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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은 잘못없다. 선조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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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DireK
추천 : 2
조회수 : 129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5/04 01:07:51
https://www.youtube.com/watch?v=PN8h22U5Tys

아마도 요따구 개소리나 하는 것들이 겨우 카더라를 그냥 있는 그대로 믿는 기성세대들의 한계일 거다. 이만희가 구원해준다면 믿는 놈들 경북인간들 수준 말이다.

그들은 진정한 팩트확인이나 전후좌우의 정황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는 생각따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지점들 때문에 인간들의 믿을 깨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팩트는 국군 병장정도 나온 놈 한테도 자명한 법이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동영상에서 확실히하게 잘못된 부분은 분명히 조령과 죽령을 조선군이 안 지킨 것은 맞지만 그게 신립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립은 수도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경상도로 가서 경상도군세와 합류하는 명령을 받았던 사령관이다. 해당 지역의 방비자체에 전혀 책임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각 사단들의 경계구역이 죄다 일일히 지정되어 있는데, 조령, 죽령 우리 사단 구역 아닌데 알게 뭐고, 그 향토사단이 못 지켰으면 그 지역 투스타새끼 책임인거다. 그게 신상필벌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립은 요즘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관이 수도방위군에 경기지역의 몇 개 사단들을 이끌고 급조된 군단들을 끌고 남부지방으로 내려간 사령관일 뿐이고, 해당지역의 방비와는 별반 무관한 사람이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경상도군단들과 합류해서는 경상도나 충청도의 지역사령관들 보다는 자신의 지휘권이 우선할 것이라는 확약정도는 제승방략에 의해서 규정대로 가지게 되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신립이 내려갔을 때에 고모산성이나 조령은 이미 왜군에게 먹힌지 오랬였고, 상주의 경상도군세와 합류한다는 설정은 스케쥴상 애초에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헛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여송이가 조령가지고 뭐라뭐라하면서 신립이 왜 여기를 안 지켰냐 그런 개소리말이다. 이여송은 단지 정황상 그랬을 것이라고 카더라를 읊은 것이지 애초에 신립이 그 곳에 닿을 사이즈가 안 나왔다는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그냥 헛소리한 것인데, 그냥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말이다.


지휘권상 신립은 대군을 끌고 일본군과 회전을 벌일 것을 명받은 것과 그에 걸맞는 편제를 가지고 있었지. 애초에 꼴랑 2천명정도나 끌고 가서 조령이나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도 이해를 못하는가 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적합한 당대의 정황에 대한 설명은 상부에서 경상도 군세와 여차저차하면 합류해야 될 상황이라는 그다지 실현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명령에 의해서 정작 기병장교 특기를 가진 신립이나 조선의 기병들의 기동이 심각하게 제약되는 충청도 산만디 일대로 군세가 진입하게 된 상황자체가 문제였고, 그 것은 적합하지 않은 군사명령이 떨어진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네가티브나 하는 놈들은 잣도 모르고 충주가 왜 산만디냐 카는 분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음.

2천명의 기병이 기동하려면 특히 우회기동까지 고려하면 심각하게 넓은 전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는 본질적인 부분을 겨우 반박한다는게 그런 수준인 것이다.

탄금대.jpg

꼴랑 요거가 가지고 말이다. 죄다 산만디이고, 겨우 달천 서쪽에 탄금대일대에 평지랄 것이 있다지만 태반이 논밭인 지형가지고 말이다.

아쟁쿠르에서 논밭으로 된 진창으로 기어들어간 프랑스 기사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면 그런 개소리는 할 수 없을텐데 말이다.

스털링.jpg

참고로 스털링이라는 곳의 지형이다. 요정도는 되야지 개활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코틀랜드는 전반적으로 융기한 곳이고, 정작 하천들이 지나는 곳은 움푹 패여있기 때문에 신생대 융기의 흔적이 뚜렸한 곳이다.
물론 융기한 평지위에서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잉글랜드의 기사들이 마음대로 기동할 수 있다.

물론 하천들은 제법 낮은 평지들보다 낮은 고도에서 흐르지만 그러한 곳은 피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스털링에서 정작 현지 지형을 모르는 기사들은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겉으로 보면 평지지만 실제로는 물이 얕게 흐르는 스코틀랜드의 낮게 흐르는 전형적인 하천들이 조금 덜 발달한 형태의 실개천에 의한 marsh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 것들은 죄다 복개해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본인은 그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함정을 따라서 스코틀랜드군은 스털링성의 앞에서 화약무기가 발달하기 전의 냉병기 보병위주의 진형을 짜고는 회전에 극히 유리한 궁수와 기병들이 많은 잉글랜드군에 대해서 명백하게 불리한 포진을 하는 척 배녹번에서 그들을 바로 그 실개천이 고저차를 이루면서 흐르는 그러나 풀들에 의해서 가려진 지형앞으로 유인하였다.
그 결과는 영국기사들이 개박살나면서 희대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바로 위와 같은 지형에서조차도 말이다.
영국군은 감히 개활지에서 보병방진을 짜고 드는 것을 보고는 기사들에게 풀스케일 차지를 감행했지만 바로 스코틀랜드군을 코앞에서 바로 그 함정에 말발굽이 빠지면서 말이 넘어지면서 일대의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끽해야 인간이 삽으로 임시로 판 농수로만큼도 깊지 않은 실개천 위로는 스코틀랜드 보병들이 난입해서는 잉글랜드 기사들을 마구잡이로 썰어버렸다.


요는 명백하게 개활지로 보이는 곳에서조차도 실제로는 기병기동이 제약될 수 있는 함정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하면 탄금대는 그냥 대놓고 함정인 지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산만디 밖에 없는 충청도지역에서도 소백산맥이 있는 지역으로 간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기병대라는 것을 끌고서는 말이다.

충청도 산만디로 군세를 끌고 간 것 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에 전장을 선택할 옵션이 제약당하면서 결국 망한 것이다. 이게 순서에 맞는 인지라는 것이다.

조령, 죽령은 그 이전에 국방계획차원의 문제이고, 신립 책임이 아니라는 거다.

즉, 조선왕조의 수뇌부들은 진격속도를 고려해야 하는 전략의 상식적인 부분에서 이미 완전히 오판한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책임은 선조의 잘못으로 보인다.

사회 구조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현지 지배권에 관한한 왕의 통치권을 존중한다. 왕은 그의 권력을 제한없이 실행한다. 조정 위원회는 단지 자문 기구에 물과하다. 시나, 마을, 섬을 소유한 봉건 지주는 없다. 부유한 사람은 농장이나 소작을 주고 수입을 얻는다. 그들 중 일부는 2000-3000 소작을 가진 이도 있다. 왕에게서 섬이나 땅을 대부받은 사람도 있으나 죽으면 바로 왕에게 반환된다.


하멜표류기에서 지적하듯이 조선은 왕이 절대자인 오늘날의 북한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체제이다. 그리고 징비록에 의하면 확실하게 선조가 마치 로마원로원이 집정관에게 군사를 맡기듯이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요컨데, 군사를 줄테니 도성의 남부지역 어디에서 왜군이랑 니가 원하는 대로 한판 떠라거나 회전을 벌이라고 명령하는 대신에 애초에 이일의 뒤를 이어서 호응할 군세로 상정되면서 여차저차하면 상주의 경상도군과 합세해서 공동작전을 펴라는 얼토당토 않은 명령을 내렸다.

상황파악을 하지도 않고, 상주군세는 거기 있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상정한 것이다.

그리고, 징비록에 명백하게 묘사되는데 그러한 구체적인 작전명령이 하달되면서 조선시대의 분위기상 왕이 까라면 까야되다는 분위기에 의해서 신립은 명에 받들겠습니다 요 지랄이나 카고는 닥치고 내려갔다. 그렇게 되고 보니까 정작 상황이 완전히 여의치 않았던 것이 탄금대 전투의 직전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이미 미국 지상공격기가 하늘위에서 날라댕기고, 그걸 무시하고 갔다가는 길 위에서 폭격당해서 뒤지는데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닥치고 개성으로 가서 구원하면서 개성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자 북한의 한 군단장이 폭격으로 뚜까맞으면서도 닥치고 가긴 갔는데, 이미 해당일대에는 한미연합군의 항공전력과 정찰자산이 쫙 깔려있고, 조선시대라면 24시간 거리인 현대에는 3시간 거리에서는 국군 기보사단이 개성을 쳐 먹으러 올라오고 있는데, 노동적위대로 구성된 예비급 사단까지 포함된 2선급 병력을 포함한 병력가지고 지금 개성으로 입성하라는 그 지랄이나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충성이 강조되는 나라에서 상황에 맞는 지휘자체는 인정되지 않고, 잔존병력을 가지고 평산이나 사리원으로 퇴각해서 일전을 도모하려고 하면 정치장교에게 자아비판이나 당해서 숙청당할 처지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 신립이 처한 그 모든 상황의 전후좌우인 것이다.


신립이 그나마 자신의 기병주특기와 그가 데려온 동고동락해온 기병대들 최대한 이용해서 왜군과의 kill ratio를 3.5:1이나 그 이상의 전과를 내어서 대량타개하는 상황만이 주어져있다면 신립은 애초에 충청도로 가지 않았어야 한다.
적어도 서양전술가들이 기록하기에는 기병은 보병에 대해서 3.5배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므로 난전으로 몰아가서 마장마술에 의한 근접살상을 펼치건, 혹은 치사를 이용한 스커미싱을 시도하건 3.5배의 kill ratio를 강용해야지 적어도 밥값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딱히 지형을 전혀 모르는 지역으로 공세를 펼쳤다면 모를까나 신립이 택해야될 전장은 용인시의 북부나 서부의 용인-수원 라인이나 용인-성남라인에서 회전을 펼쳐야지 겨우 그의 군대의 전투력이 발휘될 수 있었다고 가정하고, 충청도로의 진입 자체를 작전 실패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와 유성룡이 되려 엉터리 명령을 내렸고, 재량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신립의 군대에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요컨데, 후대의 문돌이인 다산따위가 강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신립을 일으켜서 얘기나 좀 해봤으면 이러한 것들은 그냥 평할 가치도 없는 꼰대짓이라는 것이고, 그 꼰대짓의 답습이 겨우 기성세대들이나 뭐 유투브에서 뭐 좀 한다는 놈들의 참견질이다.

정작 신립이 그 곳에 갔을 때에 조령과 죽령을 지키는 방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징비록에 의하면 왕의 유성룡을 포함한 왕의 자문집단으로부터 군령이 발호되자 신립이 상으로부터 명을 받았다는 식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립은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거나, 비록 왜적에게 조총이 있다지만 어찌 쏠 때마다 다 맞겠냐 요 지랄은 유성룡이야말로 진심으로 개꼰대였다고 본인은 평가한다.

당시의 군사기술상 폴란드의 후사르나 프랑스의 용기병의 시대까지 총과 포가 왔다갔다하는 전장에서 기병이 기동해야 했던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30년 전쟁당시에 틸리나는 놈 밑에서 제국중장까지 출세하였다는 기병출신 장군이나 폴란드의 카지미에슈가문의 고급장교들이 총 무서워서 말 못 타겠다고 하면 되려 엄청난 병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신립의 호언장담은 그 직업이 가진 역할론상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인데, 그걸 겨우 비판꺼리고 삼았다는 것에서 유성룡이라는 놈이야 말로 엄청나게 졸렬한 꼰대놈이라고 보여진다.

뭐 현대에도 그렇잖아. 영업하면 말 잘해야 되고, 생산직하면 일 잘해야지. 연구직쪽이면 전문성이나 제품 스펙은 줄줄 외워야 되고. 같이 술잔을 기울여도 제품 스펙 야그나 하면 역시나 연구직답다 이렇게 생각하잖아.


아마도 한국의 기성세대들의 입장에서는 신립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나보다. 그러한 지점에서 오늘 날의 열린 사회의 관점으로 볼 때에 정작 신립을 깐답시고 한 것들이 정작 꼰대같은 놈들이라고 본다면 정작 사료비판이 된다고 보여진다.

한마디로 그 놈들은 신립에게 그가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할 수 있는 전장선택권이나 전권을 주지도 않아놓고는 후일에 뒤담화만 존나게 깠다는 것이다.
30년전쟁이나 폴란드-오스만 전쟁의 전사를 고려하면 폴란드의 기병대 역시도 대포를 쏠 수 있는 보병이 존재할 때에 기병의 최대위력이 발휘되었다.
폴란드 그래서 전사를 보면 단지 3천명도 되지 않는 화기를 운용하는 보병대와의 합류 이후에나 기병들이 공세를 나서는 지점들이 묘사되곤 한다.

살상력보다는 소음과 작약을 유발하는 방포따위나 쏴서는 교란시킨 다음에 기병들이 치고 들어가는 전술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조선이 똑바로 돌아갔다면 존재했어야 될 군기창의 화약무기들은 신립이 가지고 가지도 않은 것으로 보이고, 아마도 선조당시에는 준비를 안 했거나 혹은 충청도 산만디에 끌고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무기라서 포기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후자라면 더더욱 그따위 명령은 누가 내렸는가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의 수천 기병은 단월역에 주둔하고 상주에서 패전한 이일을 만나게된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에게 새재의 높은 언덕에서 궁병으로 왜군을 상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신립은 충주의 넓은 달천 평야로 가서 궁기병을 이용하는 평야전을 펼치자고 했다.[8][9]

여기서 누가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이일만이 진실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일은 전혀 석연찮은 죄목으로 조선조의 꼰대들에게 탄핵당해서 사형당함으로써 교살당하였다.

바로 유성룡을 포함한 신료집단 것들에게 말이다.

비교적 조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기록한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판결 행정

왕에게 중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매우 엄한 처벌을 받는다. 죄수와 관련된 모든 흔적도 사라지게 된다. 집은 물론 집터까지 없애고 그 곳에 다른 집을 짓는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가 거느리던 하인들과 모든 재산도 몰수된다. 압수된 물건들은 나라의 선량한 사람이나 공적이 있는 백성들에게 배분된다.

오늘날의 북한왕조마냥 조선조에 정권에 대해서 불충하는 무리로 몰리면 흔적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일이 처했던 상황이 그러한 것이다. 다만 왕이 이일의 죄를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지어줘서 이일만 죽었는지. 일가족 전부가 죄다 박살이 났는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어쨌던, 이일이 처형되는 상황자체가 이일이 가졌던 논거나 생애나 기록자체를 말살시키는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나마 언급이 되어서 잔존하고 있는 부분들이 그나마 이일이 수도권으로 물러나서 넓은 지역으로 물러나서 싸우자고 하지 않았냐고 하는 것이다.

왕이나 그를 대신한 사람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사람은 엄하게 벌을 받는다. 한 왕의 동생의 아내가 옷을 만드는데 소질이 있어서 왕이 자신을 위해 옷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사실 그녀는 왕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옷의 안감에 부정을 타는 풀을 기워 넣었는데 이로 인해 왕은 그 옷을 입었을때 매우 불편해하고 안정을 찾을수 없었다. 왕은 옷을 검사했고 옷의 솔기를 풀어서 악의가 담긴 풀이 발견되었다. 매우 노한 왕은 바닥이 구리로 된 방안에 그녀를 집어넣고 불을 지펴서 천천히 데어 결국 죽었다. 
조정에서 매우 존경받고 그녀를 잘 아는 고문관이 이 문제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특히 그같은 유망한 위치에 있는 여자를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그 고관은 포박되어 곤장 120대를 맞고 단두(斷頭)되었다. 그의 재산과 하인들은 모두 몰수되었다. 이같은 잘못은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개인적인 잘못으로 여겨진다. 이런 반역죄의 경우 죄인의 가족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에서 보듯이 가족들이 처벌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왕이나 그를 대신한 사람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일의 행적자체가 부인되는 것에 대해서 가족들이 운좋게 연좌되지 않앗다면 목숨 부지한 것이나 감사한 줄이나 알아야지 토를 달았다가는 그냥 큰일나는 것이다.


외국전사를 참고하자면 신립이 애초에 아예 내려가지 않았으면 버는 며칠동안에 해럴드가 그의 스탬퍼드브리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위해서 진격하던 도중에 군세를 조금 더 모은 일이나 거꾸로 헤이스팅스를 앞두고는 결정적인 실수였던 밀리샤들을 해체했던 것과 같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허비되었다.

즉 애초에 수원-용인라인에서나 자리잡고, 징병을 하였다면 생각보다 상당한 보병병력들을 모을 수도 있고, 도성의 화약무기도 배치시킬 수 있는 시간이 벌릴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https://leekihwan.khan.kr/entry/%ED%8C%A8%EC%9E%A5-%EC%8B%A0%EB%A6%BD%EC%9D%84-%EC%9C%84%ED%95%9C-%EB%B3%80%EB%AA%85

에서도 말하지만 송시열이 애초에 똑바로 지적했다고 본다.

장수와 재상이 서로 맞지 않고서 성공을 이루었던 적은 예부터 없었습니다. 즉, 애초에 원흉은 선조와 그의 자문기관인 재상들, 즉 선조와 유성룡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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