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은 예정되어 다가올 특별히 인상적인 즐거움을 누릴 기회에 주목함에 의해 유발되는 감정이다. 그리하여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좋고, 다가올수록 더욱 그러할 수 있는 감정이며, 때가 되었을 때는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가치있게 활용하게끔 유도하는 감정이다. 삶의 본질을 주어진 상황에서 감정과 기억과 깨닳음 같은 것을 최대한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설레임은 어쩌면 삶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합목적적인 상태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좋은 감정이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느낄 일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 같다. 왜 줄어들까? 그 이유로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범주의 일을 경험할 일이 희박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뭐든 낯썰고 처음인 것은 경험 자체 만으로도 어느정도 충족되는 관념이 있고, 그래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기회는 설렘을 느끼게 될 정도의 어떤 기대를 품게하는 동인이 되는 수가 많다. 반대로 아무리 듣도 싶어했고 듣기좋던 꽃노래도 계속 들으면 감흥은 떨어지고 (다른 감정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단물 다 빠지고 당연하다고 생각될 쯤이면 설렘도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을수록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충족된 것도 경험 한 것도 많고, 그래서 지금 경험하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일들도 대략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 범주에서의 변형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이라는, 설렘을 느끼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동인이 줄어들고 그렇게 줄어든 만큼 설렘도 희박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방학때 마다 놀러가던 어릴때의 외가댁이 나이 들어서는 처음가는 해외여행지 보다 더 설렐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설렘을 위해서라면 넉넉한 정신적 여유도 대단히 중요해 보인다. 설렘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험 같은’ 특별히 인상적일 즐거움을 누릴 기회도 있어야 하지만 (사실 새로운 경험뿐만 아니라 소수의 선택된 자만 누릴 수 있는 희소성 경험, 자체적인 끌림이 이나 즐거움이 있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결핍으로 절실한 상황에서라면 극대화 된다), 그 전에 그런 기회의 가치를 알고 미리부터 거기에 신경을 쏟을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인 여유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신적인 여유가 있을 때였으면 기꺼이 신경비용을 지불하고 미리부터 거기에 주목하며 설렘을 느낄수 있을법한 충분히 가치있는 기회대상도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서 쏟을 신경자원이 귀한 상태라면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지나치게 되는 상황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즐거움을 누리는 일 보다는 먹고 사는 일에 신경쓰는것 만으로도 벅찬 현직 성인들이나, 또는 신경 쏟아야 하는 일은 줄었지만 신체가 그렇듯이 오래된 충전지 처럼 정신적 체력이 떨어져서 정신적인 용량자체만으로도 빠듯한 퇴직노년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 이외의 대상에 신경자원을 쏟는 것은 자신의 어느정도 위태로움을 각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하고써라도 취하고 싶은 정도의 특별한 즐거움 대상이 아니라면 거기에 미리부터 주목하며 신경자원을 쏟기는 힘든 법이다. 그에 따라 진심으로 신경을 쏟을수 있는 대상은 희박해지고 설렘도 마찬가지로 희박해 지게 된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설렘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충족 가능한 결핍이 희박한 상태라서 설렘도 희박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정리하면 먹고살기에도 돈이 부족하면 취미여가에 돈을 지불하기 힘들고 돈 들어가는 취미여가 대상이 사라지듯이 먹고살기에도 정신적인 여유가 부족하면 누릴 대상에 미리 주목하며 신경비용을 지불하기 힘들고 신경비용을 지불할 만한 누림 대상도 희박해 질텐데 나이가 들면 지켜야 할것 챙겨야 할것 추구해냐 할것이 많아져서 되고 그렇게 설렘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는게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