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사라졌다. 어느 날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큰 꿈을 안고 함부로 세상에 도전했었는데, 순식간에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패배해서 사라졌다. 일단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꿈 하나만 가지고 상경했었지만, 꿈을 버리고 다시 모든 걸 가지고 내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광주로 다시 내려왔다. 내려와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꿈을 포기하고 내려오면 뭐가 다른 게 펼쳐질 줄 알았다. 하나, 세상은 똑같았고 여전히 잘 굴러간다는 사실이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팠다. '뭐지?'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친 쌓아온 인연과는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 요즘의 날씨같이 내 맘대로 쏟아냈다가 그쳤다. 그렇게 잠에 드는 거, 그게 하루의 인생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나? 하지만 바꿀 의지는 없다. 그저 이렇게 그냥 살다가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정신을 지배하자 몸도 지배당했고, 점차 나태해졌고 조금씩 부정적인 기운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얼마 못 가 소중한 인연들과는 차례차례 정리를 했다고, 아니 정리를 해야 망했다.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과는 단절하고 뭔가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하니 죄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건 결국 그렇게 될 애라는 꼬리표 뿐이었다. 뭐 좋다 그런 꼬리표 따위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전한 길이였다. 하지만 그건 경험해 보지 못하고 상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고, 막상 겪어보니 세상은 소위 말하는 칼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날카롭고 따가운 칼이었다.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간다고 했던가. 요즘은 눈감으면 다 베어간다.
그래서 여기저기 베이고 온 나의 풀린 두 눈에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당한다! 그렇게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처럼 하루하루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이것도 마찬가지, 금방 지치더라. 진짜 뭔가 정신을 잡을 게 필요했다가 술을 먹어볼까? 아니면 여행을 가볼까? 친구를 더 많이 만나면 괜찮아질까? 이런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놨다. 물론 밑바닥까지는 털어놓을 수 있는 만큼만 털어놨다. 너무 밑바닥까지 보이면 감당이 안 될 거 같았다.
곰곰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는 딱 한 마디만 했다. '산 가자.' 의아했다. 무슨 산이냐?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곳 굳이 힘들게 올라가서 내려와야 하는 곳을 왜 가는가? 내 대답도 역시 한마디였다. '안 가.' 그렇게 치열하게 끌고 가겠다는 자와 안 끌려가겠다는 자의 싸움이 치열하게 이어졌다가 결국 그 대립의 끝은 역시 한마디로 정리됐다. '막걸리 사줄게.' 역시나 대답도 한 마리도 정리됐다. '고마워.' 그렇게 나의 첫 산행이 결정되었다.
때마침 나의 고향은 광주였고, 뭐 심심할 때마다 가봤던 무등산이기도 했다. 별다를 게 있겠나 싶었나. 그냥 체력만 빼고 오는 거지. 그리고 공짜 막걸리만 먹으면 그만이었다. 일어나기도 싫었지만, 기어코 나를 붙잡는 그 녀석 때문에 아침부터 일어나서 강제로 결국 왔다.
무등산 입구는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살짝은 거슬렸다. 다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야 그렇게 강한 햇빛에 인상을 한번 꾸기자 조용히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나보다 늦은 술 없어'라고 하고 먼저 달려가는 친구, 청춘영화인가? 싶었다... 그래도 뭐 나쁘지 않네... 공기는 조금씩 올라가다 보니까 다람쥐가 보이더라! '야, 저기 다람쥐가 보여!'라고 말했더니 '그거 다람쥐 아니야.'라고 한다. '어..'
자식, 무안하게 그런데 점차 힘들다. 숨이 가빠오는데 이상하게 멈추기가 싫었다. 계속 올라가고 싶었다. 처음에 예쁘게 봤던 주위 풍경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내게 보이는 건 무등산 중머리 재였다가 우리의 목표 정상도 아니고 그냥 산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올라간다는 무등산 중머리재. 하지만 그것 역시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 옆을 지나가는 정정한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쌩쌩하다. 뭐야, 왜 다들 저렇게 빨라? 생각하는 순간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 '야자냐? 아, 이 자식 나보다 산 못 타네.'
소위들 발작 버튼이라는 게 있다. 이건 내 발적 버튼이었다. 감히 너보다 못할 일 있겠냐. 나는 급하게 주위에 튼튼한 부러진 나뭇가지를 줍고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금세 친구를 따라잡은 뒤 한 마디 했다. '응~ 장비 차이!'
이겼다. 이게 승부였다. 저 자식은 애초에 등산 지팡이였고 나는 나뭇가지 아닌가. 그렇게 급하게 올라오는데, 뭐지? 저 녀석 계속 가까이 다가온다. 뭐지, 왜 떨어지지 않는 거지? 나는 전속력인데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면서 중머리재 올라왔다. 올라오니 별거 없더라. 막 엄청난 풍경이 펼쳐져 있었을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그런데 뭐가 멍하니 사람을 앉아있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계속 보게 되더라. 그런데 귓가에서 음악 소리가 나오기에 보는데 친구가 이어폰을 꼽아줬다가만히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가 눈에서 나오는 게 눈물인지? 땀인지, 그건 비밀로 하겠다. 그리고는 '가자'라는 말에 말없이 자리를 일어났다. 그렇게 정상에 내려왔다가 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가와서 파전에 막걸리를 외쳤다가 삼국지의 유비와 그 형제들처럼 도원결의를 하듯이 건배를 외치고 한꺼번에 마셨다.
무등산 아래 주막에서 먹는 술은 참 달콤했다. 그러고는 또 잠깐을 말없이 술을 먹는데, 문득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면 내려오는 것이 순리이고, 또 막상 올라가면 별거 없지만 옆에 위로해 줄 친구와 올라온 과정이 재밌었다. 올라가 보니 한참을 보게 되는 풍경은 내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더라. 그런데 그렇게 돌이켜보니 방황했던 시절도 소중한 인연을 놓친 것도 다 나의 삶이었다.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서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중심이 못 찾으면 어떠한가. 조금 방황해도 어떠한가, 삶이 조금 고단하면 어떠한가. 어차피 그것도 다 나의 삶이고 인생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그리고 절경이 뭐 별 거인가. 내 인생에서 좋은 추억으로 남기면 절경이지. 내 인생이니까 그러니 나에게는 한라산, 백두산보다 무등산이 더 절경이다. 왜 같이 힘들게 올라갈 친구가 있고 한번 올라가 본 길이다. 이제 어딘가 힘든지 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또 친구한테 내밀었다. 이 말과 함께 '다음엔 정상?'
이말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해주실 능력자 구해요..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