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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연쇄 살인마와 피해의식]
게시물ID : psy_21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둥글이8
추천 : 1
조회수 : 21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9/05 10:39:36

2004년 1월 14일.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부천시의 모 열립주택 공터 놀이터. 한 남성이 놀이터에서 놀던 두 남아를 식칼로 위협해 인근 산으로 데려가 성추행을 한 후 목 졸라 살해 하고 시신을 암매장 했다. 그 후 남성은 2년 간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13명의 민간인을 더 살해 하고, 20여명을 부상 입혔다. 범행은 주로 식칼로 피해자를 난도질하거나 파이프 렌치 등의 둔기로 머리를 내려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이렇게 살의를 뿜어내는 난데없는 공격에 생사를 달리한 이들은 말할 나위 없지만, 살아남은 이들도 지울 수 없는 외상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렇게 끔찍하고 잔혹하게 이뤄지는 일련의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경찰은 엄청난 병력을 투입했지만, 마지막 범행 중 남성이 잡히기 전까지 범인에 대한 작은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경찰은 나중에 그 남성의 집을 압수수색 하고 나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집에는 과학수사 관련 드라마를 빼놓지 않게 보고 과학잡지를 구독했으며, 자신의 범죄를 다루는 기사는 물론 사건 담당 수사관의 얼굴 사진까지 벽에 스크랩 하며 자신의 범죄를 치밀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족적을 남기지 않게 신발 밑창을 다 도려내는 등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완전 범죄를 위한 물품들이 집에서 다수 발견 되었다. 이틀에 한번씩 10km 마라톤 등을 통한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철저한 식단 관리와 살인 훈련의 장기적 계획까지 짜여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사건 현장에 실마리를 남겼을 리 없었던 것이다. 시대의 살인마 정남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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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규는 경찰 조사 과정에“내가 죽였는데 유영철이 (자기가)한 것처럼 말해 기분 나빴다.”, “3천명은 죽였어야 하는데... 너무 아쉽다.”, “살인을 할 때는 머리가 맑아졌다.”는 말까지 했는데, 그를 면담했던 범죄 심리학 전문가는 “이 때까지의 많은 연쇄살인마를 대했지만 정남규가 가장 오싹했다.”고 소회를 털어 놓았을 정도이다.

그런데 정남규가 연쇄살인마의 길로 들어서기 까지의 과정 역시 그가 저지른 연쇄살인 만큼이나 처참하다. 그는 우선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다.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과 상습적 폭력을 휘둘렀는데, 그 폭력에 짓눌려 가정 살림을 꾸려야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제대로 된 부모 사랑도 못 받고, 무기력한 장남으로 존재하며 수많은 수치와 상처를 얻었을 것이다. 여기에 동급생들의 따돌림과 폭행으로 고통을 받았고, 초등생 때에는 여아로 오해한 마을 중년 남성에게 성폭행 까지 당했단다. 이러한 끔찍한 경험을 통해 할퀴어진 정신이 온전 했을리 없고 고등학교 졸업 후 입대한 군대에서 ‘고문관’으로 낙인 찍혀 온갖 가혹행위를 받아야 하던 빌미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흔은 그의 상처를 더더욱 깊어지게 했다.

전역 후,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인관관계가 두절되고 극도의 위축감에 고통 받던 그는 결국 살인을 통해 억눌린 영혼의 해방의 길을 찾게 된다. 그는 경찰에 체포 되어 조사 받는 중에“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는다.”며 “사람이 고통에 괴로워 하며 죽어가는 모습과 집이 불타오르는 모습에 황홀해 지는 기분을 갖는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어렸을 적부터 키워온 피해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고 끔찍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정남규의 사례는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피해의식이 만들어내는 폐해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준다.

피해의식은 사전적으로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명예 따위에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나 견해.’이다. 이에 따라 세상 사람 누구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는데도 자기가 훨씬 더 큰 고통을 받았다고 여기며 그것이 전전으로 남 탓이라고 전가하며 세상에 헤꼬질 하는 태도에서 피해의식은 성장한다. 어린 시절의 학대, 육체적, 정서적 폭력, 소외, 상실, 모욕, 사회 습속과 집단성 등등은 이러한 피해의식을 부추기는 요소이다. 물론 이런 끔찍한 경험을 겪었다고 해서 무조건 피해의식에 빠져 살인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험적 요소들이 ‘무너진 자아상’과 접촉해서 정서적 악순환이 촉발될 때, 피해의식은 파괴적인 성향으로 분출 된다.

특히나 인간은 흔히 자기가 겪는 ‘경험’과 ‘자기 자신’을 혼동한다. 하여 자신의 경험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것이 고정관념으로 굳혀진다. 부정적 경험일수록 흡입력이 더더욱 강해 그 경험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자책하며 비하하며 자기 증오로 이끈다. 액운이 들어차는 것이다. 이렇게 굳혀진 고정관념에 기반한 ‘피해 의식적 세계관’은 스스로를 환기시킬 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피해의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취사선택, 조작하며 스스로의 ‘피해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한다. 이러한 사고에 빠진 이들이 ‘나(우리)는 옳고 너(너희)는 틀려’라는 선악의 이분법에 빠지고 남들의 호의마저도 악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잦은 것도 그 때문인데, 모든 파시즘과 독단주의의 공통적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한 마음은 끊임없이 ‘나는 피해자야.’, ‘나는 고통만 받고 있어.’,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세상이 다 바뀌어야 돼’, ‘저것들을 응징해야 해’라는 발상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기 실현적 예언’을 반복케 하는 영원의 절망과 악몽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는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상을 볼 시야를 갖지 못한 많은 이들이 피해의식의 공격성향이 가져오는 일시적인 성취나 해방감에 도취되어 자기 자신이나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피해의식을 증폭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런 이들의 특성은 과거 경험으로부터 무의식에 각인된 부정적 기억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존을 좀먹을 만한 사건들에 집착하며 스스로의 상처를 쉴 새 없이 헤집는다. 그런 이들일수록 자극적인 목소리를 내게 되며, 그 반작용으로 타인의 거부와 반발이 발생하는 바, 그러한 거부에 직면해 더더욱 극단화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이런 이들이 내적 안정감이 부족하고, 자아상이 무너져 있고, 남 탓만 하며, 다른 사람이 자기편 안 들어주는 것을 견디지 못해 극렬히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도 그들 존재의 특질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정남규의 사례지만, 그 정반대쪽 극단의 예수와 석가 사이의 무수한 스팩트럼 상의 한 점 어디에 우리 각자의 피해의식과 자존은 위치해 있다.

현재 내가 심각한 피해의식에 빠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과 세상에 의해 피해를 받고 있다는 의식으로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고, 그래서 이가 갈리고 다 뒤짚어 버리고 싶을 심정이라면 그 자체로 피해 의식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시대사적으로 아무리 위대한 이슈를 제기하고 있건 부당한 권력과 맞서 장엄한 투쟁을 하던과 별도로 피해의식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 ‘상황’이 지금 현재 당신 옆에 앉아서 직접적으로 지속적으로 고문을 하지 않는 이상), 고정관념에 기반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해석하면서 자기 실현적 예언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고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피해자 역할’임을 자처하고서 상처를 헤집은 결과로 얻은 자승자박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면 이는 확연하다. ‘너는 어떻게 해도 내 몸의 털끝도 건들 수 없어’라는 생각이 건강한 사람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다. 건강한 사람은 같은 상황이라도 부정이 아닌 긍정의 필터로 해석하고 타율이 아닌 자율의 언어를 선호한다. 이렇다 보니 건강한 사람들은 상대방과 세태에 의해 좌지우지 하지도 않고 감정적으로 격동하지도 않으며 절망할 일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내 마음먹기의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남 탓 하지 말고 자기 탓만 하라는 말도 아니다. 필요한 때는 남 탓도 해야 한다. 다만 부조리에 맞서서 격렬히 싸움은 하되, 그것이 제대로 안 풀렸을 때 껄껄 웃으며 털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못하고 그 압박에 짓눌려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증오에 휩쌓일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맞서 싸우는 적?들이 만들어낸 세상의 ‘약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쟁은 투쟁대로 하면서 한계 상황에서 저들이 주려는 압박과 좌절과 절망을 받지 않고, ‘니들 때문에 내 인생이 비참해졌어’라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우리 나름의 현실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과 자율을 이뤄낼 때 우리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상의 조물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피해의식의 재앙에 빠질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의 선택은 아주 간단한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당신 앞에 놓인 어떤 문제가 안 풀리고 꼬일 때, 그것에 남 탓 하고 욕하는데에 쏟으며 피해자로서의 자아상을 굳건히 할 것인지, 웃으며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지의 차이이다. 전자는 부정적 인생관을 강화하고 후자는 긍정적 인생관으로 수렴된다. 전자는 점점 더 편협한 전체주의와 흑백논리에 귀결되고, 후자는 자신의 인생의 스펙트럼을 더더욱 확대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낸다. 하기 싫더라도 꾸역꾸역 인생을 긍정하는 흉내라도 내다보면‘자기 실현적 예언’이 이뤄진다. 정남규의 실존을 따라갈 것인지, 예수와 석가의 실존을 따라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몫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유일한 점은 스스로 자기 존재에 대한 규정을 하고 그 규정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만이 가진 그 특출난 ‘자기 규정의 능력’을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존을 좀 먹는데 이용하는지는 알다가 모를 일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어두운 측면이리라. 내가 사는 세상은 내가 내 주관을 가지고 내 자의로 꾸려나가야 할 것이지 남이 만들어주거나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내가 주인인 숭고한 내 인생을 감히 세상의 어떤 새끼가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남이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피하자’임을 자랑으로 떠벌리냔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말은 억울한 일을 당한 당신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피해의식’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를 반성하는 사람은 닥치는 일마다 모두 약석이 되고, 남을 탓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마다 모두 창과 칼이 되는 지라, 한편은 숱한 선의 길을 열고, 한편은 온갖 악의 근원이 되나니 그 서로의 다름이 하늘과 땅의 사이 같다.’ - 채근담.

- 올해 말에 출판 예정인 둥글이의 [싸움의 기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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