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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배우와 포르노 배우
게시물ID : phil_175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uybrush
추천 : 3
조회수 : 181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24/09/20 15:22:20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사연과 전개가 있는 이야기가 아닌, 바로 눈에 보이고, 상상할 필요도 없는 행위만 있는 포르노 같은 직접적인 정보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감정과 서사는 배제되고 직접적인 콘텐츠, 직접적인 행위 자체만 소비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에로스가 있는 곳에서는 성적인 행위도 아름다울 수 있으나

성적인 행위만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아름다운지, 좋은지, 나쁜지,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다.

도파민과 마약은 그 절정에서 소비되고 있다.

그곳에는 분간없는 소비집단만 필요하기 때문에, 단가와 경제규모만이 존재하지, 개개인의 아이덴티티는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포르노는 산업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차지하고 서사 중심의 에로스가 깃든 연극은 소멸하고 있다.

이미 도파민의 극으로 가버린 에로스의 어떤 순간은, 더 이상 에로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즉, 배우는 사라지고 행위만 남아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에로배우는 필요 없고, AI는 유쾌마운틴만 남았다고 한다. 글구 오유의 그 배우님은 철자가 다르고  AI가 할 수 없는 유머를 하시니깐.. :-) )

 

콘텐츠 역시 동일하다.

짧은 숏츠 위에서는 서사는 커녕 맥락이 없고 그냥 반복적인 행위만이 정보처럼 보여지고 있다. 

이에 반해, 가령 맛집을 우리가 떠올린다면,

어느 골목에 숨어있는 그 집은, 어제 저녁부터 삶고 고아서, 주인이 정확한 시간에 재료를 넣는다구 타이머를 맞춘채 피곤에 졸다가 깨서 재료를 넣더라

그때 넣은 재료는 가을 서리를 3번 맞아야만 진한 맛이 나온다더라. 근데 그 재료는 주인이 몇 년전 기구했을때 나타난 거리의 부랑자가 구해준 재료인데, 가게 주인은 그 재료의 맛을 보고 부랑자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 재배하기를 권유해서 그 땅에서 나온것이라더라

의 서사보다, 

지도위에 음식 사진 콘텐츠는 가게 위치, 별점, 맛, 기타 정보 등으로 맛집이 소비되고 마는 시대인 것이다. 

빠르게 판단함으로써 거르고, 만족하고 말고의 정보 반복 시대가 온 것이다.

즉, 정보는 포르노처럼 만족의 대상인 것이지, 관계 속에서 쓰여지는 흐름이 있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반복해서 좋아요만 남기는 ‘만족만 남은 곳’에서는 서사를 삼키고 관계를 삼켜서 휘발되고 기억될 필요가 없는 ‘비교 만족의 소비‘만 남기게 된다.

휘발되는 세계에서는 소유가 아닌 소비가 자리잡고

만족과 소비의 휘발은 텅빈 감각을 일으키며 허영과 허무가 커져간다.

이러한 중독된 도파민의 세계의 종극에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허무함은 소비에서 자라난다.'

 

여기서 '배우'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본다.

정보의 가치에 더욱 노출되고자 하는 광고주들의 요구로 반복되는 연기를 하는 콘텐츠의 배우들이 있다면

정보의 요구에 참여하는 배우들은 포르노 배우일까? 

 

포르노 배우가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다.

즉, 주체냐, 돈이나 어떤 것에 요구된 서커스 단의 기계적인 연기자일 뿐이냐 하는 것이다. 

챌린지로 대중화되는 콘텐츠, 예를들어, 

짧은 후크 멜로디의 노래가 혜성처럼 이목을 집중시키다 소비되고, 춤동작은 더 이상의 발레가 아닌 가볍고 누구나 참여 가능한 형태가 된다.

사람들은 오히려 쉬운 몸짓으로 누구나 다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인 참여를 원한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포르노 같은 짧은 정보에 모두 경도된 것일까?

그동안 어렵고 특별하고 무거웠기 때문에 참여못했던 것은 아닐까?

콘텐츠의 성질 또한 소비성과 주체성 양면으로 구분되어 생각할 수 있다. 

가령, 프랑스대혁명 시대의 작곡가 고세크는 궁정 음악가였으나, 혁명의 바람이 불던 그 때, 궁정 문화를 파괴할 오페라를 써버린다. 

민중들 1000명이 참여하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무대에 올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본에 의해 쉽게 소비되는 작품이 아니었다. 자발적인 작곡과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작품이었다.

기획하는 쪽에서 배우들의 주체성을 버리고 1000명을 단순 소비집단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공감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1000명이 올라가는 무대는 혁명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단순 작곡 - 합창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아닌, 

현장감과 대중의 요구의 수용을 작곡가가 해 내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즉, 서사와 에로스가 없는 자본의 소비 대상으로써 작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한 기획과 그 배경, 그 서사는 소비적 콘텐츠라 할 수 없다.

챌린지 자체가 나쁘다, 좋다로 말하면 모두가 창작자가 되거나 모두가 창작을 하지 않게되는 사회가 되어버린다.

단순한 동작으로써의 배우는 생명력이 짧을 것인가? 아니면 오래도록 사랑받을 것인가?

이것은 참여하는 배우 자신들의 주체성에 그 주도권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자발적인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면, 어쩌면 콘텐츠의 무게감과는 사실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배우는 글이나 노래로써, 또는 상상하는, 또는 있었던 것을

현실에 나타내는 존재이다. 

즉 시뮬레이션을 현재에 나타나게하는 역할을 띄고 있다. 그것이 재현이 되어도 배우이며, 창작을해서 그려내는 것도 또한 배우이다. 

프로 배우는 이것을 자본의 가치와 교환될 수 있게 연기하며, 상업적인 어떠한 것, 또는 정치적인 어떠한 것과도 교환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가 붙는다고 해서 기계가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플롯, 투자된 자본, 정해진 기획에서만 연기하는 배우는 생명력이 없다. 

능력있는 감독은 뻔한 연출력에 고개를 젓고 새로운 연기를 요구한다. 

프로 배우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자신만의 연기로 무대를 다시 만든다.

즉, 주체적인 존재로써 자신을 현실에 드러내는 쪽과, 

금전이나 어떤 상황을 대변하는 존재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이다.

소비되는 배우는 기계적인 허무함에 휩싸이고 결국 빠른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주체적인 배우는 감독이나 시나리오의 지시에 자신만의 연기로 작품의 위기를 극복한다.

작품은 관객이 뻔한 예측이 가능할때 위기를 맞이하는데, 주체적인 배우는 연기나 새로운 대사나 오히려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포르노를 가치판단으로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짧은 정보는 소비적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크게 뭉쳐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배우로써의 힘은 여기서 나타난다. 

서사 없는 행위만 반복하는 배우는 생명력이 짧다. 

찬사의 시간이 긴 배우는 여러 장르에 도전하고 그것을 이겨낸다. 

배우 자신의 도전이라는 서사도 있으면서, 단순 행위만의 장르에서 이탈한 주체적인 시각을 가질때ㅡ 소비가 아닌 공감을 얻게되는 것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벤야민은 기계장치로 인해 복제 가능한 작품들의 아우라의 붕괴를 이야기 했으나

글을 적는 나는 작가/감독/배우의 자각을 통해 오히려 아우라는, 대중과 작가의 관계를 통해서 숱한 교감 또는 소통이 일어나게 된다면, 

정해진 시뮬레이션에 대비해 살아 있을 수 있다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고세크의 예시 또한 증거이다.) 

서사는 그래서 포르노가 될 수 없고, 프로 배우는 에로스적이며, 소비적 포르노에서 이탈하고자 한다. 

 

 

반복되는 루틴은 변화되는 상황에서 위기를 맞이한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트럼프에 대항하고 있고, 이는 금전적인 가치에서 상황 판단을 이야기하는 반대편의 헐리웃 배우와도 비견된다. 

24년 미국 대선판은 초반부터 예측이 힘든 상황이다. 

누가봐도 뻔한 플롯이었으나 중요한 사건들로 인해 배우들이 바뀌고 예측 힘든 시나리오들이 나오고 있다. 

즉, 기계적인 흐름에서 변화가 생기고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즐기고 있다.   

트럼프 역시 과거에 느슨한 대선판에 예측 불가능한 선동을 통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수법이 읽혔고 예상치못한 반격에 그 자신만의 변화가 오히려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형국이다.

이렇듯 단순 소비역시 기계적인 흐름으로 파악되는 순간, '기계의 위기' 또한 가능한 것이다.

 

휘발되지 않는 고전속에는 오랫동안 회자되는 주인공이 있다. 

가령 삼국지라고 할때, 정해진 영토와 관작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그 변화 무쌍한 흐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정해진 것에 도전했던 사람들만이 결국 주인공이 되었다. 

기계적인 프로배우가 아닌, 생명력 있는 프로 배우들은 이것을 재현해 낼때, 정해진 고전이야기에도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연출자 역시 그 긴장을 위해 또 수정하고 수정한다. 

명작은 그렇게 탄생을 하게되며, 망작은 긴장없는 연기만 가득하다. 

관객들은 뻔한 베트맨 스토리인데 뭘 또 봐... 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새로운 해석과 배우, 그리고 긴장감 형성에 성공했고, 지금은 조커까지 새롭게 해석되어 나오고 있다.

에로스의 종말은 그런 고뇌에서 다시 부활을 시도할 수 있다.

느슨한 판은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위기이자 소비의 대상이 되어져버리고,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더 우월한 부활의 시도 - 소비에 대비되는 가치와 노력의 숱한 시도를 "교활함"이라고까지 장 보드리야르는 표현하였다-

가 필요하다.    

 

 

P.S 강단에서의 교수와 교사는 정해진 콘텐츠와 AI에 자리를 내주는 순간, 프로세스만 설명하는 강사로 전락하며, 존재의 위기를 맞이한다.

교육 현장에서 단순 정보 전달은 엄격히 숙고되어야 한다.

출처 임용한의 삼국지,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 서사의 위기,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로르도트리슈의 역사를 만든 음악가들, 에리히 프롬의 존재와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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