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을 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논리는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주입될 수도 있으며, 저항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어떤 나라에 소속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 나라에 사는 것을 부정함과 동시에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부끄러움의 관념을 벗기는 사실 쉽지 않다.
이것은 더욱 개인적 삶이 드러나는 공간에서는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어떤 국가에서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만드는 행위는,
제국주의 시절에는 식민지에게, 특히 유럽인들은 자기들끼리도 -
어쩌면 로마의 통치 경계외 영역은 2등 국가라는 분리주의를 모두 가지고 있다가,
(영국은 치열하게 북유럽과 동유럽을 하찮게 여겨왔다. 이것을 일본은 그대로 답습했다.)
나중에는 전 세계적인 등급을 만들어나가는 문화로 확장되어, 20세기 후반까지도,
어쩌면, 아직도, 그러한 우월주의는 하층구조를 계속 재생산하며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해 오고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구세대' 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우월국가 의식에 젖어 있다.
세상이 아무리 권력이 없어지는 듯 해도,
"그래도, 이건 우리가 가져가야해" 하는 그들만의 헤리티지는
존경과 나눔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자본을 하층구조에게만 조금식 열어주며,
대중의 접근은 막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형성된다.
이것은 대중의 의식이 성장하는 것에 공정, 헌신, 나눔, 존경으로 생기는 헤리티지와는 다르다.
권력에 스스로 속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어 왔다.
역사의 주제이자, 시대의 합리성을 이야기하는 정보화 시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적 저항보다
권력에 스스로 속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물론 집단적 공산주의는 이미 한계성이 드러났다.
자본은 공산주의의 한계성을 길게 연장을 해 준것일 뿐,
사람의 탐욕과 이상향이 존재하는 이상, 유물론에서 출발한 모든 경제관념이 사실은 현실과 맞지 않음은, 수많은 석학들에 의해서 논거돠었다.
또한 우리의 자본주의 역시 한계성이 더욱 드러나고 있는데, 구성원들에게 조립 부품과 같은 기능을 요구하고 심지어 신자본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더 끌어다쓰는 쪽으로 발전하여 이미 사람들은 착취의 공허함에 힘겨워하고 있다.
20세기 유토피아에 대한 위대한 약속이었던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이성에 의한 합리적 경제주의는 인류의 생리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 이미 확인되었다.
권력과 자본, 욕심과 안전함은 예속과 파생을 좋아하는데
공적인 안전함에 뭍어 사적인 욕심이 권력에 자리하는 경우, 그리고 자본이 그것을 후원하는 경우,
그 현상이 있는 사회에서는 공정성은 결여되고 기득권화와 파생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조선 총독부 사이토 마코토는 한국 어린이들에게 스스로 부끄러움을 많이 가지게끔하는 교육 시책을 마련하였다.
2등 국민의 개념, 즉 - 국제사회에서 더러운 국민을 교육시킨 것은
국제무대에서 차후에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더라도 조롱을 받게끔 연구되었고,
실제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유럽사회에서 한국은 그저 불쌍하고 무례하고 더러운 나라로 일본 정부에 의해 홍보되었다.
(유학은 철저히 구시대적 낡은 가치관으로 여겨지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실증, 합리, 자본으로 무장된 지배계급 아래에서
정서와 감정, 도덕과 예의만 가지고 있던 사회는 그렇게 무능력할 수 없었다.
멕시코도, 인디언도, 한국인도, "원숭이"와 "1등 인류" 사이의 "2등 인류"가 아니라는 논리를 깨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논리속에서 헤메다 2등 인류는 1등 인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제국주의 시절에는 민족 반역자,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는 일베, 뉴라이트로 드러나며, 등급 상승의 주도 계층을 시도하고 있다.
수평성을 띄고 있는 '다양성'과 '존재'는 등급논리에 복속되지 않는다.
수직성의 등급 논리는 주인과 복종관계의 수직관계로 이해되기 때문에 구조가 명확하고 단순하다.
수평성의 한계성은 한병철의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에서와 같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 될 수 있다.
다양성과 존재 각각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변화를 논의하기에는 속도가 느리고, 모두가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인류의 생존이 달린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러한 성질은 영화 "돈룩업" 에서도 표현되었다.
권력앞에서 나뉘어진 개인은 권력앞에서 대항하기에는 무력해지고, 죽음의 날 앞에서 결국 개별화된 인생은 남은 시간을 소비하는 선택을 하게 됨은
이러한 수평성의 한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서 수직성의 한계 또한 이야기 되었는데,
수직성을 띄고 있는 인류 등급의 최 정점의 기득권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질서가 아닌 세계를 만나면서 결국 파괴를 당하는데,
자신들의 권위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우주에서도 생존하고자 하다가, 자연적 상위 존재인 외계 생물체에게 통째로 잡아 먹히고 만다.
그러나 수평성은 생명과 우주가 존재하는 순간,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국뽕은 또 다른 수직성을 띄고 있다. 네셔널리즘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수히 있었다.
어느 나라건 네셔널리즘을 통해 국가의 생산성을 높이고자했고
국뽕을 시도한 나라는 그들이 가진 아이덴테티가 현실화되는 시기애, 약간의 외부 평가를 근거로 성장한다.
심지어 네셔널리즘은 외부 평가를 가공을 통해 만들어내기도 한다.
수평성을 추구하느냐 수직성을 쫒아가느냐 답을 하나로 정하는 사회는 구성원을 모두 매도시킨다.
그 성질들의 한계성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국뽕은 권력외에서 시작되어서 기존 기득권이 주장했던 2등 한국인을 깨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또한 정보화시대의 예민하고 빠른 권력층들은 이러한 국뽕을 서로 가져가기 위해 소비되는 콘텐츠로 대중을 현혹하고 있는데,
초기의 자생적 글로벌 성과를 나타내는 국뽕 콘텐츠가 아닌
한국에서 50대층 이상이 소비하는 우월주위적 작위적 국뽕콘텐츠가 양산되고 있다.
(공자는 한국사람이다 라는 주장을 좌파 국뽕 채널에서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 또한 원조를 일본 2ch 에서 기획하여 대만에 뿌려, 오히려 역으로 중국에서 반응하는 것으로써 이이제이식 프레임이 진행된 사례가 존재한다.
이렇듯 흔히들 좌파는 국뽕을 좋아한다고하는데, 어쩌면 맞을 수 도 있는 현상이 주류 계층으로의 전복을 꿈꾸는 세력이 사실 국뽕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좌파의 수직 계층 상승 전복 현상은 서양에서는 파괴적 테러리즘으로 좌파의 급진적 성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한국은 좌파가 보수적 성향을 띄고 있고,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 우파가 진보적인 것을 이용하려 하여, 오히려 국뽕은 우파 또한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수직성의 위험성이란 -
인간이 가진 안전성을 이용하면서 타인과 스스로를 통시에 탄압하는 에서 나타난다.
모든 생명 우위에서 파괴를 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인간은
무한 계층 구조에서 실패가 정의되고 하락하면서 인류는 그렇게 터전인 지구에서도 스스로를 내쫒는 위기까지 만들고 있다.
죽기 직전까지도 하층민을 만드는 우를 지금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의 파괴 관점에서 최상위의 계층은 가장 나중에 위기를 맞게되고, 포장된 하부 구조와 하위계층을 탄압하는 것이 와닿지 않다가ㅡ
종국에 스스로가 탄압 될 때 가서야 자기 존재의 위험성을 알게 된다.
아마 철학적으로는 수직적 인류의 종말은 거기서 결정이 났다고 할 수 있다.
계층을 만들고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는
인터넷에서 더욱 크게 드러나는데 익명과 대중성으로 더욱 정서적 계급이 쉽게 확정 지어진다.
약자와 피해자가 회복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무한성을 가진 인터넷 가상공간에서는 영원한 약자와 피해자를 만들며 영향력을 키워나가려한다.
수직성의 위험을 가진 정서는 가상공간의 안전한 놀이터에서 시간적 한계를 쉽게 또한 이기고,
단순하고 가벼운 정보가 있는 공간에서의 이 수직성은 파급력 또한 쉽게 가진다.
일베는 그렇게 단시간에 파생하였고,
국뽕은 또한 소비되는 층을 딛고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실제 현실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현실은 사실 그렇게 경직화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수직적인 구조는 그것을 좋아하는 기득권의 후원에 있다.
현실을 조장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후원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고 개별적인 힘만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약하다.
인터넷의 공격이 현실에서 피해로 다가오기가 쉬워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약자와 피해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곳에서
조직된 공격성은, 하부 계층의 반복되는 상처와 구속을 통해 더욱 계층성을 공고히해간다. (영화 설국열차)
그리고 21세기 정보 시대의 현실 기득권은 이것을 쉽고 빠르게 활용하기에 더욱이 교묘하다.
대중은 그렇게 심리적으로 상처를 쉽게 얻고, 얕은 감정에서의 패배의식을 또한 쉽게 얻어가게되고, 스스로를 사회에서 소비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보 시대의 영원한 하층 인류는 그렇게 다시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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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계층성이 뚜렷한 정권이 들어설 때 마다 문화인 블랙리스트가 작성된다.
기득권 계층을 조롱하는 것은 그들의 수직적 정서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와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된 우월주위에 편승하고자하는 기득권들의 성격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히 패배자는 패배자여야 하는 계층위에서 자라난 논리에서 글로벌 최고는 용납될 수 없기에
그래도 아시아에서는 여러 노벨상을 받아온 일본이 최고다는 논리와 함께
'소년이 온다'의 작품성은 그것보다 못하다로 연결 될 것이 뻔하다.
노벨상을 수여하는 기관을 동시에 의심하는 위기론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아시아란 표현도 할 필요 없고, 각종 상들의 권위성을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이,
작품 그 자체만으로 사회와 개인에게 시사만 하면 되지만, 이것을 이용하는 세력에게는 하나의 논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각종 상들의 권위의 정당성은 필요하다.
이렇게 사람들이 개념적으로 만들어내는 '상'도 또한 사회에서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정당화"가 구축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권력으로 모든 인류의 지성은 흡수 또는 소멸되기 때문이다.
출처 | 미셀 푸코 - 주체와 권력, 에리히 프롬 - 소유냐 삶이냐, 한강 노벨상 수상 |
출처 보완 |
한병철 - 정보의 지배,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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