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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대구구장 직관기
게시물ID : sports_427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인생을즐
추천 : 4
조회수 : 57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04/17 02:13:27
모처럼 직관가는 날인데 영원한 푸른피 에이스 배영수 등판일인줄 알고 들떴지만 의외로 귀요미 정인욱이 선발이더군요... 정인욱은 아직 경험 많이 쌓아야 할 위치의 녀석인데다 전날 필승계투진도 모두 소진한 상태라 오늘 이기기 쉽잖겠구나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기대에 들떠 시민운동장을 찾았죠.

야구 붐을 증명하듯 엄청난 인파가 모였습니다... 예매한 표 찾는 줄만도 엄청 길고, 입장하는데만도 한참이 걸려서 경기 시작한 뒤에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정도였죠. 만원관중이라더군요.

정인욱이 역시나 초반 두산의 강타선을 버티지 못하고 2실점을 했지만 이어진 위기를 신명철-김상수 키스톤 콤비의 그림같은 콤비 병살 유도로 잘 막아냈고, 최잉여 최잉여 놀리며 낄낄대던 최형우가 시즌 1호포를 동점 2점홈런으로 장식하며 분위기가 한껏 살아났습니다. 두산 수비 시작하기 전 마다 김현수가 3루쪽 볼보이랑 장난치며 팬서비스 하는거 구경하고 웃고, 종박의 턱걸이 쩍번포를 킁킁신이 플라이 처리한듯한 태연한 제스쳐를 취한거에 속아서 멋모르고 박수치다 무안해하고... 경기는 비록 1점차로 지고 있었지만 간만에 정말 재밌게 보고 있었더랬죠. 양팀 모두 호수비도 많이 나오고 진기한 장면도 많이 나오면서 역시 싸대기동맹 매치 답게 승패를 떠나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경기였습니다.

비록 날씨가 대구의 4월스럽지 않게 춥고 바람까지 많이 불었는데다, 전날까지 대구 기온이 상당히 높았었기에 관람 온 팬들 대다수가 가벼운 차림이어서 어둑해진 뒤로는 다들 벌벌 떨면서 앉아있긴 했어도 모처럼의 만원관중에 경기도 재미지게 흘러갔기에 자리를 지키며 응원을 즐길수 있었습니다.

8회초 두산 공격에서 그 어이없는 정전사태가 났을때도 사실 그때까진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너무나도 극적인 순간, 정수빈의 기습번트 공이 기막힌 코스로 굴러가는 바람에 1루가 빈 상태에서 커버를 들어가는 투수 권혁과 타자 정수빈이 동시에 1루로 쇄도하는 순간이었죠(타이밍상으로는 정수빈의 세이프가 확실했지만 두 선수가 각각 마운드와 홈플레이트 방향에서 1루로 달려가는 흥미진진한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서 둘이 1루에 거의 다가선 찰나에 거짓말처럼 경기장 내 모든 불이 꺼져버린 겁니다.

한 1초쯤 정적이 흐르더니 갑자기 다들 함성을 지르고 웃고 난리가 났더랬죠. 아쉬워하는 두산 팬들도 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삼성 팬들도 있고, 어이없는 사태에 그냥 폭소를 터뜨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전 3루 홈팀 응원석에 앉아 있었는데, 약속이나 한듯이 건너편 1루쪽 응원석에서 핸드폰 플래시 라이트를 켜서 흔드는 손길들이 보이더군요. 이쪽에서도 호응하는 사람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어두컴컴한 경기장 관중석 여기저기서 밝은 불빛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깔깔거리며 그 상황을 즐겼습니다.

사진도 찍고 그냥 의미없는 함성도 지르고(이만수를 외치기도 하고 양준혁을 외치기도 하고...) 우르르 뭉쳐서 큰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어쨌든 경기를 즐기던 분위기 그대로 이어서 그닥 험악하거나 나쁜 분위기로 흐르지는 않았죠.

그렇게 한참을 불이 꺼진채로 시간이 흐르더니 겨우 조명탑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더군요. 이때까지도 팬들 분위기는 크게 나쁘진 않았습니다. 조명탑 하나씩 켜질때마다 환호성 지르다가 다시 꺼져버리면 다같이 웃고 뭐 그런 분위기였죠...

근데 문제는 조명탑이 어느정도 켜진 뒤에도 전광판에 "정전사태로 경기가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딸랑 띄워놓고 별다른 상황설명을 하지 않은채 또다시 수십분을 흘려보내면서 시작됐죠.

이미 몸도 식고 날은 엄청 추워져 다들 추위에 떨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심판진이 어수선하게 그라운드 위를 돌아다니기만 하더군요. 중계방송으로 들어보고서야 경기 속행 여부를 판단하지 못하고 고민중이라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승패가 걸려있는 페넌트레이스 경기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중단시키기도 속행시키기도 판단이 결코 쉽지 않은 사태임은 잘 알고 있지만, 최소한 주말저녁 경기장을 가득 채우며 찾아와준 팬들이 수십분씩이나 추위와 싸워가며 이 '이해못할 사태'를 참고 기다려줬으면 지금이 어떤 상황이고 어떠한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그 결정에 따라 추후 진행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사전 설명은 기본중의 기본 예의가 아니었을까요?

까짓거 팬들 추위에 떨든 말든, 기다리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자기들만의 회의가 제일 중요할 거 같으면 팬 다 내버리고 무관중 경기나 하던지 말이죠.

'뭔 야구 규약 몇조 몇항에 따라 경기가 중단되었는데 8회까지 진행이 된 상태니 환불할 의무가 없다'는 소리따위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최소한 오늘 경기를 찾아주신 여러분에게 이 경기의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와 결말부를 보여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사죄드리며 이후의 경기 속행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날씨가 추운데 오래 기다리시게 하기 죄송하기에 미리 말씀드린다...정도의 사전 양해조차 그리 힘든가요? 수천명의 팬들은 영문도 모른채 추위에 떨고 있는데 심판들은 미적미적 걸어다니면서 각 조명탑 밝기 측정한답시고 그라운드 끝에서 끝까지 산책을 즐기시고, 다시 양 팀 의견을 조율한답시고 양쪽 덕아웃 사이를 슬렁슬렁 걸어서 왕복을 몇차례 하시고, 거 참 느긋하기도 하시더군요.

기상악화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콜드게임 선언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해서 경기의 결말을 못 본 관중들한테 '8회까지 보셨으니 환불 못받습니다'라는 똥배짱도 웃깁니다. 극장에서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 1시간 50여분 보다가 마지막 10분 결말부 놔두고 영사기가 꺼졌는데, 영화 거의 다 보셨는데 환불 못해드립니다 한다면 수긍할 사람 몇이나 될까요? 거듭 말하지만 비와서 경기 중단되거나 지진이라도 난거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워낙에 빼어난 경기장 시설 덕에 '정전'으로 경기가 중단된건데도 말이죠. 왜, 올해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아예 이래보시죠? "경기가 아직 8회이지만 주심이 급설사가 난 관계로 이만 마칩니다, 8회까지 보셨으니 볼만큼 보신거 아닌가요? 웬 환불ㅋ?"

내 돈 내고 보러 온 경기 막바지에서 어이없는 사고로 잘렸는데, 어떠한 설명도 보상도 없이 시간만 끌고 있으면 관중들은 당연히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죠. 경기가 이대로 콜드게임처리 되는 것이든, 한 두어시간 시간 끌다가 다시 이어지는 것이든, 내일 이시간에 이어서 하니까 그때 와서 마저 보시라는 것이든 설명이 없으면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도 그냥 기다리고 있지도 못하는 난감함에 빠집니다. 게다가 날씨가 이 계절의 대구 시민들이 기껏해야 챙겨왔을 법한 봄 잠바, 가디건 따위로는 어림없을 정도로 괴랄하게 추웠는데 말이죠.

결국 기분좋게 기다려주던 팬들이 조금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고, 끝까지 남아있던 열성팬들조차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할때까지도 전광판의 그 건방진 양해 바란다는 문구와 '정전이라 죄송하다'는 앵무새같은 방송 몇번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설명도 해명도 없었습니다. 야구 별로 관심 없었지만 재미있을거 같다고 따라왔던 제 친구들이 추위와 기다림에 짜증이 나서 먼저 자리를 비우고, 저도 화가 제대로 나 버렸죠... 결국 가라든지 말라든지 말부터 하라고, 팬들이 무슨 봉으로 보이냐고 고함치고 여기저기 불만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니까 급한 목소리로 방송을 하더군요. '오늘 경기는 프로야구 규약 몇조 몇항에 의거 서스팬디드 처리됐으니 내일 3시에 마저 치릅니다. 귀가하세요'......

표 가지고 내일 오세요 랬다가, 시즌 중 홈경기 아무때나 오시면 일반석으로 바꿔준다고 했다가, 결국 성난 팬들이 매표소 앞에 모여들어 환불 환불 외치고 항의한 뒤에서야 환불해드리겠다고 말을 바꾸더군요... 즐거운 마음으로 찾았던 주말 야구장이지만, 친구네 차를 타고 돌아나오며 등뒤로 멀어져가는 시민운동장의 모습은 분노한 팬들의 고성과 항의, 몸싸움으로 북적북적한 모습이었습니다.

KBO님들아...600만 관중요? 김상수 홈런치고 이대호 홈스틸하는 소리 하고 있네요... 제 옆자리에 있던 가족 팬들, 애기 아빠 엄마 두분이 경기 내내 열심히 응원하고 계시다가 정전사태 이후 결국 추위에 떠는 애기 안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자리 뜨시더군요... 아빠가 아들 둘 데리고 온 듯한 뒷자리 삼부자 팬들은 심판들이 그라운드 산책놀이 하고 있는 동안 애들 아버지가 애들에게 '나갈래?' 물어보시는데 겨우 중학생이나 됐음직한 애들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싫다고 하더군요. 추위에 덜덜 떨고 앉아있으면서도 말이죠. 제 눈엔 이런 모습들이 눈에 확확 밟히는데, KBO님들 눈에는 이런거 안 보이셨나보네요. 600만은 개뿔, 한동안 대구 구장에서 관중 동원 기대하기는 접으시는게 좋을겝니다. 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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