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허점도 있다. 자기계발서를 읽지 말라는 말도 한다. 정신의 마취제라는 비판이 가장 흔한 말일 것이다. 즉, 책을 읽으면서 자기 스스로를 마취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자. 자기개발서가 왜 비판을 받아야 할까?
자기계발서라는 텍스트(text)는 콘텍스트(context)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콘텍스트다. 한 가지 작품에서 사회상이 반영되기도 하고 함축적인 의미가 많이 녹여져 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책이 다시 필요하다. 그래서 고전을 읽으면서 불친절하다는 느낌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학문의 입문서를 읽는다고 쳐도 한 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뭔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몇 권의 지식을 더해야 비로소 실마리가 비치는 것 같다.
자기계발서의 시각은 세상을 보게 만드는 틀을 제공한다. 현재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만 가지고 충분히 세상이 설명이 될 수 있게 만드는 '환원적인 독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개발서다. 나만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자기개발서 읽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다.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고 잘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자기만 변하면 된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도 변하게 되는 것도 소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시각이 제한된다는 것에 있다.
자기계발서가 제공하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어떨까?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발전 저해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자기개발서의 저자들은 자기방식을 제안하는 것뿐이다. 세상을 이렇게 볼 수도 있다고. 그리고 대중은 그 쉬운 설명을 받아들인다. 그게 옳은 거라는 인식이 생겨날 때가 온다. 그렇게 자기 생각이 분명하다고 믿게 될 때쯤 되면 시각은 굳어진다. 세상을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처럼
미움받을 용기, 좋은 책이다. 나쁘지 않다. 쉽고 재미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책의 프레임은 시각을 제한시킨다는 점이다. 예전에 이 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좋아하는 책,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물론 난 아들러가 잘못했다고 말한 건 아니다. 아들러에 대해서 비판하려고 하는 글도 아니었다. 다만 책에서 용기 있는 말들은 '사람'을 향하기보다는 '프로이트'를 향한 말들이었다.
아들러가 트라우마를 부정했다는 것도 받아들여보자. 즉, 마음의 상처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용기가 없기 때문에 못 떠올리는 거지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받아들여보자. 그 이후 책 속의 '철학자'는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오해가 좀 심하다. 프로이트도 정신 결정론을 이야기했다. 아들러도 배웠을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인간의 삶이 '연역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연역적'이지 않았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결정론이란 정신은 자연보다 더 엄격하게 그 원인을 따진다는 말이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들러가 이런 점을 모를 리가 없다. 이 말은 저자가 프로이트를 모르던지 '철학자'가 정신분석을 무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신분석의 모토는 '자유'에 있다. 그런데 '자유'라고 할 때, 긍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의 불행도 '자유'아래서 선택할 수 있다. 책이 그런 것 까진 설명하진 않았다. 마치 자유가 행복인양 설명을 한다.
이 책이 드러내 보이는 태도중 불쾌한 내용도 있다. 바로 적면 공포증을 '고쳐준다'는 점이다. 상담가의 능력으로 너의 정신질환을 고쳐주겠다. 이 태도는 '환상'에 기반한다. 병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고치겠다는 의사 환상의 문제다. 이 점은 곤란하다. 적면 공포, 분석과정에 들어온 내담자는 그 의미를 스스로 찾고 동시에 증상에서 벗어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내담자가 힘이 있고 증상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을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나타나게 되는 갈등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신경증의 발생은 'What?' 보다는 "How"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개인 내면에 있는 갈등의 유무보다 그 해결 방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부모에 대한 갈등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위로의 차원이다. 그러나 그 갈등을 어떤 식으로 해소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본격적인 탐구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가 시달리는 우울증의 원인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What의 시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How는 무시된다. 원인은 그래서 밝혀지지 않는다.
'자해'의 문제 역시도 책 속에서는 다루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프로이트식의 설명이 '부모가 아이를 잘못 키워서'이다. 그리고 아들러의 목적론은 이 내용이 '드러내지 않은 복수심'이라는 말이다. 이건 단순함이 도가 지나쳤다. 대중이 그렇게 바라보길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이가 자해를 하는 게 부모가 잘못 키워서 그러니까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이다.
아들러의 말처럼 '자해'가 복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자해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어디서 나올까? 복수에 불타는 자해라면 스트레스가 더 쌓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에게 복수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복수를 하는 거니까.
프로이트의 관점은 다르다. 자해하는 아이는 주변 사람들을 너무 소중히 여기는 사랑 많은 사람이다.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한다. 타협책으로 스스로에게 그 공격성의 방향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관점이다. 그리고 이런 '기제'는 신경증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연구했다. 여기서 작가에게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프로이트를 이야기하지만 '프로이트'를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 근거는 프로이트의 저서에도 나와있고 필자가 직접 연구한 내용도 있다.
책은, 신경증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 아닐까?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되는 것이라면 치료는 빠르고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점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개인적인 갈등에 애써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단순히 '용기 없는' 사람들이 될 수 있으니까.
아들러를 전면에 내세운 '용기 마케팅'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그 굉장한 용기는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도 같이 부추기고 있었다. 끝으로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정신과 진단명 중에 '사회 공포증'이 있다. 그러나 이 진단명은 마케팅의 부산물이었다. 약을 더 효과적으로 팔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사회 공포증이라는 말 아래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전혀 다른 증상이었을 것이다.
삶은 단순하게 살 수 있다. 그것은 선택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이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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