 일이 아니겠니?”
“......”
“지금 미제놈들이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는 건 너도 알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혁명은 그만큼 더 힘들게 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소련은 미제놈들에게서 북부지역을 빼앗은 거야. 북부지역에서만이라도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소련의 계획이야. 당만 굳건하게 서면 38선 남쪽도 혁명이 가능해.”
“......”
그녀가 보기에 마동주는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KGB의 첩보원이었다. 마동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블라디보스톡 지부장과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게 놔둬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면에서 소련도 미국과 다를 것이 없잖아요? 묻고 싶은 것을 그녀는 눌러 참았다. 마동주에게 함부로 해서 될 말이 아니었다. 소련에서 알게 되면 곤란할 계획이 진행 중이었다.
“너는 민선생님과 선이 닿고 있겠지? 연결 좀 해다오.”
“알겠어요.”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마동주가 당 재건을 이야기할 때부터 분명히 민상희를 찾으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만약 망설인다면 마동주가 의심을 하고 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보단 민에게 보내는 것이 나으리란 판단이었다.
"마동지, 반갑소이다, 반가워!"
민상희가 마동주를 덥썩 끌어안았다. 힘에 부치는 노동을 감당하느라 많이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예전만큼 형형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선생님!”
“나야 뭐...... 동지야말로 타국에서 고생 많았소.”
서로의 안부와 그간의 사정을 주고 받았다.
마동주가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당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소련에서는 당이 재건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건해야지요. 그런데 워낙 상황이 어려워서 말이요. 왜놈들이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그렇잖아도 번번이 좌절하고 있소.”
민의 반응 또한 심드렁했다. 마동주는 고애숙의 태도에서도 설핏 느꼈듯이 뭔가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했다.
“다시 시도는 해보겠소만 쉽지 않을 것 같소? 아무튼 시도는 계속하겠소.”
민은 그렇게 막음하고 말았다. 아직 마동주가 건국연맹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민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무장투쟁 계획을 말해 줄까, 하던 마음을 얼른 고쳐먹었다. 마동주가 당성이 강하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1국 1당 원칙에 따라 마동주는 지금 소련공산당의 당원이었고 KGB의 요원이었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태도에 실망하고 있던 차에 우리나라의 분할신탁통치 결정으로 소련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린 민이었다. 소련은 아직도 국민당을 중국의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고, 협력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의 노선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 나라에 합당한 노선이 아니라 교조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작금의 소련이었다. 그래서 건국연맹이 결성될 때, 민은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지만 참여를 결정한 것이었다. 이념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결국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이념의 최고목표가 돼야 되지 않는가. 이 땅의 인민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첫째 이유는 왜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은 독립투쟁에 모든 힘이 집중돼야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지금처럼 한 발씩 양보하고, 절충하고, 합의한다면 자주독립은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혈혁명도 가능할 것 같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제가 접선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움직이는 게 제일 자유로울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내가 알아서 하겠소.”
민의 어투가 다소 결연하다 싶을만큼 강했다. 마동주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민도 자신의 실수를 후회했다.
이제 건국유격단의 인원은 예상했던 대로 급속도로 불어나서 3천 명 가까이 되었다. 구본오의 노력으로 젊은 승려들은 거의 승병이 되었고, 거사 때에는 현재 적을 두고 있는 사찰과 가까운 지역의 유격단・청년단과 같이 작전을 수행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건국유격단에는 여자들도 2백여 명이나 됐다. 연맹에서 지원해주는 자금으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이니 인원이 급격히 불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그때 불어난 인원을 재편성한 남자대원들은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여자대원들이었다. 임종일을 비롯한 유격단 간부들은 회의를 거쳐 여자대원들은 각급 부대에 지원대 형식으로 몇 명씩 배치해 취사 등 보급투쟁에 임하게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곧 지리산에 있던 여자 대원들에게 그 사실은 알려졌다. 그 결정을 알게 된 정순은 한달음에 차광두에게 달려갔다.
“참모장님, 부탁이 있구만요.”
“그 문제요?”
분님이와 같은 부대로 배치해달라는 부탁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차는 알겠다고 했다.
“고것이 아니구만요.”
정순이 당돌하다 싶을 정도로 야무지게 말했다.
“그것이 아니면 뭐요?”
차가 부드럽게 물었다.
“지넌 지원대가 싫구만요. 유격대하게 해주씨요.”
“유격대가 뭐하는 건지 알고나 있소?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는 전부 유격대요.”
너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서 차는 웃었다. 그러나 정순은 갈수록 정색을 했다.
“지원대넌 유격대 뒤치다꺼리나 허고, 유격대넌 왜눔덜허고 맞잽이로 싸우는 곳 아니어라.”
“알면서 유격대하겠단 말이오?”
“야!”
차는 기가 찼다. 이제 정색을 했다.
“보시오. 여성동지들이 할일은 따로 있는 것이오. 이것은 목숨 걸고 전쟁을 하는 거요. 장난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 참으시오.”
“지가 남자들보담 심지게 싸울 자신이 있은게 한 분 믿어보씨요이.”
정순의 어조는 결연했다. 차는 어이가 없어 또 웃었다.
“그리고 현동지, 남자들 밖에 없는 데서 어떻게 지내겠다는 말이오?”
차는 정순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고집이 보통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다.
“여그 남자덜이 워디 있는게라? 다 동지들일 뿐이라고 사령관님께서도 수차 말씀허시덜 않으셨는게라?”
기가 막힐 일이었다. 임종일이 청년들에게 여자대원들에게 사심을 가지지 말도록 한 말을 인용하고 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