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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아이의 위기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파괴적 성격을 읽고)
게시물ID : phil_175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uybrush
추천 : 0
조회수 : 160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08/23 13:40:17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 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 라고 표현했다.

 

여리디 여리지만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아기새를 보호해주는 껍질에 대항하며, 

맹금류도, 사람도, 뱀도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아기새는 그렇게 꿈을 꾸던 공간에서 

무수한 두드림의 반복과 치솟아오르는 혈압을 이겨내면서 몸을 고꾸라뜨리며 

마침내 알을 깨고 뜨거운 태양이 있는 바깥 세상으로 나온다.

여기서 알 껍질은 순수한 꿈이 잠들어 있는 곳이자 그 꿈이 안전하게 내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아기새가 처음이지만 목숨을 걸어서라도 해야할 도전과 극복의 장벽이기도하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생'은 그렇게 파괴의 과정을 거쳐 무서운 '극'을 또한 파괴하며 시작된다.

 

어른 역시 껍질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벤야민은 "공간" 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공간을  끊임없이 만들고 파괴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그래서 어른은 주체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성이 얕아지거나 잃어버릴때,

어른은 주체적이지 않고 소비적이게 된다.

21세기에 쇼핑 카테고리로써 더욱 도드라져가고 있는 '키덜트'는 

껍질을 반복해서 생산하고 파괴하지 못한채,

금전적인 얇은 껍질 속에서의 소비적인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주체적인 어른은 도처의 위기를 인지하고 살 길을 보고있다.

하지만 키덜트는 다가오는 위기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앙상한 정언적 메세지로 치장한다음 정해진 길을 갈 뿐이다.

근대로의 혁명은 정해진 길울 부수는 개개인의 행동이 뭉쳐진 결과로 볼 때, 중세의 귀족들은 그 정해진 길에서 절대로 벗어나질 못했다.

하지만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렀는데, 자본에 의하여 다시 길은 정해지고 만 것이다. 

 

생의 위협속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이

성장을 도모하지 못하고 키덜트가 되어가는 것은

스스로의 폭력성으로 '정해진 길'을 부수는 것이 아닌,

먼저 세대의 자본이 두껍게 보이는 얇은 껍질로 입혀지는 폭력에 순응하며 - "잘 살아야지" 라는 정언 명령이 이를 수반한다 - 

껍질을 부수어내지 못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어른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욱더 성과를 부추긴다.

이렇게 금전으로 환산된 성과 사회는 소비의 주체가 수작업이 아닌, 금전으로 여흥과 잉여와 취미를 찬양하고 갈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미 규모의 경제를 이루게된 이 타겟을 대상으로

키덜트라는 쇼핑 카데고리로써, 이제 이루지 못했던 미래를 소비하게끔 명령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확산되고 고도화되면서 사회와 정부는 오히려 자본을 동원하여 

자본을 가지려고 하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성과를 강조하며 즉물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사회구성원들은 자본의 한계에 길들여지며 "할 수 있어"를 반복해서 외치며

국가와 사회가 '정해놓은 길' - 성공 이라고들 여기는 공식에 대해, "나는 할 필요도 없고 할 수가 없음이야" 라고 답할수가 없게 되고 있다.

즉, 사회적 껍질이 생산될 때 마다 파괴하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구성원들의 주체인 어른도 그 껍질을 파괴하기가 쉽지 않은데, 다음 어른으로써 자리할 어린이 마저도 어른으로 될 기회를 또한 사회로부터도 뺏기고 있다.

즉, 어린이가 사회적 구성원으로써 사회가 정해놓은 공식에 “순응”만하게 되면,

그들이 구성원이 될 사회 역시 - 위기에 처하게 된다.

현 시대에 언급되는 어른들의 우울증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착취와 자발적 착취에서 기인하고

어린이들의 우울증은 꿈을 쉽게 잃어버리며 자신이 아닌 타자가 - 키덜트 또는 사회가 - 대신 알을 깨어주는 것에서 시작되어 주체성을 가지기에도 힘겹게 되는 지점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가장 큰 위기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에 오게된다.

새로운 가치가 없는 사회는 중세와 같이 무한 반복 생활을 구성원들에게 요구하게 되고

잡혀진 질서에 순응하면 면죄부를 발급해준다.

비싼 고리대금으로 자본은 스스로를 지탱하는 척하지만, 내면은 새로운 껍질을 또 만들 여력또한 잃어가게 된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자했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

숱한 투자거절과 선상반란과 잃어버리게 되는 방위를 딛고서 유럽인은 아메리카로 나아갔다.

길을 만들면서 나가는 자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렇게 열린 아메리카는 소비를 통해서 껍질을 구축했고

1,2차 대전까지의 지역적 일원화에서 전세계적 일원화를 만들고 있다.

즉 그렇게 열린 자본의 지배는 현 시대에 모든 개개인에게 까지 

정해진 길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가 된 주인공은, 

그전까지 회사에 길들여진 노동자였을때는 집에서 어린 동생과 병약한 부모님에게서 큰 대접을 받았으나

그렇게 누구에게서도 혐오를 받거나 조롱을 받거나 관찰대상이 되고나서는 

가족들로부터 지급되던 음식을 먹지 않고 말라죽는 선택을 하게된다.

여기서 황정은 작가의 '양산펴기'에서 생업의 소란에 휩쓸려나온 하루 알바생 청춘은 정부와 노인들을 이겨내고 겨우 성과를 낸 돈으로

피로한 노을을 바라보며, 장어 회식 플랙스나 하자는 동거인에게 줄 정해진 돈으로 저항의 힘을 선택하기보다는 불평만하고 퇴근하고 마는 것이 

오히려 '변신에서의 벌레'와 대조를 이루며 지금의 자본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정해진 길만 강요받던 청소년의 삶이 어떻게 착취당하고 삶이 소실되어가는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반기를 들면 그저 내쫒기는 정해진 삶에서, 주체적 삶을 되찾는 순간이 왔을때 말라가던 청년이 껍질을 깨지 못했던 것이다. 

또 그런체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상실 된 미지의 길을 자본의 힘으로 대신하려 할 것인가.

 

지금은 새로운 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푸코는 말했다.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으려면 정해진 길로써 죽음이 바라보이는, 저항을 할 수 없는 길들여진 노예나 가축이 아닌

산에서도 들에서도 길을 찾는 야수의 용기마저 필요하다. 

새로운 고대인은 그 용기를 장착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소비'력'과 정해진 길에 맞서는 눈이 필요하다. 

즉, 지금 개개인의 미래적 가치를, 어른이 될 기회를 갉아먹는 폭력적인 얇은 껍질을 부술 수 있을 때, 

21세기의 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

이는, 파괴가 개개인의 현실에서 시작되기도 하거니와, 이 현실을 사회가 껍질을 아에 만들어 놓고 요건을 부여해버리기도 하기에

모든 방향에서의 파괴는 필요하다.

 

즉, 모든 방향이란 사회가 '정해놓은 길' 또는 규범, 스펙, 질서 등 

개개인을 위협하는 모든 분야에서의 활동을 제약하는 유리천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회는 유리를 통해 개개인을 즉물적으로, 모든 방향에서 감시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리라는 껍질을 깰 수 있어야만 지금의 자본으로 삶을 재단하는 틀에서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이 유리가 두꺼운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모든 구성원이 이 천장 아래에서 좌절하기도 한다.

(유태자본과 천룡인들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모든 개인의 행동을 감시하는 국가와 계층들이 실제로 있는 듯 하다.)

 

여기서 '용기'와 '사랑'이라는 싱싱함을 가져보자. 

파괴적 성격은 공간을 만드는 본체와 공간을 파괴하는 행위에 주저함이 없다. 

얇은 틀을 깨고 타자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면서 아기새는 성장한다.

끊임없이 생존하고 떨어져가며 능수능란한 사냥꾼이 되어간다. 

사람도 정해진 길에서 수긍을 해가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껍질을 늘려가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다음의 파괴적 행위를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일 수도 있다. 때로는 대를 물려가며 시간을 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행위를 맞이하게 될 때는 걸린 시간만큼 큰 용기가 필요하다.

젊고 쾌활한 싱싱한 행위를 가지려면 본래의 '나이'를 잊을 수 있어야 한다고 벤야민은 말했다. 

물리적인 것 뿐만 아니라, 쌓여온 흔적을 젊음의 빛과 그림자로 단순하게 가차없이 낱낱이 파괴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만들어 왔던 것도, 쌓여온 이성과 지혜로, 뒤로 물러서지 않는 빛을 도구로, 깃발을 치켜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형체를 이미 이룬 것은 그 지성앞에 퇴보된 낡은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굳어진, 타자의 지식과, 타자로 인한 지식 역시, 파괴적 성격이 마주하는 대상이 되게 된다.

기계적인 서커스를 반복하는 것, 기계적인 게임과 같은 것, 어쩌면 업무도 반복적인 매크로 작업일 수도 있다. 

쌓여온 지식은 했던 대로만해도 자리를 지킬 수도 있다. 

하지만 파괴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는 혁신으로 나아갈 수 있고, 공감을 얻으면 새로운 세상을 열 수도 있다.

여기서 또한 변화를 지속하려면 어느정도까지의 파괴성이 필요할지도 개개인은 고민 될 수도 있다. 

정해진 체력이 있을 수도 있고, 생존의 극에서 모든 것을 다 쏟아야 할 수도 있다.

사랑은 여기서 목표점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얼마만큼 나는 이것을 파괴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고, 혼신의 힘을 다 쏟을수도 있다. 

하지만, 삶과 시간은 사랑과 열정의 정도를 측정해주지는 않는다. 

측정하는 순간 관념이라는 껍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파괴적 성격을 가진 삶은 싱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만이 좋아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들, 부족하지만 꿈만 꾸는 행위들.

어쩌면 그 감정이 관념이되고 새로운 껍질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파괴적 성격을 가진다면, 껍질을 창조하는 행위는 너무나 쉽기 때문에, 또한 언제든지 깰 수 있는 것이다.

 

블럭을 쌓듯 하나씩 빛나는 나의 손으로 만들어갈 때, 

사회와 남이 이것을 부숴뜨릴때, 눈물이 날 만큼 사랑스러운 나의 것을 가져보자.

그리고 또한 이것을 파괴도 해보자. 나의 과거의 경험과 미숙한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 

새로운 깨달음과 의지를 만났을 때 오히려 스스로 정해진 길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숙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이 평가한, 사회가 세운 기준에서 부끄러워지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어디에서나 역사가 가꾸어 놓은 길과 극복할 수 없는 것을 순수히 받아들일때,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부끄러움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피로사회의 한병철은 기분좋은 피로를 이야기 했다. 

싱싱한 파괴적 성격 끝에, 새로움을 만나는 그 순간. 

현실을 계속 높은 해상도로 관조하며 자신의 사유를 정해진 길 위에 올려다 놓고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

어쩌면 혼자서 깊은 물 위에 떠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지만, 존재를 느낀 그 순간.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런 갈등 끝에 도착했다.

항해를 시작한 이상, 방향을 몰라도 어디든 가고자하는 용기있는 의지만 있다면, 

항해를 그만두고 바닷속에 스스로 잠길 이유는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들 세계가 먼저 정해놓은 길을 파괴하고 그들의 세계가 발현하게 했던 스스로의 무너짐을 견디고, 또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숱한 어지러움을 극복하고 도착한 것이다.

즉, 용기와 사랑은 극을 이겨낸 생의 과정이자 파괴에서도 삶을 발견하고 나아가게하는 요소이며, 죽음에 대비되는 의미이며, 굳이 자살할 가치를 하찮게 생각할 수 있는 고귀한 싱싱함인 것이다.

 

벤야민의 아기 새는 그렇게 맑은 공기와 자유로운 공간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출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파괴적 성격, 한병철 - 피로사회, 프란츠 카프카 - 변신, 황정은 - 파씨의 입문 - 양산 펴기, 푸코 - 감시와 처벌, 헤르만 헤세 - 수레바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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