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록空想錄]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랩탑은 검은색이었다. 그 랩탑이 눈에 띄었던 건 단지 다른 전시모델들과 달리 모니터가 닫힌 상태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뚜껑이 마치 불길에 그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그것이 눈에 띈 것이다. 처음엔 뭔가 특이한 문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중고 랩탑의 장식케이스를 벗기지 않은 것이라고 담희는 생각했다. 쇼윈도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고 나서야 담희는 그것이 랩탑의 본래 모양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뚜껑이 불에 그슬린 모양같은 자국이었고, 그래서 조금도 아름답다거나 세련됐다고는 느껴지지 않고 그저 징그러울 뿐이었다. 담희는 한참동안 그 검은 랩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랩탑의 앞부분에(다른 랩탑의 경우 모델명과 사양이 적혀 있는)붙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고 담희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그 종이에는 붉은 글자로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담희는 메스꺼움과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고,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고개를 들어 그 중고 컴퓨터가게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블랙홀 컴퓨터'
담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플라타너스 가로수쪽으로 한 발 물러나 1층 건물의 잿빛 슬래브로 된 지붕 위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담희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담희는 다시 쇼윈도 앞으로 다가갔고, 마치 여기 언제 이런 이상한 매장이 생겨났나 고민하는 표정으로 보도블럭 좌우를 돌아본 뒤 멀리서 다시 한 번 그 랩탑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담희는 통유리문의 나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소담희가 섀시 현관문을 열었을 때 현관 모퉁이너머 거실 식탁에서 할머니와 할머니 친구가 과일접시를 앞에 놓고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이야기에 빠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남귀순의 눈 앞에 연신 박수까지 쳐가며 '세상에'같은 표정을 짓는 할머니 친구 신선자의 모습이 먼저 보였고, 그 뒤 자신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 할머니 남귀순이 희극적인 얼굴로부터 고개를 돌려 손녀를 향해 '어서와'에 해당하는 인자한 얼굴표정을 지어보이는 쭈글쭈글한 피부가 보였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거실의 왼쪽 맞은 편, 현관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자기 방으로 들어갈 때 소담희는 현관문 맞은 편(구조상으로는 집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는 목욕탕쪽에서 어떤 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세면대 위에 고인 머리감은 물을 내릴 때 하수관이 토해내는 쿨럭소리와 닮아 있었지만 어딘가 좀 더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갑자기...입을 쩌억하고 벌리더니 내 새끼 내놔!"
"아이구."
담희는 엄마가 어디갔나 물어볼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고, 아픈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도 한 두 할머니의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런 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담희의 방은 작았다. 들어찬 가구 역시 앙증했고 대부분 원색의 깔끔한 디자인들이었고, 책장에 꽂힌 자습서같은 책들 역시 공부를 위해서가 아닌 디자인때문에 산 것처럼 하나같이 예뻤고,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담희는 방문 바로 옆에 놓인 낡은 책상 의자등받이에 가방을 걸고 지퍼를 열었다. 지퍼안으로 들어간 담희의 손이 다시 나왔을 때 그 아귀에는 아까 보았던 검은 랩탑이 끼워져 있었다. 앙증맞은 판박이 스티커와 오려놓은 귀여운 껌봉지가 놓여 있는 책상 위에 랩탑을 올려놓고 담희는 다시 한참동안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꽤나 어수선하고 혐오스런 무늬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싫지 않은 느낌을 주는 무늬였다. 담희는 자신이 이 랩탑을 사고 싶다고 말했을 때 '블랙홀 컴퓨터'라는 그 이상한 가게의 주인할아버지가 웃으며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담희는 어딘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참 재밌는 이름이네요."
그리고 킥킥, 곧 원래의 소녀스러움을 회복했다. 담희는 고개를 돌려 손짓으로 쇼윈도 앞의 검은 랩탑을 가리켰다.
"모든 사람들이 그걸 다 아는데 말이예요."
"네?"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
"갖고 싶어요, 학생?"
담희는 이상한 광택이 느껴지는 눈이라고 생각하면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자신이 랩탑을 사고 싶어 모아왔던 돈의 액수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런데 할아버지... 저거, 얼마예요?"
칫솔모같은 흰수염이 돋아난 할아버지는 한참동안 묘한 표정으로 담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갖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한 번 더 담희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담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할아버지는 손짓으로 쇼윈도 앞의 검은 랩탑을 가지고 오라는 제스츄어를 담희에게 취해 보였다.
의자에 앉고 난 뒤 한참 더 소담희는 랩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표면이 손상되었거나 그슬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랩탑의 기형적이고 흉측한 무늬가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런 감동을 주는 것인지 담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방까지 이 랩탑이 오게 된 과정 또한 그래서 담희는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마치 꿈같고 영화 속 한 장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녀들이 자주 그렇듯 자신을 주인공화하여 오늘 자기 주위에서 벌어진 일들을 오해하며 황홀함에 빠졌고, 그런 뒤 리드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리드를 밀어올리고 나타난 검은 액정을 담희는 또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액정 안에 도사린 어둠은 랩탑 뚜껑 껍질의 두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추 선 그 검은 물속에 비친 부연 유령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어떤 낯선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담희는 방 안이 희한한 연기들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연기는 퍼지지 않았고 날카롭고 흉칙한 그 악마같은 형태를 유지한 채 무럭무럭 자라나는 듯 느껴졌다. 따가움을 느낀 담희는 연기가 파고 들어오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살아있는 연기! 연기를 죽이기 위해 담희는 당황하여 팔딱팔딱 뛰면서 자기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렸을 때 두꺼운 회색 연기가 담희의 입을 뚫고 목구멍으로 파고들어왔다. 이물감이 목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고개가 젖혀졌고, 덜덜대는 눈시울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꺼풀이 계속 떨렸다. 담희는 간신히 눈을 내리떴고, 액정 안에서 붉고 징그러운 불똥같은 것이(마치 담배불처럼) 깜빡이는 것을 보았고 전원을 끄기 위해 억지로 좀 더 눈을 떨구고 터진 동그라미를 파고든 막대무늬의 전원버튼 위로 손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한기가 담희의 척수를 훑고 지나갔다. 전원버튼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꺾쇠처럼 고개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자판의 숫자와 문자들이 휘둘린다 싶더니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담희의 정수리와 마주한 곧추 선 검은 물이 쿨렁거리는가 싶더니 들끓듯 출렁이기 시작했다. 담희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라는 허물'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등 뒤로 멀어져 자기 동공 안을 바라보는 위화된 차원감을 담희가 느꼈을 때 차츰차츰 빛과 함께 방이 부글거리는 그 검은 어둠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정말이네요. 정말 움직이지 않는군요."
의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눈가가 검고 피로로 피부가 패인 듯싶은 인상의 남자 의사는 끄떡도 하지 않는 담희의 어깨를 계속해서 잡아당겼지만 역시나 의자에 붙은 담희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떡해요? 어떡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담희의 엄마 양희재는 담희의 뺨에 댄 수건이 젖어 코를 덮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녀가 시야를 위로 더 올리지 못했던 것은 그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막아보았지만 담희의 경련같은 눈깜빡임이 드디어 눈물이 아닌 핏물을 그 분비물로 쏟아내기 시작한 것을 목도하지 않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의사선생님. 얘 이러다 얼굴 찢어지겠어요."
의사는 당황했고, 망설이다 쇄골 쪽을 짚어 정맥을 찾은 뒤 다시 한 번 진정제 미다졸람이 든 주사바늘을 꽂았다. 떨림이 일어나는 부위는 담희의 눈뿐만이 아니었다. 입술과 턱이 동시에 후들거렸고, 팔과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심장박동은 규칙적으로 달음질쳤고, 연쇄작용으로 피부가 덜덜거려 마치 담희의 몸이 진동을 내는 거대한 스마트폰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듣지 않아요. 왜 이러지?"
몇 분이 지나도 전혀 진정되는 기미가 없자 한층 더 창백해진 안색으로 의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떡해요? 어떡해!"
"아이구!"
남귀순의 외침에 앞을 돌아본 양희재가 또 한 번 비명을 질러댔다.
"으악!" 담희의 엄마 양희재는 비명을 지르며 곧추 선 검은 액정을 붙잡았다.
"담희야! 담희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의사 역시 지금 자신이 목도한 일이 대체 뭔지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열린 입을 통해 의사의 침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의사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진정제는 효과가 없었다. 덜덜덜 떨리던 경련이 온몸을 찢어 놓을 듯 격렬해지다 완전하게 담희의 몸이 액정안에 빨려들어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마치 세탁기 드럼에 끼인 옷가지가 끌려들어가듯 액정안으로 담희의 몸이 순식간에 빨려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이곳에선 어떠한 처치도 할 수 없겠다는 판단하에 다시 구급대를 불러 담희의 몸을 의자에서 떼어내거나 안되면 의자 채로 담희를 병원으로 데려갈 계획을 의사와 담희 모 양희재가 세우고 있을 때였다. 담희가 사라진 검은 액정을 움켜쥔 채 자신도 그 곳으로 데리고 가 달라는 듯 담희 모 양희재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을 때 쇠벽처럼 곧추서 있던 액정이 닫히지 시작했다.
"안돼!"
담희 모 양희재가 닫히는 걸 막기 위해 그 사이로 팔을 넣었다.
"으악!"
전통電痛과 함께 팔을 빼낸 양희재는 다시 그 힘에 밀쳐져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다시 일어났고, 그러나 그 흉칙한 표피의 랩탑은 이미 그 뚜껑이 완전히 닫힌 상태였다.
검은 눈동자로부터 서서히 풀려나온 담희의 영혼은 날것 그대로 시공간에 노출된 채 그 압박과 기류에 따라 흉하고 일그러진 문양을 허공에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상실이자 증강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공감각적 심상'이란 말의 의미를 영혼이 된 담희는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와 포개짐을 반복했고, 모든 감각들이 담희의 영혼안에 한데 엉키고 잠복해 있는 느낌이었다. 그곳엔 담희가 자기 몸 안에 들어있을 때 의뭉함을 주던 헷갈리는 이미지들이나 촉감, 소리따위가 없는 세상이었다. 담희는 다시 한 번 엄마의 몸을 바라보았다. 주름살들 하나하나가 다 엄마의 상징물들처럼 느껴졌고, 그 작은 엄마가 하나하나 쌓이고 쌓여 위태로운 엄마의 인생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마는 아주 작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엄마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인지 자기 영혼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것인지 담희는 알지 못했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도 무너졌다. 그녀가 좋아하는 '끌림과떨림'의 캐릭터들이 공기방울처럼 그녀의 주위를 감싸는가하면 그녀가 몇 번이나 흉내내어 그려본 풍선껌의 만화주인공들이 무늬지기도 했다. 자신이 시간의 터널에 갇혔다는 사실을 담희가 깨닫게 된 것은 괴물처럼 울퉁불퉁한 형태의 검은 랩탑을 열고 그 검은 액정안을 바라본 뒤 다시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흐르고 난 후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시간으로 치자면 몇 십 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담희의 생체를 기준으로 보자면 아주아주 찰나의 시간이었고, 담희는 알지 못했지만 담희의 소프트웨어(영혼)를 교란한 검은 랩탑이 버려놓은 담희의 몸은 계속해서 빠른 경련같은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찰나같은 영원의 검은 바다에 빠진 담희 영혼의 가눌 수 없는 시간의 곡예 안에서는 아주 긴 시간동안 자신의 몸이 한 번씩 포즈를 바꾸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이 세상의 시간으로써는 너무너무 빠른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 바다에 빠져들기 전 자기 영혼으로부터 쏟아진 담희의 몸은 멍했고, 허공에 빠진 담희의 영혼은 시간의 곡예성에 어지러움을 느꼈고, 늘 조그맣고 단순하다고 여겨왔던 자신의 몸이 엄청나게 커다랗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담희는 자기 자신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담희의 영혼은 작고 자유로웠으므로 어떤 규정의 틀을 상실한 채 맘껏 양껏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이 사라진 집이 급속도로 늙어가듯 영혼이 사라진 담희의 몸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시간과 공간이 믹싱된 영혼의 세계에서 바라보니 움직임은 때로 굳은살처럼 보였고, 처음에는 세상이 멈췄다고 여겼지만 곧 그것은 시간의 곡예성때문임을 담희는 깨달았고, 방 안에 가득찬 다른 존재의 영혼들도 담희는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이란 이토록 작은 것이구나. 이 작은 영혼이 자신과 같이 살아있는 존재의 생각속으로도 들어가고 마음속으로도 들어가고, 기억속으로도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제 그 바깥에서 자신이 작다고 느꼈던 것보다 더 작은 존재가 되어 바라보니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나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나를 받아들였기 때문임을 담희는 깨달았고, 그런 생각이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담희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은 이제 영혼이라는 작은 입자로써 '열역학적'이라고 부르는 변화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담희는 자신이 쏟아져 나온 자기 몸의 검은 눈안으로 다시 들어가 다시금 자신이 되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담희의 몸은 이제 더이상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고, 담희의 영혼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자기 주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뿐이었다.
랩탑 앞에 그대로 멈춘 자신을 부르러 들어오는 할머니의 모습이 모션캡쳐처럼 보일 때도 담희는 그것이 영혼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어서 할머니의 놀란 표정이 오랫동안 고정되고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엄마가 들어오고 구급대가 들어오고 의사가 들어오는 일련의 그 길고 답답한 시간들이 모두 지나가고 난 뒤에야 담희는 천천히 영혼의 세계에서의 시간의 흐름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어떡해요? 어떡해!"
곧간을 진동하는 그 소리는 담희의 영혼 주위를 타고 흘러가며 담희의 영혼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16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에 두고 바라본 적이 없는 자신을 닮은 엄마의 얼굴과 엄마의 품과 몸 여기저기를 커진 시공간안에서 담희는 양껏 맘껏 바라볼 수 있었고, 연민과 아픔과 미안함과 허무함등등이, 바쁘게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존재로써의 그녀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그녀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엄마의 살아있는 거대한 사진을 담희는 어떤 관음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이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흰 머리칼과 주름같은 늙음의 표지들이 바라보는 동안 어떤 실체감으로 담희의 영혼을 찔러왔다. 동시에 이상하게도 엄마도 자신처럼 작은 존재라는 각성이 어떤 쓰라림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담희는 아마 더 긴 무의 세계를 살아야 할 것이었지만 담희에게 있어 기준이 되는 시간이란 여전히 자신을 토해낸 그 몸이 느끼는 시간이었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길고 유의미한 시간들이 이승의 세계에서는 저토록 찰나로 스쳐지나간다는 사실이 담희는 슬펐고, 그 아픔이 한 토막 한 토막씩 곧추 선 검은 바다 속으로 잘려 들어가는 자기 몸을 바라보는 긴 시간 이후에도 담희의 영혼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도록 만들었다. 마음의 변화에 따라 이승과 담희영혼의 세계의 시간 갭은 차차 메워져 갔지만 깊고 긴 엄마의 울음소리만큼은 계속해서 담희의 영혼을 흔들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