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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홍콩하면 떠오르는게 중경삼림입니다.
빽빽한 빌딩숲 그 아래 좁은 골목길에서, 다양한 인종으로 이뤄진 수많은 사람들이 비좁은 골목 사이를 지나가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모습. 그 속에서 세기말과 중국반환을 앞두고 뭣 하나 정해진 미래 없이 혼란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그려져요.
그리고 또 하나, 첨밀밀이 생각납니다.
등려군의 노래를 암암리에 즐겨부르며 냉전 속에서도 음악으로 이어져있던 본국과의 재회가 제발 따뜻한 만남이길 간절히 바라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제가 처음 홍콩을 간 기억은 십이년 전이에요.
그때도 아마 일이 고되어, 좀 쉬고 오자고, 가까운 곳 찾아간게 홍콩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브라운관과 영화관에서 접했던 그 홍콩을 그대로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전히 다양한 민족들이 영어로 소통하고,
골목골목마다 쪼그려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 하며,
담배연기 자욱한 펍들과,
길거리 죽대를 맨 상인들이 이것저것 권하고,
열채 중 하나는 외부수리를 한답시고 대나무로 건물을 감싸고 있으며,
나머지는 에어컨과 빨래가 건물 외관을 덮어버렸으며,
중심지엔 바라보면 목이 아플정도로 높다란 고층건물 사이로 헬리콥터들이 오가는 그런 도시였죠.
몇번의 방문 이후 마지막 방문은 코로나 직전이었습니다.
우산시위가 있었고,
곳곳이 막혀 있었어요.
홍콩은 보행자 친화적이지 않아요.
밀도가 높은곳인 만큼, 도로는 항상 정체하고 있고, 그걸 해소하고자, 건너지 못하는 도로들이 많고, 대로 사이의 보행자 이동은 육교가 담당합니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육교가 얽혀 장관을 이루는게 홍콩이죠.
그런데 우산시위 당시에는 그 육교가 여기저기 막혀있었더랬습니다.
홍콩섬은 몰라도, 구룡반도쪽은 어떻게 돌아다니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하철도 출입이 힘들고 버스는 너무 줄이 길어, 결국 배로 한참을 기다려 홍콩섬에 복귀했던 기억도 나요.
그리고 코로나가 있었죠.
코로나로 홍콩 관광업이 아주 박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여행이 다시 재개되었지만,
여전히 홍콩에 가지 않은것은,
마지막 여행에서 생겼던 중국에 대한 반감,
그리고 관광산업이 죽었다는 정보 때문이었는데,
주변 국가와 도시들을 1년하고도 반 사이에 죄 돌아다녀본터라,
결국 홍콩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홍콩의 빌딩숲은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홍콩섬의 풍경은 별반 달라진게 없었어요.
오히려 아쉬웠던게 있는데,
한때 홍콩을 상징했던, 중국은행건물이 못생긴 네모건물에 막혀 하부의 모습이 아예 가려져버렸다는 정도?
하지만, 여전히 백만불짜리 야경이며, 세계 어디에서도 못보는, 말도 안되는 마천루의 숲인건 달라진게 없었습니다.
그냥 그때 그대로였어요. 아니 처음 가서 봤던 풍경 그대로였습니다.
여전히 일부 건물들은 외부공사를 한답시고 대나무로 덮어놨고,
예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여전히 에어컨 실외기와 일제 창문형 에어컨, 그리고 빨래들로 가득했으며,
길거리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신호등이 울려대는 땍땍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요상하기 그지없어요.
침사추이의 명품거리는 더욱 단장되어 깔끔해졌고,
소호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끝도없이 사람을 실어나르고,
트램도 여전히 옛스러운 모습으로 뽈뽈거리며 돌아다녔으며,
명물인 아이스크림 차량은 곳곳에서 영업중이었으며,
맥도날드에서 피곤한 얼굴로 죽치고 있는 이들도 그대로였으며,
2층버스의 표정없이 밖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길거리 가득했던 담배연기는 사라졌고, 대신 오렌지색의 재떨이 주위로 몇몇 사람들만 흡연을 하고 있었으며,
죽대에 간식거리를 메달고 관광객에게 권하던 노인들도 사라졌으며,
온종일 시끄럽게 만들던 헬리콥터 소리도 가끔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색이 죄 검은색이 되어있었어요.
그 많던 백인들, 그리고 인도인들의 비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기껏해야 소호의 펍에서나 쉬이 볼 수 있었고, 죄 관광객이었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돈많은집 아들과, 삼성 글로벌 법무일을 한다는 변호사와 베트남을 거쳐 몇달째 여행중이라는 미국인 아가씨는 있는데, 홍콩에서 산다는 백인은 만나질 못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관광지 모두를 점령하고 있어요.
옛날 가득했던 유람선 승객은 딱 봐도 몇 없어, 한참을 모객한 뒤에야 출발했고,
반면 페리에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으로 가득차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탈 수 있었습니다.
빅토리아파크의 관람차는 중국인이 없어 수월하게 탔지만, 빅토리아 피크트램은 중국인들이 몰려, 한참을 기다렸다 타야 했어요. 물론 전망대에서도 온통 중국 단체관광객들로 가득차, 사진 찍기가 꽤나 힘들었었습니다.
분명했습니다.
다양성을 보여주고, 국제도시라는걸 보여주던 그 타인종들이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중국인들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문맹이라 손가락 채팅이 아니라 음성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든 공간에서 저마다 전화기에다 대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중국 본토인들이 빈자리를 채웠음이 틀림없었어요.
시끄러운 북경어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공대학이 더이상 민간에 개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우산혁명의 중심지였고, 시위대를 보호했던 이공대학 교정이었던 탓일까,
학생증이 없으면 이제는 출입조차 안되는 폐쇄된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특별한 도시풍경을 자랑하고,
여전히 높은 소득을 올리는 도시이며,
여전히 여타 아시아 도시에 비해 다양하며 국제화된 도시임은 틀림 없으나,
이젠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홍콩의 주인은 중국이구나...
작년 중국이 여행을 개방한 당일 풍경이 생각납니다.
워낙 푸젠성 요리를 좋아하여, 대만도 자주가고, 샤먼도 자주 갔었는데, 그 본토 마라생선탕이 먹고싶어 개방 당일에 맞춰 방문했었습니다.
샤먼 하면 그래도 중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며, 소득이 높고, 샤먼대학의 외국인 유학생으로 바글바글한데다, 휴양지로도 유명하고, 영국 조계지였던터라 도시 풍경도 이국적인 곳이었는데,
코로나를 지나오니, 명색이 국제공항이라면서 영어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들이 출입국 관리를 하고 있었으며, 도시에 흔히 보이던 영문표지판도 싹 사라져 있고, 도시에 외국인이라고는 나 하나만 있던, 그래서 돌아다닐때마다 눈길을 받으며, 심지어는 여학생들이 한궈런이냐며 물어보고, 그렇다 하니 꺄르르 웃어대며 같이 사진 찍어댈 정도로 놀랍게도 그냥 중국인으로만 구성된 도시로 바뀌어 있던 기억이 납니다.
콜라 하나를 주문하려 해도, 중국식 발음인 크얼러를 말해야 알아듣는, 영어 알파벳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어요.
그렇게 온통 중국인들이 샤먼의 유명한 중산로를 가득 채워, 이제는 외국인 없어도 별로 서운할게 없는 곳이구나 싶었죠.
홍콩이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구나.
외국인은 이제 메이드로 취업온 저개발국가 여성들이 대다수인데,
폐점한 스타벅스 옆 공터를 차지하고선 유튜브 방송을 하며 자기네 음악으로 춤춰대며 시끄럽게 하는 것을 제외하면, 또 주말 공원에 자기들끼리 모여 벼룩시장을 열어 사고파는 모습을 제외한다면,
그나마 홍콩을 사랑하여 찾아오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아니면 다른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도시가 되어가는구나.
점차 거리에 북경어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늘어나겠구나.
그렇게 여느 중화권 도시와 다를게 없게 변하겠구나.
이 도시가 10년후에도 국제도시로 남아있을까?
멋들어진 풍경으로 눈을 사로잡지만,
중경삼림과 첨밀밀의 추억을 가진 이들이 점차 나이들어가며 덜 찾는다면,
다음 세대의 외국인들이 홍콩을 멋진 도시로 생각할까?
고층건물 많은 중국의 여느 일선도시와 다를게 있을까?
물론 역사에 따른 다양한 음식들과 풍경이야 남아있겠죠.
이번에도 맛있는 여행을 즐기고 왔으니까요.
이런 저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추억하는 홍콩과, 지금의 홍콩은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이 그다지 매력적인 변화는 아니라는 것이에요.
혹시, 홍콩을 가보지 않은 사람 혹은 다녀온지 시간이 지난 사람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홍콩을 방문하길 권합니다.
여전히 홍콩은 매력이 넘치고 아름다우며 멋지고 맛있는 도시이지만,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홍콩의 모습이 언제까지 남아있을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네요.
여전히 백만불짜리 야경을 가진 홍콩의 모습을 일부나마 올리며 끝을 맺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