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세계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번성하던 청동기 문명의 갑작스러운 몰락이다. 청동기 시대 붕괴는 에게 해 지역,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 지중해 동부 등에서 일어난 문명을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난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청동기 시대 후기로부터 철기 시대 초기로의 전환의 시기 동안이다. 이후 위키백과 기준으로 기원전 1100년경 ~ 기원전 800년경의 '그리스 암흑의 시대', 기원전 1069년경 ~ 기원전 664년경의 '이집트 제3 중간기'라는 암흑기가 시작된다.
기원전 1200년경에서 1150년의 기간에 미케네 왕국, 바빌로니아의 카시트 왕조, 아나톨리아와 레반트의 히타이트 제국, 그리고 이집트 제국이 몰락하였다. 이 시기의 첫 단계에서, 트로이와 가자 사이의 거의 모든 도시들이 폭력적으로 파괴되었으며 이 파괴된 도시들 중 많은 곳들이 그 이후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철저하게 파괴되어 폐허가 된 도시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하투사, 미케네, 우가리트가 있다.
기원전 2200년경의 초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와 비교하여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라고도 한다.
로버트 드류스(Robert Drews)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서로마 제국의 멸망보다도 처참했던, 고대 역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묘사했다. 그만큼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3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 이집트를 포함한 지중해 동부, 에게해, 중동 지역에서는 청동기 문명이 번창했다. 이집트 · 미노아 · 미케네 · 히타이트 · 앗시리아 · 바빌론 · 키프로스 등이 이 청동기시대 후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이들은 활발한 무역, 문화교류 등으로 현대사회처럼 글로벌화를 이룩하며 발전했다. 그런데 기원전 1200년경에서 1150년 사이, 궁전과 도시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무역로가 끊기며, 굶주린 사람들이 집단 이동을 하는 등 융성하던 문화는 붕괴한다. 문명의 몰락 이유를 밝히는 것은 수십년 전부터 학계의 관심사였지만, 여러 학설이 있을 뿐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은 실정이다.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하나의 요인보다는 기후의 변화로 인한 가뭄과 기근, 지진, 그리고 이로 인한 반란, 대규모 이주, 해양민족의 침략 등 복합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에릭 클라인(Eric H. Cline)은 《고대 지중해 세계사》에서 기원전 1177년을 붕괴의 정점으로 보고있다.
- 기원전 1200년경의 침략, 파괴, 이주의 흐름 예상도 (아틀라스 세계사, Patrick Karl O'Brie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Rhys Carpenter가 1965년에 "청동기 시대는 재앙적인 가뭄으로 끝났다"고 주장을 한 이후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지속된 가뭄이 최소한 13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의 에게 해, 아나톨리아, 동부 지중해에 영향을 미쳤다는데 동의한다. 논쟁 중이기는 하지만, 이 가뭄이 결국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초래했고 암흑기(Dark Age)를 시작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 기후는 변한다. 그 변화에 따라 생물물리학적 영역(Biophysical regions)과 사회정치학적 영역(sociopolitical regions)도 변한다.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의 위치를 주목 (Crumley 1993)
프랑스 툴루즈 대학의 다비드 카뉴스키(David Kaniewski)와 엘리스 반 캄포(Elise Van Campo), 그리고 예일 대학의 하비 웨이스(Harvey Weiss) 등이 참여한 다국적 발굴팀의 연구 결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초기 청동기 시대와 후기 청동기 시대의 종말이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시리아 북부에 있는 텔 트웨이니(고대의 기발라)의 자료를 근거로 발굴팀은 기원전 제2차 천년기 말경 그 지역에 "기상 이변과 간헐적으로 심각한 가뭄"이 있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특히 그들은 유적지 인근의 충적토에서 추출한 꽃가루를 연구했다. 그 결과 "기원전 13세기 말 혹은 기원전 12세기 초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9세기까지 시리아의 지중해 인근 지역에서 기후가 건조해졌음"을 밝혔다.
카뉴스키 발굴팀은 당시 키프로스 섬에서도 건조기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를 추가로 발굴했다는 보고서도 출간했다.
청동기 시대 후기의 위기는 3200여 년 전에 시작된 300년 가뭄의 시작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후 변화로 인해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줄었고, 식량 부족과 기근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사회경제적 위기가 촉발되었고 지중해 동부 지역과 서남아시아 지여그로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Kaniewski et al. 2013:9)
뉴멕시코 대학의 브랜든 드레이크(Brandon Drake)는 <고고학 저널(The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에 수록한 논문에서 그는 카뉴스키의 가설을 입증하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기후가 특히 건조해졌던 시기를 정확히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기원전 1250년에서 기원전 1197년 사이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주장했다.(Drake 2012: 1868)
그는 또한 미케네 궁전이 붕괴되기 직전 시기에 북반구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던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가뭄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미케네 궁전이 폐허가 되었던 시점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즉 처음에는 날씨가 더웠졌다가 갑자기 추워졌던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의 암흑 시대에는 더 춥고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었다." 드레이크가 말했던 것처럼, 기원전 1190년 이전, 지중해 해수면 온도 하락 등 기후 변화가 강우량 감소를 초래했고, 이는 미케네 궁전이 있던 지역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수밖에 없다. 미케네 시대의 그리스는 농업 생산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Drake 2012: 1862, 1866, 1868)
텔아비브 대학의 이스라엘 핀켈슈타인(Finkelstein)과 다프나 란구트는 독일 본 대학의 토마스 리트와 함께 가뭄 가설에 더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 바닥 퇴적층을 뚫어 20미터에 달하는 코어를 캐냈다. 거기서 추출한 꽃가루 화석을 분석한 결과 레반트 남부 지역에서 기원전 1250년부터 심각한 가뭄이 시작되었음이 드러났다. 그 다음에는 사해 서부 해안을 뚫어 코어를 캐냈다. 여기서는 기원전 1100년경 이전에 이미 가뭄이 해갈되어서 생명이 되살아난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세계적인 현상이었을까? 이 시기 중국에서는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국된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상나라의 멸망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기원전 1100년경의 기후변화를 주장하는 자료를 몇 개 찾았다. 상나라 때까지도 코끼리, 코뿔소 등이 황하 지역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기원전 1200년경의 침략, 파괴, 이주의 흐름 중심에 기원이 분명치 않은 '해양 민족(Sea People)'이 있다. 마틴 버낼(Martin Bernal)은 이 시기에 있었던 '해양 민족들'의 침입에 비견되는 가장 근접한 역사적 사례로 십자군의 침입으로 보았다. 즉 십자군은 프랑크인이 주축이었다면 해양민족은 그리스인이 주축이라는 의견이다.
'해양 민족들' 중에서도 유명한 필리스티아인(Philistines)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블레셋인이다. 더 이상 이주를 하고 않고 '필리스티아'로 불리던 지역(현재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경우다. 유대인 양치기 소년 다윗의 돌팔매에 이마를 맞아 쓰러진 거인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인이다. 블레셋인은 난민보다 이주 민족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둘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팔레스타인의 토착세력이 아닌 고대 미케네 문명을 건설한 그리스계 이주세력으로 추정된다. 구약성서에는 필리스티아인에 대하여 약 250번의 언급이 나오는데 이들을 "할례받지 않은 자"라고 부르며, 할례 풍습이 있었던 이스라엘인 등 셈족들과 구분하고 있다.
'해양 민족들'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 에트루리아의 기원 :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최초의 에트루리아인들이 기근을 피해 서쪽으로 항해해 온 소아시아의 서해안에서 온 리디아인이었다고 하였다.(역사 제1권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