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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영국).한국(일본)의 식민지 정책1.
( 대학 교육제도에 대한 고찰.)
2019. 3. 6
창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성경구절.–개역 한글판-
Jake Otonko, Department of Religious Studies Nassarawa State University Kefi, Nigeria /위키 백과 /편집 김태헌(경김 백촌공파 종보).
(들어가면서)
해방후 지금처럼 위안부. 징용근로대, 의혈단 등등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일본에 대한 반감이 표면화된 것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식민지국가들의 사례를 발표하는 것이 우리에게 현실적 감각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글을 편집하여 보았다. 하여간 일본의 극우의 이야기처럼 전쟁하자고 외침은 동북아 세력 균형에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죄송한 것은 한나라의 언어로 번역해서 발표해야겠지만 저의 시간상 정리 할 수없어서 다 국적언어로 만듬을 용서하여 주시고 (한국의 고교졸업생의 103% 대학 문이 열려있다).이해 바랍니다.
(본론)
1. 나이지리아에서 대학 교육의 역사적 발전. 나이지리아 대학 교육의 역사는 1943 년 엘리엇위원회에 의해 추적된다.
1948 년 University College Ibadan (UCI) 설립으로 최고를 달렸습니다. UCI는 University of London의 계열사였습니다. Ibukun은 또한 UCI가 엄격한 헌법 조항, 직원 부족, 낮은 등록율, 높은 탈락률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 1959 년 4 월, 연방 정부는 처음 20 년간 고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조언을하기 위해 Ashby위원회 (Ashby Commission)에 조사를 의뢰했다. 이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 동부 지역 정부는 Nsukka (나이지리아 대학, 1960 년 Nsukka 대학)에서 자체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애쉬 비 보고서의 시행으로 1962 년 서부 지역, 1962 년 북부 지역 및 라고스 대학교 (1962)에서 자르 아하마 벨로 대학, 자 리아에 의해 1948 년에 Ife 대학 (현재 Obafemi Awolowo University, Ile-Ife)이 설립되었다. 연방 정부. Babalola 등은 1962 년 University College, Ibadan이 fullfledged 대학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UCI, Ibadan 및 라고스 대학이 나이지리아의 첫 번째 두 연방 대학교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세 곳은 지역으로 남았습니다. 1970 년 새로 창설 된 중서부 지역에서는 베닌 대학 (University of Benin)으로 알려진 대학을 선택했습니다. 1960-1970 기간 동안 설립 된 6 개 대학은 여전히 1 세대 대학이라고 불립니다. Babalola 등은이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대학들이 정부에 대한 면밀한 감시하에 있다고 언급했다. 제 3 차 국가 개발 계획 (1975-1980)에서 정부는 계획안에 제안 된 4 개가 아닌 7 개 대학을 설립했으며, 그들은 1975 년 4 대 지역 대학이었습니다. 카라바 대학교, 일로 린, 조스, 소 코토, 마이 두구리, 포트 하 코트 및 카노 Ado Bayero 대학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 2 세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세대 대학은 1980 년부터 1990 년 초에 설립되었으며 Owerri, Makurdi, Yola, Akure 및 Bauchi의 연방 기술 대학교 (Federal Universities of Technology)입니다. 주립 대학은 이모, 온도, 라고스, 아크와 이돔, 오요 및 크로스 리버 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 4 세대 대학은 1991 년과 현재 사이에 설립 된 대학입니다. 여기에는 더 많은 주립 대학교, 나이지리아 오픈 대학교 및 많은 사립 대학교가 포함됩니다.
2. 나이지리아 대학 교육의 역사적 발전.
나이지리아 대학 교육의 역사는 1943 년 엘리엇위원회 (Elliot Commission)에 의해 추적되었으며, 1948 년 University Ibadan (UCI)이 설립되었습니다. UCI는 University of London의 계열사였습니다. Ibukun은 또한 UCI가 처음부터 강직 한 것에서부터 여러 가지 문제에 매달렸다 고 주장한다.
헌법 조항, 직원 부족, 높은 중퇴율에 대한 낮은 등록 등이 포함됩니다.
1959 년 4 월, 연방 정부는 처음 20 년간 고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조언을하기 위해 Ashby위원회 (Ashby Commission)에 조사를 의뢰했다. 이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 동부 지역 정부는 Nsukka (나이지리아 대학, 1960 년 Nsukka 대학)에서 자체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애쉬 비 보고서의 시행으로 1962 년 서부 지역, 1962 년 북부 지역 및 라고스 대학교 (1962)에서 자르 아하마 벨로 대학, 자 리아에 의해 1948 년에 Ife 대학 (현재 Obafemi Awolowo University, Ile-Ife)이 설립되었다. 연방 정부. Babalola 등은 University College, Ibadan이 1962 년에 완전한 대학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UCI, Ibadan 및 라고스 대학이 나이지리아의 첫 번째 두 연방 대학교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세 곳은 지역으로 남았습니다. 1970 년 새로 창설 된 중서부 지역에서는 베닌 대학 (University of Benin)으로 알려진 대학을 선택했습니다. 1960-1970 기간 동안 설립 된 6 개 대학은 여전히 1 세대 대학이라고 불립니다. Babalola 등은이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대학들이 정부에 대한 면밀한 감시하에 있다고 언급했다. 평의회 평의원 및 부총장의 임명은 정치적으로 동기 부여되었습니다. 정부는 제 3 차 국가 개발 계획 (1975-1980)에서 계획안에 제안 된 4 개 대학 대신 7 개 대학을 설립했으며, 1975 년에는 4 개 지역 대학을 인수했다. 이들은 카라바, 일린 린, 조로스, 소 코토, , Port Harcourt 및 Ado Bayero University, 카노 - 모두 2 세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세대 대학은 1980 년부터 1990 년 초에 설립되었으며 Owerri, Makurdi, Yola, Akure 및 Bauchi의 연방 기술 대학교 (Federal Universities of Technology)입니다. 주립 대학은 이모, 온도, 라고스, 아크와 이돔, 오요 및 크로스 리버 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 4 세대 대학은 1991 년과 현재 사이에 설립 된 대학입니다. 그들은 더 많은 주를 포함한다.
대학, 나이지리아 오픈 대학 및 많은 사립 대학 .1)-구글번역-
3. 일제 강점기의 교육
a)전문학교
전문학교(專門學校)는 실업학교 이상의 고급 기술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로 근대 일본과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 타이완과 만주국에 있었던 학교이다. 전문학교는 대학(大學) 수준의 고등교육을 제공하나, 학문과 이론보다는 실무적 기술을 주로 교육했다. 즉, 의학전문학교에서는 의학을 학문적 목적으로 교육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을 도구의 일환으로 교육하는 것이었다. 전문학교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관립(官立)과, 도(道)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공립(公立)과, 민간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사립(私立)이 있었다. 전문학교는 설립비용과 유지운영비용이 초등학교나 중등학교보다 훨씬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운영주체가 바뀌는 경우도 종종있었다. 또, 조선인과 조선인에게 호의적인 선교세력이 전문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사립을 가장한 관립 전문학교도 있었다. 관립전문학교와 공립전문학교의 교육여건과 시설이 사립전문학교보다 좋았으며, 일본 유학에서도 관공립전문학교 학력이 사립전문학교 학력 보다 유리했다.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된 직후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에서 인가 받았던 보성전문학교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경신학교 대학부, 이화학당 대학과, 숭실대학의 인가를 연장하였다. 그러나 1911년 조선교육령이 제정되고 나서 사립전문학교의 설립과 운영 기준을 강화하여 기존의 모든 사립 전문학교의 인가를 취소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조선인에 의한 사립고등교육기관을 소멸하게 하고 관립전문학교를 통해 일제의 입맛에 맞는 극소수의 조선인만을 식민통치기구의 주구로 봉사하게 하려는 교육방침에서 나온 것이다.이러한 정책과 함께 조선총독부는 1914년 12월 조선에 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총독부에서 몇몇 학교 교장들을 포함한 연구가 있었고 전문학교 설립을 1915년도에 하기로 했으나 예산 반영이 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1916년에 하게 되고 시험적으로 1915년 중앙공업소 부설 공업전습소에 특별과 3개과 [일본인, 조선인 각각 뽑음] 를 설치하고, 1916년에는 대한제국 때 설립되어 운영되던 관립 고등교육기관들을 관립 전문학교로 전환하였다. 1917년에는 중등학교인 수원농림학교를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한편, 기독교계 연합선교세력은 구미의 기독교 자본을 도입하여 경신학교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인가를 추진하였는데, 기독교연합재단법인과 세브란스연합재단법인을 설립하여 1917년 4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와 1917년 5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世富蘭偲醫學專門學校)의 인가를 득했다. 사실, 이 두개 학교를 인가해준 조선총독부의 결정에는 ‘조선교육령’과 ‘개정사립학교규칙’에 대한 기독교 세력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려는 정책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실업학교급으로 강등되어 있던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는 전국의 민간독지가 58명이 재단법인보성중앙학원을 설립하여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인가를 득하여 원래의 교명을 1922년 4월 1일 되찾게되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는 1942년 6월 일본인에게 인수되어 사립 아사히[旭] 의학전문학교가 되었고, 시설이 비교적 양호했던 연희전문학교는 1944년 관립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가 되어서 조선총독부가 관리하였다.1922년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자 관공립전문학교와 사립전문학교가 여러개 설립되게 되었다. 1922년에는 1915년부터 있었던 일본동양협회식전문학교 경성분교를 조선총독부에서 인수하여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로 개편하였고, 1929년에는 평안남도에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평양의학전문학교(공립)를 설립하였다. 1933년에도 경상남도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총독부는 3ㆍ1운동으로 고양된 민족의식을 무마하고 민족계 지식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여러 사립 전문학교의 인가를 허하였는데, 1925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재인가하였고, 1929년에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1930년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인가해주었다.이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이 강경억압책에서 회유책으로 선회하는 사이, 사립전문학교들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는 김성수를 교장으로 영입하면서 대학수준의 교사와 강당, 도서관을 갖추게 되었고, 이화여자전문학교도 신촌의 새 부지로 이전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숭실전문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보조금을 얻어 새로운 시설과 설비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명 사립 전문학교는 대학 승격을 시도했다. 보성전문학교는 김성수의 전폭적인 금전적 지원 아래 학무국장의 ‘보성대학(普成大學)’ 예비 인가를 득했으나, 총독 결제 단계에서 보류와 반려를 받던 중 결국 대학 승격이 무산되었다[21]. 또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연합하여 ‘연세종합대학(延世綜合大學)’으로의 승격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의 방해와 자본부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사립전문학교의 대학승격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대학수업의 진행과 대학교과목의 설치를 허가해 주는 회유책을 썼다.이러한 일제의 회유와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사립 전문학교는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1921~1928년 사이에만 해도 사립전문학교 중심의 항일운동이 400여건 일어났으며, 1926년의 6ㆍ10만세운동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 전시 동원체제가 강화되자 전문학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계 전문학교는 폐교시켰고, 1941년에는 모든 전문학교의 수업연한이 3년으로 단축되었다. 1939년 숭실전문학교가 조선총독부의 강압으로 자진하는 형식으로 폐교되어,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는 대동(大同)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가, 관립 평양공업전문학교로 바뀌었다. 1943년에는 ‘교육에관한전시비상조치령’을 발표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가차없는 탄압을 시작하였다. 인문사회계열의 비중을 강제로 줄이고, 이공계열의 비중을 늘리도록 조치하였으며, 여자전문학교는 여자지도자양성소, 여자농업지도원양성소로 전환하였다. 1944년에는 학도지원병제와 노무동원제를 전문학교에까지 적용하여 학생들을 군인으로 내몰고, 갖가지 전시근로동원에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1943년에는 사범학교의 일부를 전문학교급으로 승격시켜 교원양성보다는 전시에 유용한 전문교육을 실시하려 하였다.1945년 독립이 되고 난 이후 광복전의 여러 전문학교들은 오늘날의 여러 대학과 대학교의 원형이 되었다.
b) 대학
일제 강점기 시기 대학교육은 어떠한 교육보다도 그 기회가 제한적이었으며, 그나마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대학교육의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사실, 대한제국 말기와 국권 병탄 직후에 ‘대학(大學)’이나 ‘대학부(大學部)’라는 명칭을 가진 고등교육기관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학으로 볼 수 없다. 이 명칭을 가졌던 현재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대학과 대학부라는 명칭을 가진 학교를 인가한 사실을 들어, 자신들이 최초의 대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숭실협성대학, 경신학교 대학부, 이화학당 대학부의 인가 내용을 보면, 전문학교급 인가였으며, 대한제국의 인가사항을 연장하여 임시로 인가한 것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전문학교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두 인가를 상실했다. 이 시기 일본의 교육법제상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ㆍ운영할 수가 없어 1918년에 대학령이 제정되기까지는 일본에서도 제국대학 이외에는 대학의 설립과 운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상기 학교의 대학이나 대학부라는 명칭을 대학으로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법제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 본과의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대학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1910년대 말 부터 민족주의진영에서는 최고학부인 대학이 있어야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의식을 사상적 수준으로 고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조선교육령을 개정해서 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항을 신설해달라고 조선총독부에 청원하기 시작했고, 3ㆍ1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인 민립대학설립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920년대 들어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항이 신설되자 기존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국적인 단위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의 대학교육을 더 이상 금지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일본 내각과 제국대학설립 논의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민간 주체의 대학을 설립하게 하는 것 보다는 제국대학이나 공립대학을 설립하여 ‘관리’하는 것이 식민통치에 보다 유리하다고 보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와해시켰다.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유명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조선총독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일제의 초기 선전과는 달리 경성제국대학의 정원 자체가 극소수였고, 그 중에서 조선인이 입학할 수 있는 비율은 1/3 수준이었다. 이렇게 대학교육이 극도로 억제되자 수많은 학생들이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25년 말 2,600명에 불과했던 일본 유학생은 1937년 말에는 9,900여명, 1940년대에는 3만여명으로 계속 늘어났다. 극소수였지만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도 있었다.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이나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는 학제상의 불일치 때문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고등보통학교 학력이 일본의 소학교 학력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중학교에 다시 입학하거나, 당시 조선내에 단 하나 존재하던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예과를 수료해야 했다.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자 이러한 학제 불일치가 어느정도 시정되어 고등보통학교 졸업 학력이 일본의 중학교 4년 졸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이 일본의 전문학교와 대학에 유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학교 5년에 편입하거나 조선에 단 하나 있는 대학예과를 수료해야 했다. 만일, 일본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하고자 한다면 중학교 5년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일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야 했다. 만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자가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고자 한다면 별도의 사정을 거쳐 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또,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국이 건국되자 이 곳으로 유학을 갔는데, 만주국은 지리상 접근이 쉽고, 대학교육이 제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조선인들은 만주국 최고학부인 건국대학과 신경법정대학, 신경의과대학, 만주의과대학 등으로 진학하였다. 이들은 졸업이후 국무원(國務院)이나 성공서(省公署)등의 만주국 관공서와 국가기관의 간부급 관리가 되었다.일제가 조선인에 대한 대학교육의 기회를 극도로 제한한 것은 조선에서의 불안정한 식민통치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서였다. 사실 조선 내에서의 정규 대학교육은 전체 인구 대비 0.03%라는 매우 특수한 집단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기회였으며, 일제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해 민족의식이 높은수준으로 높아지지 못하게 했다.2)
(결론)
아프리카의 대국 나이지리아는 1억7천4백만 인구 대국이며 (2013년 기준) 23.8000km 면적으로3) , 역사적으로는 15세기무렵부터 노예무역으로 유럽에서 베냉왕국과 매매를 시작하다가 17세기부터 포루투갈의 노예매매제도에 영국이 끼어들면서 1861년부터는 직할식민지로(라고스 점령후) 하였다가 1900년 1월 부터는 영국왕실이 직접 통치하는 비참한 역사였고4), 그런 지역에 교육이란 있을수가 없고 ,한국의 경우 중국.유럽의 문화를(silk road) 한국을 경유한 文明전달자로서 그역활을 한 나라로서 ,일본은 수혜(受惠)를 받다가 역(逆)으로 한국과 중국에(대만.만주)문화를 주는 현상이기에 은혜를 값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또 어찌보면 15세기 포루투갈.화란의 상선들이 나가사키에 와서 무역을 시작할때부터(商館 설치) 그 서막의 문이 였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글을 쓰면서 죄송한 것은 제가 유달 중학교 2년시절에 집이 목포에서 가장 세련된 숙박업에 종사할때인데 (1972년정도.태양여인숙.방 12개의 시멘콘크리트 숙박업소로는 유일한 ) 신안 비금도 인가 할머니 한분이 자신의 방으로 오라면서 신세 한탄함 (종군 위안부.태풍주의보로 한주간 저희 숙박업소에 머물렀음.60대 초반 어여쁘고 아름답던 할머니의 未婚의 삶)에도 이글을 씀을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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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International Journal of Technology and Inclusive Education (IJTIE) , Volume 1, Issue 2, December 2012. Jake Otonko, Department of Religious Studies Nassarawa State University Kefi, Nigeria
2)위키백과,2019.3
3) 지리부도, 천재교육,1999.3.1.일 발행. 130-131쪽.
4)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 6권, 1989년5월 9판.547-5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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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대만 신북시 김서용 의원의 요청에 의해 제작된 것입니다. 또한 編輯者는 일본에게서 아무런 이익을(금전적.이권적등등) 받은적이 결코 없음을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