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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차대전기 사이의 발칸국가들 2. 알바니아 그리고 곁가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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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2
조회수 : 132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5/03 01:40:32

루마니아를 쓰면서 1을 붙였으면 2,3이 연달아 나왔어야 하는데 좀 바빳고 바쁜 와중에 틈이 좀 나면
아제로스에서 얼라이언스의 일원으로 강철호드랑 싸우며 세계를 구하느라...이제야 씁니다.
깊은 내용은 엎으니, 아 이때 이 나라에서는 이런 상황이 펼쳐졌구먼 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Flag_of_Albania.svg.png
알바니아의 국기는 1912년 완전 독립을 달성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국기의 변천사를 보면 지금 저 국기가 12번째 국기이기는 합니다만 적색바탕에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가 있는 기본적인 형태에서 독수리의 묘사가 조금 변한다거나 
Flag_of_Albania_(1939-1943).svg.png
파시스트 이탈리아 점령 하에서의 국기 처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상징을 국기에 집어 넣거나
Flag_of_Albania_(1946-1992).svg.png
누가봐도 명확한... 공산 알바니아 시절의 국기처럼 별이나 낫과 망치를 추가하는 정도였습니다.


양차대전 사이의 알바니아를 설명하기 위해 간략하게 알바니아의 독립과정과 1차대전기를 서술하겠습니다.
알바니아의 독립 움직임은 다른 발칸 국가들, 그리스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다르게
1878년에야 시작됩니다. 이는 알바니아인의 약 절반은 수니파 회교도 였으며 수니파 회교도가 아닌
알바니아인들, 북 알바니아의 가톨릭 교도나 남부의 그리스 접경지대의 정교도 알바니아인들 모두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에서 제한적이나마 자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북부 산악지대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씨족단위의 생활에서 족장 가문들이 지역의 우두머리였으며
남부에서는 개종한 봉건 대지주들이 사실상의 통치자였습니다. 알바니아에서 투르크 총독은
이들의 협조 없이는 행정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상당한 배려를 베풀어야만 했습니다.
또한 다른 발칸 국가들과 달리 회교, 가톨릭, 정교도가 뒤섞여 있는 알바니아에서는
통일된 민족 종교가 부재했기 때문에 종교가 이들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개개인의 알바니아인들은 투르크 지배 하에서 자치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제국의 
관료직이나 군대에 종사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때 투르크 제국의 허약성을  드러내며 제국의 본격적인 후퇴가 시작되는 산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됩니다.(1878년)
Bulgaria-SanStefano_-(1878)-byTodorBozhinov.png

이 조약으로 알바니아인들 거주지역 일부와 알바니아 핵심지역까지 위협받게 된 알바니아인들은
AlbaniansOutsideAlbania.png

알바니아연맹을 창설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불가리아의 대확장을 낳았던 산 스테파노 조약은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열강들에
의해 좌절되고 베를린 회의에서 새로운 국경이 설정되는 것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산스테파노 조약 지도에서 Principality of Bulgaria 부분만이 불가리아 공국으로 인정되고
그 밑의 동루멜리아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유한, 투르크 내 자치지역으로 남습니다. 
1885년에 이 두 지역이 통합되면서 불가리아 왕국이 탄생합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탄생한 알바니아 연맹은 제국 내에서 자치권 확대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즉시 독립이 아닌 자치권 확대가 목표였던 이유는 격동하는 발칸 반도내에서 알바니아가
독립하게 될 경우 그리스, 세르비아 등의 다른 발칸 국가들에 의해 알바니아가 재분할 될 것이라는
위기감도 있었고, 아직까지는 투르크 제국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습니다.

알바니아 연맹이 투르크 제국에 의해 붕괴되면서 -자치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문화적 사업에 열중합니다. 잡지나 도서 출판이 주를 이루었던 이 사업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종교적,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로 연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1900년까지 알바니아 인구의 95%는 유력한 족장가문이나 대지주에게 종속된 농민이었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이 전 계급으로 퍼져 나가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바니아의 자치권 확대 혹은 독립은 알바니아 자체의 역량 보다는 유럽 열강과 발칸 내
지역 강국들의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 세르비아의 직접적인 위협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야욕속에서 알바니아인들은
투르크 지배 하에서 그들과 협조하여 개혁과 자치권 확대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속에서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비록 터키가 일부 양보하기는 했으나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거둔 유의미한 거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어 1908년에 오스만 투르크가 청년투르크당의 주도아래 헌법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자,
알바니아인들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교육사업의 확대, 자치권 획득 운동등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체제의 투르크 제국과 청년투르크당이 유럽 지배의 중추이며, 터키의 세력권 하에 안정적으로
놓여져 있다고 간주한 알바니아의 독자적 움지임을 허락하지 않자, 지식인층을 선두로하여
많은 알바니아 인들이 이 신체제에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알바니아의 다수를 점하던 보수적인
회교도 농민들은 청년 투르크당 주도의 서구식 개혁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헌법은 투르크 지배하의 회교도 비회교도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는 것에서는 보수층의 반발을
 터키어를 국어로 확정한 것에서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 지식인층의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결국 회교도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점하던 코소보에서 1910년에 일어난 반란 , 터키어 교육 위주의
새로운 교육체제와 징세의 확대를 반대하는, 이 잔인하게 진압되면서 
알바니아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갔습니다.  이어 1911~1912년 동안 알바니아 전역은
반 투르크 저항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마침 식민지를 확대하려는 이탈리아의 도발로 일어난 이탈리아-투르크 전쟁(1911-1912)에서
ottoman_empire_territory_lost_copy_copy.jpg

오스만 투르크는 이탈리아에게 무력하게 패배하자 알바니아와 타협하여 자치권 확대로 가는 양보를
얻어냅니다. 
그러나 위 지도에서 1912-1913 투르크의 유럽에서의 축출을 낳은 제 1차 발칸전쟁,
발칸 여러 국가들이 터키를 유럽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차례로 터키에 선전포고하게 되자
알바니아인들은 무너져 가는 옛 제국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민족과 영토를 온존히 보존할 수 있을것
이라는 판단 - 제국이 패배하여 승전국들의 전리품이 되기전에-하에 
1912년 드디어 독립 알바니아가 탄생하게 됩니다.

640px-Principality_of_Albania.svg.png
(갈색과 옅은 주황색 사이의 타협안이 주황색이 확정된 알바니아 영토입니다, 지금도 이와 비슷합니다.)

1912년에 독립은 했으나 알바니아의 국경 확정과 독립 인정문제, -러시아와 프랑스는 우방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강해지는 것을 원했으므로 알바니아를 약화시키기를 원했습니다.-
1913년 7월에 이르러서야 유럽 열강 6개국의 협의에 따라 알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알바니아의 군주로 독일의 빌헬름 비트가 추대됩니다. 
-발칸 국가들에 독일계 왕이 추대되는건 드문일이 아니었습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도 독일계 귀족
들이 국왕으로 추대되기는 했습니다. 비트 가문도 1093년에 시작된 가문으로 영토가 크지는 않았지만
슈탄데스헤어로 신성로마제국 때부터 이어온 제후가문이었습니다. 왕으로 추대될만한 집안이기는 했습니다.
여기에 어머니는 네덜란드 공주였고 그의 고모가 루마니아의 왕비였습니다-

열강에 의해 임명된 35세의 젊은 왕은 정치적, 외교적 능력의 부족으로 국내와 국외에서 고립되어 갔지만
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그를 후원하기 위해 알바니아에 주둔하던 독일, 오스트리아 군이 철수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차관과 원조가 중단되자 재정이 고갈되고 전쟁에 휘말린 유럽 열강들의
압박 속에서 즉위 6개월 만에 퇴위합니다.- 알바니아에서는 단명왕이라고 부른답니다.-


2nd_principality_of_albania_map_by_imperatordeelysium-d50ujaf.png

전쟁기간 동안 무정부상태에 빠진 알바니아는 남쪽에서는 그리스가 영토를 무단으로 점령했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국경 인근의 영토(파란선 안쪽의 초록색이 아닌 부분 중 북쪽)를 
강제로 점령했습니다.
1915년에 이탈리아는 아드리아해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볼로나 항구와 인근 영토를 점령하였고
(적색으로 칠해진) 프랑스도 이에 편승하여 코리차(알바니아 남동쪽 Koritsa)를 점령했습니다.

전후에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알바니아 대표들은 1912년 독립 직후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알바니아 영토를 분할하고자 하는 승전국들의 비밀협약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간에 체결되었고 그리스 또한 알바니아 남부 주민들이 정교도라는
이유로 남부 알바니아를 획득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승전국들의 일방적인 야합을 거부한 사람이 미국의 우드로 윌슨 이었으며, 그는
알바니아의 분할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영토 할양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1920년 3월에
확약하였습니다. 이로써 알바니아는 1912년의 국경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이에 힘 입어 1920년에 알바니아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국민 통합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수니파 회교도, 수니파의 분파인 벡타쉬, 가톨릭, 정교를 대표하는 위원회를 선출하였고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으며 이로써 1920년 안에 주둔하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이탈리아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1.독립 직후의 알바니아의 정치적 상황 

알바니아의 완전한 독립은 성취되었으나 1920년 이후의 알바니아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알바니아에는 철도가 전혀 부설되어 있지 않았고 공업은 수공업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지하자원의 매장량이나 매장 위치 같은 것도 전혀 파악되어 있지 않았고
농업기술도 전근대적인 수준에 불과하였습니다. 
발칸의 많은 국가들이 경제적 불안과 후진성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까지 주변 강대국에게
예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알바니아 였습니다.

또한 투르크 지배 동안 알바니아에는 학교 설립이 금지 되어 있었으므로 1912년에서야 투르크로 부터
분리되었고 그 이후로는 무정부상태의 혼란에 머물렀던 알바니아에는 교육제도가 전혀 없었으며
이런 이유로 알바니아 표준어가 보급되지 못하여 남부와 북부의 방언이 통합되지 못했고
높은 문맹률과 오랜 투르크의 지배로 인한 봉건적 체제는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의회제 실시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남부 알바니아에서는 지주는 회교도, 소작농은 정교도로 계층이 종교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부 알바니아에서의 갈등은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경제적인 문제에 의한 것이었으며
기독교도 소작농들은 회교도 지주의 토지를 분배하기를 원했고 알바니아 회교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바니아의 의회정치는 1921년 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는데 대립하는 양당, 토지 개혁에 반대하고 보수적이며
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당과 토지 개혁을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인민당 간의
갈등이 그 원인 이었습니다.
첫 선거에서 승리한 인민당이 내각을 구성하였지만 인민당의 지도자 아메드 조그(Zog)는
투르크 통치에 봉사한 파샤 가문 출신으로 권위적이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21년 개혁이 지지부진한 것을 문제삼아 일어난 일련의 폭력 사태를 진압하고
권력을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알바니아에서 대대로 기득권 층이던 조그는 인민당을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을 뿐 토지 개혁 같은 급진적인 개혁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고
오히려 보수파이자 인민당의 반대파였던 진보당과 결탁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토지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법에 의해 과중한 세금, 주로 토지세가 소작농에게 전가되게
되는 것에 남부 지역의 기독교도 알바니아인들이 반발하였으나 효과적으로 억눌렀습니다.
이에 조그가 정치적 암살과 연루되어 탄핵 당한 후 알바니아에서 추방된 후에
새로 구성된 인민당 내각이 수개월 동안 통치하였으나 그들의 구성이 너무 다양하였고
이해관계도 복잡했기 때문에 정국 불안이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1925년 조그는 군부의 지원하에 쿠테타를 실해하여 재집권 하게 됩니다.
Ahmet-Zogu-1895---1961.jpg알바니아의 조그 1세, 어이쿠 스포일러네요.

종신 대통령에 오른 조그는 야당 지도자들을 추방하거나 투옥시키고 군대와 경찰을 측근으로 채워넣었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제왕적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 경제 성장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차관도입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전후의 경제적 어려움과 알바니아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채무 불이행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기 때문에-어려움을 겪다가
유고슬라비아나 그리스에 비하여 알바니아에 덜 위협적이라고 판단한 이탈리아에서 차관을 도입하게
됩니다.
1925년에 이탈리아와 재정협정, 경제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것에 의하면
알바니아 내에서 이탈리아 은행이 독점적인 통화 발행권을 가지며, 이 은행들은 알바니아의
간섭 없이 로마의 지시하에 움직일 수 있으며 알바니아 국립은행 또한 이탈리아인들의 
영향력 아래 둔다는 사실상 알바니아의 경제권을 이탈리아로 종속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차관의 원금과 이자 상환을 위해 알바니아의 관세, 소금, 담배, 성냥의 국가전매업을
보증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알바니아는 초기에는 이런 차관 도입으로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냈으나
이탈리아는 이 같은 경제적 협정에서 정치적, 외교적 이득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이되면서
이탈리아는 곧 알바니아의 경제적 통제권, 군사권, 외교관계에서의 통제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1926년에 조그 정부는 이탈리아에 해를 끼치는 다른 국가와 정치적, 군사적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 다는
조약을 이탈리아와 체결하였고 20년간의 군사동맹이 맺어졌습니다. 이런 군사동맹은
알바니아 군대에 대한 이탈리아의 통제권 확대로 이어졌고 이로써 알바니아로 진출하는
이탈리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조그는 1928년 신헌법을 제정하여 알바니아의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알바니아를
세습 군주국으로 변경하였으며 알바니아의 군주는 수상의 자유로운 임명, 해임 국방통솔권, 예산안 거부권
정치범에 대한 즉결처분권, 선전포고권을 보유하는 등 전근대적인 군주정 체제를 수립하였습니다.
이후 1928~1939년 동안 조그 1세는 이탈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와의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으나 이탈리아의 강한 압박속에 포기하였고
알바니아 군은 사실상 이탈리아 장교단의 지휘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탈리아 농민들이
알바니아 일부 지역에 식민되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은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년층, 장교, 가톨릭 교도, 회교도 지주층등 다양한 계층에서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만이 고조되는 사이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데 자극 받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9년 3월에 알바니아를 이탈리아의 보호령  된다는 것에 조그 1세가
동의하지 않자 알바니아를 침공합니다. 알바니아 침공은 군사적으로는 이미 알바니아 군대가
이탈리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던 점, 외교적으로는 열강들이 알바니아를 외면한 점에 힘입어
매우 순탄하게 진행되었으며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300px-Italienska_områden_1939.PNG파시스트 이탈리아


2. 경제적 상황

비록 이탈리아의 차관 도입으로 알바니아는 양차대전 사이에 상당히 발전하였으나
1939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습니다. 
농업이 주된 경제적 활동이었으며 1939년까지 농업인구는 80%에 달했습니다.
그 중 양질의 토지는 회교도 지주층이 소유했으며 농민의 40%는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1930년 자신의 권력이 안정화되자 조그 1세는 토지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어떤 성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한 고등교육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농업기술의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농민의 주된 생산물은 옥수수로서 자급자족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옥수수 외에 과일, 올리브, 포도주 정도 만이 외국으로 수출되어 공산품을 수입해 올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1428087389cN5cKG6tn9AAbrB7TDVC.jpg

알바니아 농업생산성의 낮음은 알바니아 자체에서 농업 기계류와 농업 기술 개선을 가능케 할
인재 뿐 아니라 자본도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며
설령 어떤 해에 운이 매우 좋아 풍작이 들었다 하더라도 국내 주요 시장 혹은 수출을 위한 항구로
수송할 수 있는 도로조차 매우 부족한 것이 알바니아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도로를 뒷받침하여 생산품을 운송해야 하는 철도 또한 약 20마일, 32 k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수원IC에서 안성 IC까지가 약 36km)
공업 또한 가축 사육업, 낙농업, 담배, 벽돌, 양조, 통조림, 비누 공장 정도 만이 있는 정도 였습니다.
산림업과 광산업은 알바니아 주도적인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나마 이윤이 남는
원유, 아스팔트 산업은 이탈리아인들의 통제아래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후진성 때문에 알바니아가 필요로 하는 기계류, 금속, 의류, 정유, 차량, 화학제품, 종이
등의 수입을 위하여 값싼 원료와 농산품으로 지불해야만 했기 때문에 무역 수지 또한 적자에 허덕였습니다.
여기에 이탈리아가 알바니아의 수입, 수출의 약 60%를 흡수 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경제적으로
이탈리아에 종속되었습니다.

3. 사회, 문화적 상황

알바니아의 사회적 상태는 그들의 후진적인 경제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였습니다.
기초적인 수요를 만족시키는 경공업의 후진성으로 가내수공업이 20세기 중반까지 성행하였는데
바구니, 방적, 나무공예, 직물 방직 등의 기초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수공업 제품은 수출이나
판매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급자족을 위한 자구책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그 질 또한
낮은 편이었습니다.
사회적 교류와 물자의 운반을 위한 수송은 기계나 차량의 자국 생산이 불가능하고 전량 수입하여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가축을 수송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교통, 수송의 후진성은
외국으로의 수출 뿐 아니라 국내에서의 물자교류도 매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640px-Principality_of_Albania.svg.png

도시는 수도인 티라냐, 이탈리아가 개발한 볼로나, 중세부터 내려온 도시인 북쪽의 두라초 정도
(지도 위 노란색 원)를 빼면 거의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알바니아인의 식생활은 국가 경제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옥수수빵과 치즈 정도를 먹고 생산된 고기, 우유, 버터, 고급 치즈, 달걀은
외국에 수출하여 수입되는 공업 제품의 대가로서 지불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양섭취로 알바니아 농민들은 질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의생활 또한 경공업 제품이 아닌 수공업 제품에 의존하여야 했으므로 질이 높고 낮음 보다도
국민의 수요를 뒷받침한 절대적인 수요에도 미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산되는
비단은 인조 비단의 등장으로 타격을 받아 생산과 수출이 급감하였고 알바니아 농민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는데 일조하였습니다.

1939년 알바니아가 멸망할 때까지 알바니아인의 85%가 문맹이었고 대학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위해서는 유학을 가야만 했습니다. 비록 조그 1세 체제 하에서
제한적이나마 지식인들이 계몽운동을 펼쳤으나 조그 1세의 의도적인 외면과 탄압 속에서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양처대전 사이의 알바니아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서 가볍게 쓴 글이니 
재밌게 읽으시고 좋은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발칸제국사
오스만 제국 몰락사
영어, 독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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