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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2. 악마의 음모(1)
4월 초, 미군은 마침내 오키나와를 함락했다. 왜군은 주민들까지 동원해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자살특공대를 미화하는 왜군과는 달리 아군의 생명을 아끼는 미군은 목표 지점을 함포사격으로 완전히 초토화시켜 놓고서야 상륙했다. 오키나와는 지형이 바뀔 정도로 황폐해졌다. 미군은 그보다 앞선 2월 중순부터는 간헐적으로 왜국 본토도 공습하기 시작한 데 이어 급기야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이었다.
대본영으로부터 오키나와 함락 전문을 받은 아베는 엔도를 불러놓고 잔뜩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총감도 현상황에 대해서 잘 알 것이오. 이제 조선도 머지 않아 전장이 될 것 같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 아니겠소. 설사 조선이 전장이 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 대일본제국이 패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내지로 철수를 해야 되지 않겠소. 그 어수선한 틈을 타 조센징놈들이 준동한다면 큰일이오. 그러니까 우리 대일본제국에 저항하고 성전에 반대하는 조센징놈들에게 지금까지와는 확실하게 다른 조치가 있어야 되겠소. 총감이 좋은 방안을 강구해 보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엔도가 머리를 조아렸다.
며칠 후, 엔도는 경무국을 통해 ‘요시찰인에 대한 조치계획’을 175개 경찰서의 서장에게 극비친전으로 하달했다. 소련군 또는 영・미군이 조선으로 진격해 오는 경우,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해 후방으로 이송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신속하게 살(殺)하라, 하는 내용이었다.
광복군 건국유격단은 병력이 4천이 넘으면서 인원 증가속도가 다소 둔화되고 있었다. 각종 징집에 경찰력이 총동원되는 탓에 탈출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건국유격단 사령부에서는 오랜만에 전체 회의가 열렸다. 임종일이 경성을 다녀온 것이었다. 임은 이번에 연맹의 여성위원들 몇을 만났다. 그녀들은 유격단의 여성대원들이 몇 명이며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물어댔다. 그리고 여성들 중에는 왜 간부가 없느냐고 물었다. 할말이 마땅찮았다. 여성차별적인 말을 했다가는 조국해방과 함께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그녀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 몇 명을 선발하는 과정에 있다고 얼버무렸다. 그들은 여성들이 무장투쟁의 주축이 된다면 해방 후 남녀차별을 철폐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냐면서 관심 있게 지켜보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현정순을 비롯한 여성대원들이 낙오하지 않고 열심히 훈련받으면서 남자대원들과 잘 어우러져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정도였다. 개별 대원들 모두에게 일일이 신경 쓸 여가가 없었던 것이다. 능력만 된다면 여성대원들이 간부가 돼도 좋을 일이었다.
“이제 세계전쟁은 막바지에 이른 것 같소. 그것은 우리가 출병할 때도 다 됐다는 말이오. 지금부터 대원동지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독려해야겠소. 그리고 광복군이며 청년단이며 지역위원회와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도록 하시오."
모두들 말은 없었으나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는 기색이었다.
임이 연맹 여성위원들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말인데 여성동지들 중에서도 지휘관들이 있었으면 좋겠소. 그러면 정신대를 피해서 산으로 올 여성들이 보다 많아지지 않을까 싶소. 그리고 여성위원들 말마따나 해방 이후 남녀차별 철폐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소. 그렇다고 해서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될 것이오. 여성동지들 중에 지휘관으로 합당한 사람이 없겠소?”
“한 사람 있기는 하지요.”
1사단 1연대장 이승복의 대답이었다.
“누구요?”
“현정순 동집니다.”
“현정순 동지라...... 내 생각에도 현정순 동지라면 괜찮을 것같소. 남자 못지 않은 완력도 가졌고, 담력도 크고 하니까 말이오.”
“그런데......”
“그런데 뭐요?”
“현동지 밑에서 남자대원들이 너무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말이지요.”
이승복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우선 현정순 동지부터 중대장으로 내정하고 남자대원들에게 추인받는 과정을 거치도록 해보시오.”
회의를 마치고 복귀한 이승복은 정순을 불렀다.
“현동지, 중대장이 되고 싶지 않소?”
“당장에라도 되고 싶지라.”
정순이 퉁명스럽게 받았다. 선머슴같던 성정이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괄괄해진 그녀였다.
“그렇다면 축하하오, 현동지.”
”......”
“현동지가 중대장으로 내정됐소.”
“......내정이라먼?”
“회의에서 정해졌다는말이오.”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들은 정순은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되고 싶던 간부였던가. 간부라고 더 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간부들은 더 힘들었다. 간부들은 똑같은 훈련과 노동을 하고도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남들이 쉬는 시간에 일지도 써야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중대장이 되고 싶었다. 왜놈들을 몰아내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큰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는 남들보다 백배 천배 더 용감하게 싸울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해방이 돼서 집으로 돌아가도 얼마나 자랑스러울 것인가. 어머니가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닐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증인이 돼 줄 분님이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러나 다 된 것은 아니오. 동지들에게 중대장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남았소. 지금부터 생각을 좀 해서 내일 동지들에게 증명을 해보이시오. 자신 있소?”
“야. 자신 있구만이라.”
정순은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고민 하나가 생긴 것이었다. 건국유격단에서 진급을 하는 데는 지휘부의 결정도 있어야 하지만 부하들로부터의 동의도 얻어야 했다. 지금까지 몇 번을 봐 온 바로는 지휘부가 결정한 사람은 모두 진급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휘부에서 정확한 판단을 한 것이었지 자격 미달인데도 대원들이 동의를 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뚜렷하게 내세울 것이 없음을 그녀는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활솜씨도, 격술도, 죽창술도, 돌팔매도 남자대원들보다 출중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대원들 못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솜씨들이 좋다고 꼭 지휘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과 통솔력이 관건이었다. 진급을 하기 위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좋은 작전을 짜서 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많이 배운 사람이라서 가능하지 자신은 어림없는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날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돼서 정순이 중대장이 되면 부하가 될 대원들이 모인 자리에 섰다. 연대장도, 대대장도 지켜보고 있었다.
“나가 지끔부터 신가놈을 어찌크럼 죽였나럴 여러분께 말씸 드리겄소......”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신가를 왜 그렇게 죽였는지를 이야기했다.
“맞소, 현동지의 작전은 훌륭한 것이었소. 현동지의 작전대로 현동지와 김분님 동지의 가족들은 별 고초를 당하지 않은 것이 확인이 되었소.”
연대장 이승복의 유도에 따라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더욱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것덜보다 더 중요헌 것언 나넌 누구보다 왜눔덜을 미워허고, 이땅에서 몰아내기로 작정얼 혔다넌 사실이오. 나가 중대장이 될라고 허는 것도 그 일에 누구보다 앞장을 서고 잪기 땀시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박수소리는 곧 ‘와아!’ 하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이승복이 물었다.
“현동지를 여러분의 중대장으로 인정합니까?”
“예!”
대답이 우렁찼다. 현정순이 중대장이 된 것이었다. 건국유격단 1호 여성 중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