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관을 갔다. 폐관 시간이었다. 아이가 어려 어차피 실내 관람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너무 집 근처 놀이터만 가서 새로운 곳에 데리고 가고 싶었을 뿐.
잔디밭이 너르게 펼쳐져 있고 추상적인 조형물들이 군데 군데 서 있고 아이는 신나서 재게 걸었다.
나는 백일 갓 지난 아기가 누운 유모차를 슬슬 밀었고 남편은 뒤뚱뒤뚱 뛰는 아이가 돌부리에 넘어질까 누군가와 부딪힐까 아이 보폭에 맞춰 걸었다.
- 좋을 때네요.
단아한 옷차림을 한 노부부였다. 우리 부부 정도의 자녀가 있고, 우리 아이들 정도의 손주가 있을 법한.
노부인은 곁에 선 어르신을 부축하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하신 어르신은 노부인의 팔을 의지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 힘들죠? 힘들어서 잘 모르겠지만 좋을 때에요.
힘들다 느껴진 적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이 분명 좋을 때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늦게 얻은 아이들, 몸은 한창 때의 체력을 잃어버렸지만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 기도하며 기다렸던 보물들이었다.
그저 좋을 때라는 말에 웃으며 긍정했다. 마냥 예쁜 내 보물들. 울고 떼써도 귀엽고, 어설픈 숟가락질로 밥 한 술 크게 떠 입 안에 넣을 때는 더 예쁜. 그렇지, 나는 지금 좋은 때를 보내고 있다.
- 그 때는 희망이 있거든. 열심히 키우고 열심히 살면 뭐가 될 지 궁금하고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고.
부인의 목소리는 씁쓸했지만 치열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제 생각해 봤는지 생경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희망도 계획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나의 인생은 이제 크게 변할 게 없다,고 생각해 왔다. 여기서 얼마나 배우고 발전하고 성장하고 변할까. 훌륭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발전한다지만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다.
내 인생에서의 변화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무궁무진하게 성장하면서 겪을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휴직을 하고 다시 임신를 하면서 퇴직했다. 더는 다이어리를 사지 않았다. 연간 계획과 분기계획과 월간 계획과 주간 계획과 오늘의 계획과.. 모든 계획이 필요하지 않았다.
화장품 하나 옷 한 벌을 사지 않았다. 어디 나갈 일도 없었고, 살이 다 안 빠져 예쁜 옷을 살 엄두가 안 났다. 수유를 해야 하니 머리는 적당히 묶을 수 있을 만큼 자르기만 했다. 전에 쌓아놨던 기초화장품과 신혼여행 다녀오는 길에 샀던 아끼는 메이크업 화장품들은 개봉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네일샵을 간 건 3년 전의 일이다.
집중할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책도 3년 동안 3권 정도 읽었다. 그 중 한 권은 둘째 출산한 병원에서 읽은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신간을 냈는지도 몰랐다.
집 앞에 나갈 때 막 신을 여름 샌들을 코스트코에서 신어보고 있을 때 남편이 말했다. 좋은 거 사라고.
- 어디 갈 곳도 없는걸, 머. 잠깐 신고 버리면 돼.
그런 말을 할 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거나 가족을 위해 아끼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나를 꾸미고 채우고 성장하는 모든 귀찮은 행위를 아이를 키우는 좋을 때를 방패 삼아 외출하고 벗어놓은 흐물흐물한 옷처럼 던져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코스트코에서 한 철 신고 버릴 신발을 샀던 것처럼 지금 시간을 때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분명 좋을 때다. 몸과 정신을 갈아넣는 것 같은 날에도 분에 넘치게 행복하다.
그럼에도 더는 이렇게 나는 이렇게 널부러 놓은 채 아이들만 무럭무럭 자라게 해서는 안되겠다.
아이가 내가 아닌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 할 때, 엄마가 대입에 대해, 취직에 대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뭘 아냐고 할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 브랜드 옷 사주고 전집 사느라 화장품 하나 신발 하나 안 샀어. 너 키우느라 바빠서 엄마가 하고 싶던 거 못했어. 그렇게 말하는 일은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