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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2. 악마의 음모(6)
하라는 대로 했다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강도새끼들은 밤에 지키고, 이 일은 낮에 하면 될 거 아냐, 이 새끼들아!”
“무슨 소립니까? 밤새도록 강도새끼들을 지키는데 낮에는 자야지요. 우리도 사람인데 자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어제 대의당 결성식에도 아우들 달래서 겨우 데리고 나갔는데요.”
박가가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그렇다고 주눅들 남우현이 아니었다.
“하, 고놈의 강도새끼들이 또 속을 썩이네. 고놈의 새끼들은 왜 그렇게 안 잡히는 거야!”
누구에게랄 것 없는 신경질을 부리며 박가가 야마모도를 일별했다. 그 눈빛은 야마모도를 내려보고 있었다. 너희 경찰놈들이 강도 하나 못 잡으니 정작 중요한 일에 지장을 받지 않느냐, 그런 뜻이었다.
야마모도가 슬며시 박가의 눈길을 피했다.
“내가 책임질 테니 오늘부터 모두 철수해서 내일부터는 이 일에만 전념하라. 알겠나?”
“과장님이 그렇게 하라시면 그렇게 해야지요.”
비슷한 시각, 경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년단의 간부들이 도경찰부나 경찰서에서 같은 지시를 받고 있었다.
경무국에서 돌아온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강성종은 가슴이 철렁했다. 총독부가 획책하는 것은 그냥 예비검속이 아니었다. 올 4월 초에 세운 ‘요시찰인 조치계획’이 극비친전이었음이 말해주듯이 드러내놓고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일이었다. 박가를 내세운 이유였다. 명단을 적은 책자를 얼핏봐도 검거대상자는 수만 명이었다.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 장소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경찰을 두고도 그 일에 박가가 나섰다는 것은 예비검속한 인사들을 모두 살해하겠다는 뜻이었다. 박가의 이력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종자가 박가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이 박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OSS도 오래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잔악한 테러집단이 박가가 왜국에서 조직한 '노동상애회'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연락망을 전부 가동해서 모두 피신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빨리 움직여야겠는데요.”
“김동지, 피신시켜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는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어.”
남우현이 짐짓 여유를 부렸다. 마동주가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오늘 밤에 당장 한 집을 치자는 거지. 그러면 부자들이 경무국에 항의를 하고 난리가 날 것이 아닌가?”
“그럴 듯하군요. 그래도 일단 피신은 시키는 게 좋겠는데요.”
“이 일이 흐지부지될 때까지는 그렇게 해야 안 되겠나.”
그날로 전국에서 재력가들에게 고용됐던 청년단원들은 철수를 했다.
“아니, 왜 이러는 거요?”
“철수하라는 경무국의 지십니다.”
“뭣땜에 이러느냐 말이요?”
“그거야 우리도 모르지요. 경무국에서 철수하라니 우리야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요? 당장이라도 그 흉악한 놈들이 오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오?”
“경무국이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요.”
그들을 고용한 재력가들과 청년단원들이 벌이는 실랑이 아닌 실랑이였다. 청년단원들은 경무국이 책임진다는 말을 힘주어 강조했다. 경무국에 재력가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경무총감을 만나야겠소."
"총감 각하께서는 동경 출장 중이십니다."
"그럼, 경무국장은?"
"총감 각하 수행 중이십니다."
경무국에 들이닥친 여운형을 야마모도가 막아섰다.
"그러면 좋소. 그 흉악한 강도놈들이 저렇게 설치는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러는 거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강도놈들은 일망타진했습니다."
야마모도는 일단 거짓말을 했다.
"언제? 그렇다면 보도자료를 주시오. 우리 신문에 특종으로 올리겠소."
"그건 취조 중이라서 안 됩니다. 수사가 끝나면 발표하겠습니다."
"언제부터 수사가 끝나고 발표를 했소? 그건 됐고.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재산 자기가 지키겠다는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장정들을 못 부리게 하는거요?"
"우리 총독부는 유지들의 재산을 지켜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도놈들이 잡혔으니 헛돈 쓰지 마시고 재산을 아끼시라는 겁니다. 이제 강도놈들은 잡혔으니까요."
거짓말에 살까지 붙이자니 야마모도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총독부의 뜻이 그렇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오. 그리고 강도놈들이 잡혔다니 천만다행이오. 내 그리 보도하도록 이르겠소."
"사장님, 보, 보도는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수사 결과는 나중에 보도하더라도 강도놈들이 잡혔다고 보도를 해줘야 유지들이 안심도 하고 반발도 안 할 것이 아니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 내가 여기 오기를 잘 했구만. 특종도 한 건 하고."
여운형은 야마모도가 거짓말을 해놓고 당황해서 허둥대는 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날 밤에 강도를 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여운형이었다. 만석지기 재산을 독립운동에 거의 다 바쳤다고 해도 아직 천석지기는 되니 큰 도둑이 노릴 만한 집이기도 하고 정말 왜인강도일까 하는 의구심을 없애는데 최적이라고 자청한 것이었다. 부러진 데는 없었으나 굴신을 못하도록 맞고, 5천 원 상당의 금품까지 빼앗겼다. 이 강도사건으로 국내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려던 계획은 첫발도 내딛기 전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재력가들의 거센 항의 앞에서 경무국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뭐를 믿고 경무국이 책임지겠다고 했느냐고 따지고 드니 할말이 없었다. 당장 책임지겠다고 한 경무과장을 파면시키라고 난리였다. 청년단원들은 즉각 재력가들에게 다시 고용됐다. 그러니 예비검속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보잘 것 없었다. 김중에 이어 여운형까지 강도를 당하고 나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강도들이 왜인들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야마모도는 경무국장에게 불려가서 무슨 일처리를 그따위로 하느냐고 욕을 배가 부르게 얻어먹었다.
여운형은 병상에 누워 김중도 자신과 같은 심정이었을 거라 생각하며 실소했다. 스스로 인정사정 보지 말고 패 달라고 독려를 하다시피 했지만 막상 의열대원들이 그렇게 나오니 정말 왜놈강도들이 아닌가 싶기도 했던 것이다.
사색이 돼 병문안을 온 야마모도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사과를 했다.
"아니, 야마모도상! 강도놈들을 잡았다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어떻게 된 거요?"
"그게...... 또 다른 놈들이 강도짓을 하는 모양입니다."
"다들 그놈들이 내지인이라 하더니만 우리집에 온 그놈들도 분명히 내지인들이었소."
"......"
"잡아 놓은 그놈들이 내지인인 것은 맞소?"
"......"
"아니, 취조를 하고 있다면 알 것이 아니오? 잡았다는 그 강도놈들이 내지인들이 맞소, 안 맞소?"
"......예. 맞습니다."
여운형의 조용조용한 다그침에 야마모도는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강도놈들을 잡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노라 자백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야마모도였다.
"그러면 잡은 그놈들을 족치면 이놈들을 잡을 수도 있겠구만. 한번 잘 조사해 보시오."
"예. 알겠습니다."
조센징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야마모도는 오히려 자신이 취조를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빼앗긴 돈과 몸 상한 것은 어떻게 할 거요? 야마모도상이 책임지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니 당장 해결하시오."
"사장님, 그게, 그게......"
"여러 말 필요 없소. 단순하게 돈으로 계산하시오. 강도 당한 돈에, 치료비에, 위자료로 3천 원은 주시오. 큰소리를 쳤을 때는 자신이 있으니 그랬던 것이 아니겠소? 내지인은 하나같이 양심적이라 빈말은 하지 않았을 걸로 믿겠소."
야마모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도들이 원망스러웠다. 그 찢어죽일 강도새끼들은 왜 하필이면 여운형의 집을 털어서 이렇게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최대한 밍기적거리다가 대본영이 항복만 하면 안전하고 발빠르게 내지로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내일이라도 패망할 것이 확실한데도 대본영놈들은 가망도 없는 전쟁을 계속 끌고나가려고 저 발악을 하니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