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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영국.네델란드.일본 )한국(일본)식민지 시절2.
(경제발전 및 공장 건설)
경주 김씨 백촌공파 김 동암 할아버지 daum cafe.
2019. 3. 12.
창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개역 한글판 성경-
사실 두나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인도네시아는 인구도 면적도 식민지의 350년의 역사도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역사는 그전에도 백과사전이나 金찬삼 교수의 여행기를(세계지리학 시간) 통하여 조금은 알았지만 2004년 월드컵 이후, 히딩크 열풍이 살아있을 때 <향료전쟁>이라는 서적을 보고 절감하였다.사실 아프리카도 흑인 노예무역은 역사가 길지만 ,식민지로 350년을 꼬박 보낸 나라는 많지가 않다.중국은 한국의<한일 월드컵>처럼 히딩크를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으로 임명하였다.어떤 나라는 350년간 식민지하느라고 뼈골이 휘어졌다는데,동북아 국가들은 히딩크 이름의 별에 별 상품이 다 있으니 참 복잡한 세상이다.
1.왜 유럽에서 그먼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에까지 와서 300년간 지배한 이유는 무었일까?
<육두구>
육두구는 나무열매의 일종으로·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탐나는 사치품이었다. 이 향신료는 약효도 매우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열매를 얻고 싶어 했다 원래부터 비싸던 것이,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런던의 한 외과의사가 기침으로 시작해서 결국에는 죽고 마는 전염성 흑사병에 육두구 향낭만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주장한 다음부터 육두구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지금은 고작해야 고창(한방에서 배가몹시 붓는 병을 이르는 말-옮긴이)이나 흔한 감기 치료에 쓰이는 게 전부이지만, 그 당시 말린 육두구 열매는 금만큼 귀한 존재였다.육두구 수요의 갑작스런 폭발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육두구 열매의 원산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런던 상인들은 옛부터 베니스에서 향료를 거래했고, 베니스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향료를 구입했다. 육두구 열매는 이득한 동쪽 저편 인도제국에서 나는 것이었고,근시안적 시야를 가진 유럽인들은 그곳이 어딘지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유럽의 배들은 인도양의 열대바다를 항해해 본 적 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도 저 반대편에 대해서는 완전 백지상태였고 향료상인들이 보기에 동방은 달나라와 마찬가지였다.육두구를 얻는 것이 그리도 힘든 일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차마 항해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향료가 지천에 깔린 동인도제도일지라도 육두구는 귀한 열매였다. 육두구나무는 토양과 기후 조건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에 동인도제도에서도 반다제도 처럼 극소수의 섬에서만 자라고 있었다, 더욱이 뭍에서 너무 멀리 외따로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과연 그 섬이 실재하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상인들도 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만 가지고는 아무 일도 도모할 수 없었다. ‘악령이 씌인’ 괴물이 산호초 밑에 매복해서 지나가는 배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들렸다 식인종과 인간사냥꾼에 대한 소문과, 썩은 인간의 머리로 장식한 야자수 오두막집에 산다는 피에 굶주린 야만인들에 대한 얘기도 들려왔다. 악어떼가 강 여울목에 몰래 숨어서 선원들을 잡아먹고, ‘광포한 폭풍과 미친듯 휘몰아치는 돌풍’ 에는 아무리 튼튼한 배라도 견뎌낼 재간이 없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나 돈에 굶주린 유럽 상인들은 이러한 위험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돈에 혈안이 되어 남보다 먼저 육두구 원산지를 찾기를 갈망했다 곧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하는 완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훗날 향료전쟁으로 알려진,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군도 하나를 차지하려는 필사적이고 지루한 소모전이 서서히 그 막을 올리기 시작했다. (1)
얼마 안 가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네덜란드 총독은 스물두 척의 배와 많은 병사들을 런섬으로 보내 대대적인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섬의 흑인들이 헤이스에게 와서 그가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지를 물어본 뒤 , 그렇게 한다면 자신들도 최후 마지막 한사람까지 싸우겠노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헤이스는 자신은 그럴 능력도 그럴 힘도 없다고 답했다" 네덜란드군대는 “아무런 저항없이 섬에 상륙한뒤" “비참한 지경에 놓여 있던 주민들에게” 설교를 퍼부었다 영국인들은 이제 너무 작은 수만 남아 이무 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네덜란드는 분노의 화살을 원주민들에게 돌렸다 “그들은 섬 주민들에게 두 곳의 영국 요새에서 대포를 끌어내리게 한 뒤, 그것들을 바위 위에 내던졌다. 네 대는 산산조각이 났고, 나머지 두 대는 모래 속에 처박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런 뒤, 네덜란드 군대는 원주민들에게 섬의 모든 방어막을 “그들의 손으로 직접 치우라고 명령했다. 결국, 밤이 되기 전에 섬 전체에 걸쳐 세워두었던 벽들은 크든 작든 모두 무너져 한낱 돌무더기로 변해버 렸고, 망자를 위해 세워둔 비석도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제 섬에서 두 층 이상 쌓여진 돌무더기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섬의 방어막을 완전히 거둔 뒤, 네덜란드인들은 섭의 추장들을 모두 감금하고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이 지역에서의 풍습대로, 화분에 육두구나무를 심어 네덜란드에 바치라고” 강요하면서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아직까지 마을에 펄럭이고 있던 세인트조지기를 마지막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은 뒤 섬을 떠났다. 마침내 세인트조지기가 있던 자리에 네덜란드의 깃발이 펄럭였고, 이것은 1,540일에 이르던 포위공격 이 드디어 막을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영국인들도 모욕을 당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쌓아 놓은 요새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네덜란드 지휘관 앞으로 소환되었고, 나이라카섬에 머물러도 좋다는 오만한 통보를 받았다(2).
2. 한국은 일제 강점기 시절 얼마나 新工業 發展이 있었는가?
(a)기업모태
삼성그룹: 삼성그룹 1951년에는 무네이(棟居)양조장과 흥업은행을 불하받음.
한화그룹 :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두산그룹 : 소화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 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 맥주가 되었다.
SK그룹 : 선경직물은 직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동양그룹 : 오노다 시멘트(ja)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하이트맥주(주) :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 하이트맥주(주)로 상호변경.
해태그룹 : 영강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이외 한진해운, 현대, 대한전선그룹, 대성그룹, 신동아, 효성그룹, 동국제강 등 대부분 대기업이 적산불하 받은 기업이다.
(b)일제강점기 근대성장
산업근대화
농업비율 85% → 52%(33% 감소)
공업비율 8% → 26%(18% 증가)
한국인 보유공장
39개(1910년) → 3963개(1938년)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GDP)
연평균 3.6%(1911년~1940년)
1인당 GDP 증가율
연평균 2.3%(1911년~1940년)
경제성장 요인(1911~1940년)
기술진보 36%
기계·설비와 같은 자본 투입 44%
초등학교 취학율
1925년 12.2% → 1940년 33.8%
조선인 노동자수
1930년 200,000명 → 1941년 77만41년 770,000명
조선인 기업(회사)
1921년 124개 → 1931년 781개 → 1935년 1243개 → 1939년 3137개
1938년 조선인 공장 수는 3963개로 일본인 공장 수(2627개)보다 1300여개나 더 많았다.
도시화율
1789년부터 1920년까지 정체. 1920년부터 30년까지 도시인구 폭증.
일본이 주도한 근대화였지만, 일본인이 독차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인도 그로부터 자극과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다.(3)
(결론)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로 직접적인 연관성 보다는 간접적인 영향력을 상정한다. 왜냐하면 식민지기 물적유산의 거의 대부분이 해방 이후 귀속재산불하로 가치가 하락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도 한국전쟁으로 상당수가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의 물적유산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 근거는 '맥아더 사령부'가 한국 · 타이완 · 중국 등에 남아 있는 일본인 재산을 조사해 1948년 펴낸 통계다. 여기에 따르면 해방 뒤 한국에 남은 재산은 북한의 25% 수준이었다. 질적인 차이는 더 심했는데 주요 시설이 북한에 있었고 남한은 조선총독부가 서울에 있는 덕을 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마저도 한국전쟁으로 최소 반 이상이 파괴됐다. 1960년대 경제개발기 한국에 남아 있던 일제의 물적 자산은 원래의 10분의 1 수준도 채 안 되었다. 여기에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원조로 연명했다는 사실까지 보태보면 일제 유산의 영향이라는 것은 극히 미미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에 남은 일제의 물적유산들 마저도 이후 소련군의 설비 반출 등 약탈과 한국전쟁 등으로 거의 대부분 소실된 것을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일제가 한반도에 남긴 물적유산들이 근대화에 기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평가해야 옳을 것이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설비 반출 같은 물적 약탈은 매우 심각했는데, 1945년 12월 소련 외무부 극동 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에 그 같은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보고서는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붉은 군대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고 또 붉은 군대의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한 것이므로 전리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소련은 북한 주민들의 생필품까지 모두 공출해갔다. 1947년 미국의 앨버트 웨드마이어 육군 중장이 대통령 특사로 방한했을 때 북한에서 넘어와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주당 인사들이 전달한 ‘북조선실정에 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말까지 소련이 북한으로부터 빼앗아간 물품은 7억∼8억달러에 이르며, 거기에는 쌀 250만섬, 소 15만마리, 돼지 5만마리 외에 북한주민들의 은행예금 까지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거기다 이 보고서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3대, 원산 석유회사 및 청진 제철공장과 제련소의 모든 기계, 함흥 화학회사의 6만kW짜리 변압기도 소련이 가져갔다고 적고 있다. 실제 수풍발전소 발전설비 철거는 미-소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는데, 1945년 11월 미국이 항의각서를 전달하자 소련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수풍발전소에 남아 있던 일본인 기술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제3, 4, 5호기가 철거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출처 당시 소련군이 자행한 북한 지역에서의 산업분야 물자 및 산업시설에 대한 약탈 목록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북한 또한 일제의 물적 유산들을 통한 근대화 덕은 거의 못 봤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그래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로 물적유산보다는 제도적인 유산 특히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정착하는 시기가 일제시대였음을 지적한다. 예컨데 제도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 등을 통하여 사유재산권 등이 확보되고, 부동산 등기제도가 정착한점이나 사유재산권의 성립으로 문중과 가문에 의거한 양반 향교와 문중, 종중의 재산을 분열시켜 신분제 해체를 가속화한 점, 금융권과 은행이 설치되고 근대적 회사와 공장이 등장하게 된 점등이 이후 해방이후 경제성장을 하는데에 경험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등을 지적한다. 그 밖에 식민지기간에 형성된 인적자원들이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쳤음을 언급한다. (4)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열대 자원을 바탕으로 19세기 이래 네델란드에 의해 농업개발이 주로 이루어졌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열대의 보고>로서의 가치를 가장 현져하게 나타난 나라이다. 이 나라의 농업은 이른바 에스테이트에 의해서 수출을 위한것과 원주민의 식량자급을 위한 것 두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중략-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지하자원의 혜택을 입고 있다.특히 석유는 민간자본에 의한 석유회사를 통합하여 68년에 설립된 국영석유회사인 플루타미나와 아메리카를 필두로하는 외국석유회사에 의해 급속히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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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로전쟁, 가일스 밀턴 저, 손원재 역, 생각의 나무 간행, 2002.12월 간행,14-15 쪽.
(2) 향로전쟁, 가일스 밀턴 저, 손원재 역, 생각의 나무 간행, 2002.12월 간행, 444-445쪽.
(3)위키백과.2019.3
https://ko.wikipedia.org/wiki/%EC%8B%9D%EB%AF%BC%EC%A7%80_%EA%B7%BC%EB%8C%80%ED%99%94%EB%A1%A0
(4)나무위키 .2019.3
https://namu.wiki/w/%EC%8B%9D%EB%AF%BC%EC%A7%80%20%EA%B7%BC%EB%8C%80%ED%99%94%EB%A1%A0
(5)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두산동아,23권, 387-392쪽, 1989년 5월 9판발행.
본 글은 대만 신북시 김서용 의원의 요청에 의해 제작된 것입니다. 또한 編輯者는 일본에게서 아무런 이익을(금전적.이권적등등) 받은적이 결코 없음을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