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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 축구 협회와 기득권의 지배구조
게시물ID : phil_175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uybr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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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30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09/25 21:56:00

1. 개념들 

유럽의 모든 선수들이 약물 도핑에 걸렸어도

미국의 랜스암스트롱 싸이클리스트는 약물 도핑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오프라윈프리쇼에서 약물 도핑을 스스로가 고백함으로써 

논란은 종결되고 그가 세운 모든 스포츠 기록은 공정성이 생명인 국제 사이클 연맹으로부터 삭제되었다.

 

스포츠는 눈으로 판단이 되는, 

즉 사람에 의한 충분한 판단이 가능해 왔기 때문에 - 2차적으로 그것이 몇천분의 1초라도 비디오의 도움을 사람을 통해 판단 되더라도 -

모든 분야에서 사람의 노력에 의한 공정한 승부가 가능한 장르였다.

약물 도핑 (혹은 기술 도핑)은 눈으로 판단할 수 없게 신체 또는 운동기구 안으로 사람의 기본적 신체조건을 월등히 뛰어넘는 외부적 도움을 통해 기록을 성취하게 함으로써, 

기술적인, 자본적인 승부가 관건이 되는 것으로,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기술과 자본의 경쟁으로 뒤집히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그 자체로 시험대에 오르는 ‘존재’가 아닌 자본과 기술의 ‘도구’로 전락하는 사건으로써

굳이 분과를 나누자면 인간의 조종도 필요없는 로봇만의 스포츠와 동일시 될 수 있지, 스포츠 본연의 기본 장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인간 본질의 경쟁은 자본과 기술에 잠식되는 순간 존재의 의미와 위치가 퇴색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이 발달한 곳에서 스포츠 데이터 사이언스는 발달하게 되었고

자본주의가 발달된 국가가 아닌 선수도 글로벌 기업의 후원과 연구로 

마라톤 역시 실험적인 환경에서 42,195km를 2시간의 벽을 뚫은 사례가 있다. 

파리 올림픽에서 자본력이 약한 국가의 양궁선수가 기록이 나빠도 도전하는 장면이

체계적이고 데이터화된 국가의 양궁 1위 국가의 경기와는 다른 울림이 있는 이유는

사람들은 데이터보다 인간의 노력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본이 지속적으로 투여되면, 결국 이 세계의 흐름과 결말은 인조적인 구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이는 인간의 노력과 위배되고 사람들은 여기서 열정과 흥미를 느끼기가 불공정성이라는 불평등과 함께 어려워지게 된다.

중국 축구가 개선이 안되는 이유는 역시, 자본의 논리로 인조적인 성장을 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에 의한 스포츠가 쇠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중국 유저들이 잠식하는 게임의 선 검증 사례들 - 부정적인 게임을 누구나 해도, 사이버상의 자본에 의한 반칙이 통용되는 곳에서는 

인간적인 대결이라 판단이 안되기에 사람들은 떠나고 

AI와 해킹 봇들만 남은 사건은 여러 온라인 게임을 보더라도 충분히 납득된다.

 

그렇게 공정한 경쟁을 통해 짜릿함과 숭고함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을 가진 기득권이 되고 싶어할까?

 

중세 영주들은 같은 민족의 농노들이 대화를 신청해도, 반란이 일어나도, 

결국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상위 지배층인, 예를 들어 로마로부터 파견된 행정관 또는 왕의 대리인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하였다.

일제시대의 민족 반역자들 역시 독립의 가난을 뒤로하고 기득권 자리로 옮겨간 사람들, 

7-80년-90년대 초반까지도 민중 운동가로 살았더라도 아에 위치를 바꾸는 기득권의 사람들 역시 권력 구조에서 상위로 올라가려한다.

심지어 스포츠에서도 스포츠의 본질인 선수간의 인간적인 경쟁과는 거리가 있는 협회라는 권력구조가 있다.

인간의 경쟁에 필수적인 장비- 새로운 신발을 요구하는 발과 다리의 부상을 안고 있는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선수의 신발조차 생각하지 않는 협회라는 조직으로 올라가 그들만의 생리 구조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자본에 미쳐있는 도취된 사회,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구조를 낱낱히 파헤쳤다.

에리히 프롬과 헉슬리는 삶이냐 존재냐 그리고 멋진 신세계에서 자본이 낳은 기계적인 사회에서의 권력구조를 또한 경고했다.)

 

권력은 대리 구조를 만듦으로써 힘을 얻는다. 

여기서 대리 구조란 사람에게 필요한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를 대신 맡김으로써 생기는 구조를 뜻하는데, 

이것은 개인 적인 생산-소비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산업 구조화가 되면서 더욱 커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산업은 생산 또는 소비하는 사람들이 생겨남으로써 자본이 축적된다. 

권력은 산업위에서 춤을 추며, 생산자-소비자들을 대상으로 구조화를 진행했다. 

영구히 소비되는 산업일수록 권력은 더욱 공고해지고, 그 수익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점점 기득권의 견고함은 강해진다.

생산-소비 사람들이 모여서 자생적인 단체를 만들수도 있고, 좋아하는 어떤 것을 주제로 모이는 사람들에게 외부에서의 후원을 함으로써 단체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순수한 생산자과 소비자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식물과 달리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소비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노동을 통해서 생산성을 띄게 되는데, 유한한 삶의 시간으로 인해

1치적인 에너지 생산-소비에만 몰두 할 수 없을 뿐더라 다양함을 구축하고 즐기면서 살아가게 된다.

생산-소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을하는 직업으로는 교사, 의사, 판사, 경찰, 예술가, 행정가, 군인, 운동가 등 다양하다.

(1차적으로는 유학자들은 직접적인 에너지 생산을 하는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고 했고, 나머지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직업으로 분류했다.)

이런 기본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인간의 직업들에, 혼자서 생존하기 힘든 인간적 특성으로, 인간은 협동을 논의했고, 여기서 구조를 만들어왔다. 

심지어 1차적인 에너지 생산-소비 조직조차 협동조합이 만들어진다. 영원하면서 거대한 자연은 인간이 개인으로 뛰어넘기에는 너무나 큰 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살기가 강조될수록 자동화 기술과 가상 현실의 유흥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 더욱 소비되고 있다.

즉, 개인적인 생존만 진행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는 에너지 특성상 권력과 구조는 필수적으로 생겨나고 권력에 의지하며 소속과 향유와 안정과 발전을 즐기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에 대비되는 - 한계성이 있는 사람이란 존재는 권력을 만들거나 참여하는 것으로써 지속성을 가지게 된다.

 

물론 권력 구조 자체를 부정하며 순수한 파괴적 입장을 취하는 개인 또는 집단도 있다. 

하지만 종극에는 되풀이 되는 역사적 흐름을 보여왔으며, 거대한 소사이어티에 맞서기는 그 힘은 약하기만 하다. 

본질을 놓아두고 구조에만 집착한 결과이다. (극좌에서 보이는 테러리즘에서 흔히 보이는 한계성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권력과 이것이 공고히된 기득권은 이 구조를 활용하며 생존이 가능해진다.

점점 권력이 공고히 될 수록 보수화가되고 변화되지 않으려하였는데,

중세의 영주들은 반란을 제압함으로써 더 큰 착취를, 또 다른 농노들을 대체시킴으로써 생존력을 높여갔고

현대의 자본주의 역시 구성원들을 대체하거나 노동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생존력을 높여갔다.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에는 위험성이 크고 기존의 권력이 너무나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기본적인 개념 언급이었다. 제목 주제에 대한 본 논의는 아래에서 시작한다.)

 

2. 현상에 대한 분석

그런데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투명하지 않을까?

또는 왜 구성원들과의 대화가 잘 일어나지 않을까?

 

2024년 한국에서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축구 협회 또는 체육 협회 문제의 본질은 구성원들의 필요사항이 권력자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권력자가 취하고 있는 태도들인 자본의 투여를 통한 산업화적인 대상으로써 구성원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시각은, 권력층의 자본으로 구성원들이 움직이고 있는 명령적 관계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순수한 구성원, 또는 팬층이나 국가조직이 비판하는 이야기가 납득이 안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자본에 직접적인 참여가 아닌 사람들이 - 자본의 투여를 받은 선수, 소비 대상체들로 비추어지는 팬층, 어려울때도 도움을 기업이 국가에게 주었는데, 그들이 우리 자본에 부당성 요구를 왜 하는지에 대한 납득의 어려움

2. 충분한 소비와 수요가 있는 산업에서의 공고한 수익구조가 있는 자본적 기득권으로써, 외부의 요구는 하부 대리 구조를 대체시킴으로써 충분히 그 요구를 달성할 수 있다는 수직적인 사회 구조 인식

3. 사회가 바뀌어도 기득권이 취하고 있는 아이템, 영역, 구조는 역사적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주체가 그 기득권이 되어야지, 경질되거나 왜 바뀌어햐할 필요는 없다는 인식 

 

3. 에서 주로 전개되는 논리는, 대체성으로 이야기 될 수 있는데, 남이 대체되어도 똑같다는 양비론으로 축약할 수 있으며, 그들의 노력은 최선이기에 비판이 왜 되는지 알려하지 않는다. (이는 중세시대 영주들이 충분히 고수해 왔다. 제시 마시나 홍명보는 여기서 대체되는 카드일 뿐이다.)

2. 에서의 전개 논리는, 그동안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아닌 하부 대리인의 잘못이다. 그래서 대리 구조를 바꾸고, 자본은 잘못이 없다. 로 요약되며 

(이는 산업 시대의 자본가들의 논리이다.)

1. 의 전개 논리는, 자본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가 정치적 대상이다 로 요약된다. (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표상이다.)

 

여기서의 기득권은 항상 자신들이 세상의 주체가 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즉 평등적 존재성은 생각할 수 없고, 자신들이 해결해주고, 그것에 대한 수익으로써 수직적인 존재성만으로 성격이 이루어져 있는데,

누구나 주체가 되는 민주적 사회성이나 고대의 시민성과는 맞지않는, 봉건제, 수직적 자본 투여구조에서 생존할 수 있는 구조이다.

정부조직의 힘이 기업에 많이 넘어가 있는, 즉, 공공서비스 조차 기업에게 넘어가 있는 국가일수록 정부의 개입을 이들은 싫어하는데, 

구성원들에 의해 탄생한 정부조직은 자본을 기업에게 후원하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대 왕권시대의 왕 또는 산업시대의 지배자는 개인 권력으로 기업에게 돈을 줌으로써 예속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으나

민주 시대의 권력은 모든 동의를 통해 기업에게 돈을 후원할 수 있음으로써 예속관계를 정립하지만, 

동의력이 약할 수록 자본의 참여는 적고, 빠른 변화가 필요할 수록 (가령 축구 선진화를 이루자! 같은 구호) 자본가가 먼저 나서서 느린 움직임을 대체할 수 있게 되는데, 예속관계는 많은 동의력이 필요한 민주 시대에서는 오히려 역전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권력은 동의력이 약한 대중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권력가는 '내가 해결해 주는데 내 이름도 못 붙이냐 (예를들어, HDC 간판)' 를 주장할 수 있으며, 대중의 요구를 오히려 먼저 해결한 권력은 공로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싼 값에 대중의 요구를 우리는 해결해줄 수 있고, ‘20억 봉사’ 라는 것이 그들의 의식 구조가 되는 것이다.

평등적인 관계는 오히려 느린 민주주의에서는 자본이라는 속도를 통해 쉽게 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오히려 분명해야 한다. 

구성원들 속에 권력가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평등성은 존재할 수 있게 되는데, 

정부가 이 평등성을 주장할 수 없기 된다면 정부의 역할은 오히려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권력가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에 여기서 정부가 반박을 할 수 없다면 오히려 권력에 정부 기구는 예속 되는 것이며

구성원 개인중에 1차적인 에너지 생산-소비가가 아닌 직업군의 사람은, 즉 스포츠 선수는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느냐, 공정한 사회에서의 공정한 영웅이 되는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국정감사에서의 임오경 선수의 확대 피해의식으로도 비춰질 수 있는 권력층에 대한 순간적 비판은 이 '기로'의 선상에 있는 당사자였기 때문이다.(선수협회를 향한 정치집단이라는 권력자들의 표현에 비판적인 주장 장면)

 

'대중의 눈치를 보지않는다'는 비평을 한 박문성 위원의 이야기는 

그들이 왜 눈치를 보아야하는지가 납득이 안되는 권력층들에게는 일방적인 외침일 수 있었다. 

그가 상대한 권력층은 눈치가 필요조차 없고, 자본 통한 존재적 집단이기면서, 평등적 구조와는 그가 말한 애초에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중세 영주들처럼 이미 모든 성장의 환경이 갖추어진 안정적인 권력구조에서 자란 대통령들도 그랬고, 모든 기업가들의 후손들도 그렇다. (하부구조, 또는 평등 구조에서 시작한 창업주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를 내가 대신 해주는데, 왜 비판 받아야하는지 모른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에는 비판으로써는 설득 될 수 없고

지금이 왜 수직적인 구조가 아닌지를 정부기구와 구성원들이 보여주어야만 설득가능하다. 

즉, 공정성과 평등성의 가치가 사라진 곳에서는 자본을 통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권력층에서는 설득이 되지 않는다. 

권력층의 하부 대리 구조를 교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전통이고, 

만약 거대 권력층이 있다면, 대중의 분위기를 통한 권력층 자체의 교체, 예를 들어 다른 대기업이 자리를 앉히는 반복적인 현상이 자리메김할 수도 있다. 

대중은 협회의 정관 자체, 국가의 헌법를 바꿀 수 있어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 사회 실현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자본의 칼날은 구성원의 배고픔을 쥐어왔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오래 걸린다.

그리고 대중은 항상 선동당하기 쉽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에게 지적해주어야 할 것은, 축구라는, 어떤 특정 스포츠는, 정말 공정한 것이며, 공정한 게임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그들이 왜 공정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공정하지 않았던 흐름으로는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자본에 잠식된 스포츠, 중국과 같이 공정성이 없는 스포츠는 경쟁력이 없고, 세계적 수준에서 계속 밀린다는 이야기가 되어야한다. 자칫 태국, 오만 등과 같이 전력이 약해진다는 이야기로 흐르면 다른 능력있는 사람으로 또 대체하면 된다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지금의 수직적 구조는 옆나라와도, 양궁협회와도 비견해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로 구조 자체의 위험성이 언급되어야 한다.

단순히 이러면 대중들이 싫어한다는 얘기로 흐르면, 자신들이 자본을 동원해서 팬이 모이면 어떻할 것이냐는 것에 또 지루한 원론적인 이야기가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또 전개되는 인기의 자생성은 천문학적인 돈보다 가치가 크다는 논리는 또한 부차적인 공방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가설만 늘어 놓는 공방이므로 사실 현실적으로 와닿지도 않는다.

 

그러나 공정함이라는 것은 대중에게 필요한 논리이지, 공정함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것이 설득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부기구가 필요한데, 정부기구가 펼치는 자본 투여의 논리로는 충분히 단독 역할 수행을 하는 자본가들에게는 변죽을 울리는 논리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국정감사에서 공정성이 제외된 그들의 자질을 논하는 1,2,3 주제의 이야기는 이미 그들의 감수성으로 해결이 안되는 전개로 흘러가면서

국정감사를 이야기하는 정치 대리인들이 충분히 자본가들에게 위협받기에 좋은 논리이다.

 

따라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이야기는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자본적 기득권으로써 이 사회의 문제를 대신 해결하고 성장시켜 주었다의 관점을 벗겨주어야 한다.

국정감사이기에 당연히 언급되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설득력이없는 - 그들의 자질 비판, 살아온 환경 비판은 아에 세계가 다른, 수직적인 세계의 그들로써는 단순한 좌우 이념과 같은 정치로 밖에 비춰지지 않으며

수평적 토대위에서의 협회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협회가 속한 분야가 다같이 발전하는지를 해외 사례를 심도깊게 보여주며 - 축구나 배드민턴, 심지어 컬링- 비전을 가지고 사례를 가지고 설득해야한다. 심지어 생활체육분야 이사 월급의 타당성도 해외 생활체육인들의 사례를 보여주며 체육회의 거대구조를 충분히 비판 가능해진다. 하물며 가장 인기있는 종목인 축구의 사례는 넘쳐난다.

 

주변머리와 눈치가 필요없는 수직적인 권력 구조는 도핑 팀과 같은 성과주의와 생활체육의 쇠락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로도 전개될 수 있다.

그 사례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비판이 아닌 깨우침을 통해서 진행되어야 반복되는 공방이 일어나지 않지만, 

불행히도 정감사는 그 성격의 자리가 아니다. 깨우쳐주기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능할 지경이다.민주주의의 유일한 무기 - 공정성과 특혜를 파고드는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불행히도 2번의 전개논리로 홍명보 아닌 다른 감독으로 대체하고 다른 이사진으로 구성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이임생 이사를 소모시킴으로써 충분히 그들의 논리를 확인해왔다.

수평적 민주사회에서의 함의를 가지고 오점을 찾아내고 징계와 개선점을 도출하야야는데, 국정감사가 제자리를 도는 것은 그들은 그런 함의에는 참여하지 않는 자본의 논리 : 문제점-해결에 익숙한 인조적인 결과를 사랑하는 수직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공정성’이 필요없는 연맹이 아닌 수직적인 협회의 장들이나 재벌들은, 항상 특혜속에 있었기에 ‘특혜’가 없는 사람들은 그저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난 불쌍한 계층으로만 인식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특혜를 당연시하며 스스로 정점 상단에 올라있는지 조차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많은 자동화 기계에 기대어 사는 혼자 사는 인간처럼 외롭다. 대리인을 통해 정점에 사는, 혼자 사는 계층에 있기에 공감도, 공정성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축구협회도, 체육협회도 -
권력과 자본을 동원해 공정성이 사라진 스포츠를 그들의 도구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곳으로 전락한 것이다.
홍명보와 이임생은는 스스로 특별한 임무를 띄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대체 도구인 자본과 권력에 도핑된 것일 뿐이고, 더이상 스포츠-인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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