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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군이라는 것은 당서의 거짓말일 수 있다.
게시물ID : history_299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1
조회수 : 11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3 18:50:46
이 글은 매우 길다. 귀찮으면 요약만 보자.

당서의 수준이라는게 당나라가 고구려에게 쳐 발리는 순간에 대해서도 우리 대왕님 잘 싸우셨슴 요 정도 수준의 김씨집안찬양같은 수준이나 해대는 수준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됨.

당나라는 애초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모두 전쟁을 한 한민족에게는 희대의 왕조였고, 그들의 기술을 김부식도 인용했지만 김부식조차도 너무 편향되어 있다고 불평했을 정도였음.

그런데, 유라시아사 전체를 조감해보면 애초에 당나라 이전부터 선비투르크들과 한민족이나 여진족등의 동이들은 완전히 수틀린 관계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큼.

유럽인들과 아랍인들의 역사기술에 따르면 실크로드를 연 것은 파르티아를 연 스키타이계 파르니족임.

정작 중국쪽에서는 한무제때에 실크로드의 개척에 카운터파트가 된 세력들을 흉노라고 했으므로, 스키타이=흉노임을 알 수 있음. 중국쪽의 기사들이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보는 시각에서는 대체로 우물 안 개구리들의 것이긴 하지만 스키타이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을 Hun이라고 부른 것도 팩트였다고 보인다. 왜냐면 현대에 정작 Hun들의 나라라는 뜻의 Hungary가 남아있기 때문임.

헝가리인들인 마자르족들은 고대 그리스로부터는 스키타이들의 스트롱홀드로 묘사되었던 크림반도와 현대의 우크라이나에서 발원한 집단이 서진했던 것이 확실하고, 반대로 동쪽의 스키타이들은 파르티아를 건국하고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것임. 따라서 로마-파르티아제국-한제국으로 이어지는 고대의 교역라인이 성립되었고, 한무제와 그들의 후손들에게 강력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다 줬던 것임.

그런데, 애초에 로마와 파르티아제국은 공통적으로 지중해에서 오늘날의 시리아와 이라크지역에서 무단으로 지배하던 지배자들인 헬레니즘 세력들을 축출하고, 동지중해와 중근동과 소아시아와 알렉산드로스1세라는 놈이 마눌을 맞아들였다는 박트리아일대에 질서를 가져다줬다는 점이 중요함.

애초에 파르티아라는 것도 알렉산더의 똘마니 제장들을 의미하는 디아도코이 중의 하나였던 셀레우코스라는 놈이 세운 나라를 갈아엎고 세운 나라였었고, 로마제국이 디아도코이들이 세운 나라들을 박살내는 과정을 고려하면 적잖은 전쟁이 수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파르티아의 건국세력들은 스키타이인들을 가우가멜라전투에서 다리우스진영으로써 참전도 했다고 하니까 현지인들의 저항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유럽쪽의 기록을 따르면 헬레니즘 왕조들은 당나라의 절도사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군벌들이 갈라먹은 체제로써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그 것은 위해서 복속시키는 아주 골때리는 체제였음.
절도사들이 물론 외세들과도 충돌했지만 또한 지덜끼리도 전쟁질을 했듯이, 헬레니즘군주들도 어지간하게도 끊임없이 군사를 일으켜서는 전쟁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권력을 전제화하고, 지배성분들이 정렬되는 그러한 짓을 하고 있었던 그야말로 용병대장 필리포스의 하수인 새끼덜이 만든 정권다운 그런 것이 헬레니즘 군주들이었음.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조 하나만이 400년 정도 집권하는 동안 무려 10만명대의 대군이 동원되는 전쟁을 무려 58차례나 벌였다고 한다. 그 것도 너무 뻔한 레파토리인 같은 헬레니즘 군벌국가인 폰투스나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나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말이다.

아마도 백성들은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성경에서 거듭 언급되는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저주의 대상인 바빌론이라는 것은 알렉산더제국의 수도였던 바빌로니아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따라서 로마제국이 그 모든 헬레니즘 군벌국가들을 박살내었을 때에 유다속주를 비롯한 그들의 점령지 주민들은 로마제국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무려 로마가 지배하는 외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것으로 유대인들 지식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반란이라는 것조차도 실지로는 아마도 헬레니즘 세력들의 잔당들인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친일파와 같은 헬라상인들을 학살하는 짓을 저지른 다음에 제비뽑기를 해서 유대인 대표자들이 농성을 해서 올라가서는 로마인 총독을 비롯한 로마지배자들에게 총대메고 죽기를 자처했다고 한다.
성경에 따르면 셀레우코스조는 전통적으로 안티오크와 유다지역의 부르주아들이던 유대인을 교역과 무역에서 배제하고, 아마도 그들에게 교역수입의 상당액을 공납하는 일종의 시전상인들과 같은 나라가 지정하는 상인들이 되는 것으로 인정받는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은 사사롭게 교역하는 것을 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스템이 지구 반대편에서 금난전권이라는 것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고려조로부터는 끝내는 투르크계 중국인들이 지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데, 그에 따라서 고려조의 통치체제는 당의 3성6부를 본뜬 2성6부가 되었다.
게다가 왕건이라는 놈도 중국의 투르크계 군벌들에게서 명백하게 보이는 왕씨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다.

예성강일대는 오늘날 중국불법조업어선이 존나게 나타나는 서해5도의 황금어장과 연결된 지역이다.
그러므로 예성강 일대의 왕씨라는 것은 당시에 5대 10국의 혼란기를 피해서 그리고, 어업과 교역상의 이점을 누리려고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계였을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고려조는 해군력이 돌출적이었고, 후백제를 이기는 것도 해군을 이용해서 이겼던 것이다. 그 외에도 고려조와 결부된 것이 왕실이 장악한 염전과 그들 해상세력들만이 합법적으로 장악한 조운을 통한 미곡의 운반등인 것이다.

그러한 그들은 정작 국내에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 것이 조선조에도 금난전권으로 정책화되는데, 그 것은 본질적으로 교역과 유통을 고려계 해상세력들과 정권의 공신들이 전적으로 장악하는 제도이다.

조선이 교역에서 쇠퇴하는 것은 쇄국정책도 원인이지만 고려조때부터 기인한 정권이 금난전권따위를 통해서 관상들만이 교역하거나 유통에 뛰어들 수있고, 그 것에 카운터파트가 되는 고려계 해상세력인 뱃놈들이 물류를 장악하는 형태로 된 독점적인 부분에서도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것에 의하면 현지인들이 사사롭게 그 교역에 뛰어들 수 없었기 때문에 교역과 유통과 탐험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자체가 억압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정책자체가 역사적으로 헬레니즘-투르크계 지배계급과 정렬된다고 할 때에 소싯적의 헬레니즘 군주들 밑에서 유대인들이 느꼈던 당혹감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이야 그래도 농업이 주가 된 농경민족이지만 유대인들은 페니키아때부터 교역으로 먹고 살던 민족이니 헬레니즘 군주들 밑에서는 되는게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하던 것이 로마가 유대속주와 시리아속주를 파르티아는 유프라테스 동안에서 트란스옥시아나와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구간들을 통제하게 되었을 때에 당시의 중근동 세계는 급격하게 자유무역화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한무제의 군대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교역로를 한반도가지 연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의 비문에 따르면 신라왕실은 그러한 교역로상에서 주류이던 스키타이-흉노계가 한반도까지 와서는 지배계급으로 자리잡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양식 또한 스키타이식인 것이다.

반면에 스키타이와 파르티아의 철천지 원수이자 실크로드 무역에서도 악의적으로 훼방놓는 세력인 헬레니즘 워로드들이 그레코-박트리아왕조를 세워서는 여전히 인도북부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잔존하고 있었는데, 대승불교 불교예술에서 드러나는 경향이기도 한 동방 헬레니즘문화를 고려하면 그들이 정작 한제국 이후에 중국까지 지배해서는 대승불교를 퍼뜨렸음을 알 수 있다. 그 것이 바로 선비족과 돌궐인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역시도 본래는 오늘날의 태국불교와 같은 계율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고려조에는 급격하게 위경인 범망경의 체계로 된 종단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 것이 바로 내가 고려조는 선비투르크계 외세라고 하는 이유이다.

불교신문의 기사인
http://www.kbulgy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06
으로부터,

내가 접한 태국불교는 계율불교(戒律佛敎)였다. 처음엔 적응하기가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 일과가 완전히 《율장(律藏)》대로인 태국불교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중략)

한국불교의 비구(비구니)승가는 인도의 원형불교의 한 부파였던 담마굽타카(법장부)의 근본율장에 연원하면서도 스스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범망경》에 의지함으로써 본분과 뿌리를 져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음은 정말 안타가운 일이다.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


이러한 이게 결론이다. 그리고 기사전부를 읽어보면 확실히 신라의 계율불교는 범망경에 근간하는 대승불교가 아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한국불교는 신라시대에는 담마굽타가의 근본율장에 연원하는 태국과도 같은 계율교였지만, 고려조때에는 범망경에 의거하는 대승불교 교단이 왕실의 비호아래에 자리잡았다.

그와 함께 독일인인 마르티나 도이힐러가 연구한 한국의 명문 집안들의 역사를 정리하려고 한 시도에 따라서 그녀가 내린 결론 중에 하나는 아마도 고려조와 조선조내에서 자자손손 천인이 되는 천형을 부과받은 자들은 정작 신라와 백제의 지배계급으로써 고려조에 저항하던 자들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즉, 고려조새끼덜이 애초에 곡해한 역사는 그 것들은 본디 외세로써 일본인들의 지배가 36년만에 끝난 것과는 다르게 그보다 훨씬 오래 집권하면서 한민족 코스프레를 해댔던 놈들이고, 그에 따라서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구원하러 당시에 경상도지역으로 난입하던 고려새끼덜을 상주와 안동에서 막아섰지만 중과부적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즉, 후삼국론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백제와 신라의 한민족들을 이간하는 외세의 사관으로써 제시된 것이다. 

통설과는 다르게 후백제와 신라는 같은 편이었고, 고려만이 외세로써 한민족을 정복하러 온 집단이었다. 그리고, 참전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던 경순왕을 견훤이 좀 갈구고 나서는 2차 상주전투에서는 신라군들도 적극적으로 백제군과 함께 싸웠다고 하니까 견훤이 경순왕에게서 실제로 얻어낸 것은 신라군도 함께 부릴 지휘권이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견훤이 신라궁에 난입해서 면전에서 쌍욕을 할 정도였다는데도 경순왕의 목아지가 붙어있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후삼국이 진실이라면 견훤이 신라궁에 난입해서 경순왕한테 모욕적인 짓만 했겠냐는 것이다. 되려 경순왕의 목이 효시되고, 견훤이 내가 신라왕이라고 선언하던가 아니면 경순왕에게 양위를 받는게 자명한 프로세스가 아니냐 그러한 점에서 명백하게 고려새끼덜이 사서전반의 기조를 기만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반적인 부분을 살피자면 신라가 당과 야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쓰러뜨렸다는 것 조차도 후대의 투르크계 지배계급이 그들의 지배사를 고대로 연장하려고 한 시도일 가능성이 높다.


상기했듯이 스키타이-흉노와 선비-돌궐은 애초에 발흥과정에서부터 철천지 원수였는데, 선비-돌궐계들이 중국을 지배하고서는 더욱 동쪽으로 진출하려고 보니까 한사군 때부터 스티타이-흉노계와 교역을 하던 집단들의 잔존세력들이 남아있어서 충돌하게 된 것이다. 그 것이 바로 고구려-백제-신라이고, 애초에 남조와 고구려-백제-신라 모두가 돌궐-선비계들이 박살낸 한제국의 잔당세력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고, 남조에 후경이라는 놈이 난입한 기사를 참고하자면 선비-돌궐놈들은 그냥 닥치고 백제로 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당서에 의하면 그 것에 대해서 신라가 쓴 표준적인 대책은 같은 동이인 고구려인들이 서남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해서 당나라놈들이 정착촌을 형성하는 것을 훼방을 놨다고 한다. 그러자 나당전쟁이 터졌다는 것이다.


요약.

1)기원후 10세기 경에 한민족은 선비-돌궐계들에게 정복당하였다. 그 것이 바로 고려조이고, 왕건이라는 놈이다. 그런데, 당시에 남조의 진패선을 굴묘편시했다고 하는 수나라의 관리였다는 왕반이라는 놈이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왕기, 왕수, 왕항 이런 놈들이 있는데, 하여간 투르크계 군사집단에 왕씨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2)그러한 투르크계 왕조에 의해서 신라가 정작 선비족 지배계급을 반도로 끌어들인 것으로 근본이 조작되었다. 그러한 논거자체가 아마도 조작일 것이다.

3)그러나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지배계급들은 그 선비족들과 투쟁했던 자들은 모조리 천민으로 격하되면서 기록말살을 당하였고, 신라지배계급들과 그들은 철천지 원수이므로 신라가 당의 군대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조차도 희박한 편이다.

4)정작 선비족들에 저항하는 남조와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의 외교관계는 확인되는 편이다.

5)종교면에서 한국의 불교는 태국의 불교와 같은 계율불교이자 인도의 원형불교의 계맥을 계승하는 남방불교의 교단이 신라불교였는데, 정작 고려조에 이르면 한국의 불교는 부다와 연결되는 지점이 희박한 것으로 간주되는 중국인들이 만든 유사불교라고까지 칭해지는 중국산 경전인 범망경에서 기인하는 대승불교가 주류 종파로 자리잡고 있게 된다.

어쩌면 교종과 선종의 구도로 설명하려고 하는 신라하대의 이념변화조차도 완전히 엉터리이고, 순전히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종단이 바뀌었을 것이다.
적어도 삼국유사에조차 계율이라고 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산문의 화엄종장이라는 것은 아마도 신라에서 동남아로부터 수입한 태국계 계율불교 성전의 잔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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