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이러한 표현들은 거의 신라어가 교역어로 쓰이던 환경에서 쓰였던 단어이기 때문에 현대 한국인도 거의 알아들을 수 있음.
부여=부리야트=동시베리아 거주의 몽골계를 부리야트라고 함.
읍루=아이누=훗카이도와 사할린의 일본계 원주민
숙신=축치인=축치캄차카인으로 현대에는 이해됨. 현대에는 캄차카가 더 붙었음.
옥저=오록 혹은 오로치=북퉁구스계열의 이민족
조선=주르첸=여진과 같은 뜻. 여진을 Jurchen이라고도 함.
위에서 말하듯이 만주어로는 쥬션으로, 중국어로는 누젠으로 발음됨. 여진은 누젠의 음차임. 그래서 조선과 여진은 같은 뜻인 것임.
이성계의 경우에 10년만 젊었으면 조선따위 갈아버릴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주원장이라는 놈이 너는 한국놈이 아니라 여진놈이라는 대단히 비하적인 뜻으로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했는데, 그 것 가지고 명으로부터 공인받은 나라라고 내부적으로는 캤던 것이 조선왕조였음.
발해=발흐=파르티아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발해지배계급은 정작 투르크계열이라는 지점을 이해해야지 이러한 국명이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들에게 발해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를 멸한 뒤에 다스리게 된 오랑캐지역인 것이다. 그들 고구려인들이 고조선 때부터 스키타이인들과 교역하던 문화가 역력한 것으로부터 소수의 투르크계 지배계급이 지칭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나아가서 신라의 문무왕릉인 대왕암에도 신라왕족은 파르티아 스키타이계인 흉노의 후예라고 돌에다가 새겨서 박아놓은 수준이었다.
그룬=구려=그룬은 여진어로는 국가를 의미한다. 체제의 의미까지 동일한 뜻으로 몽골어 울루스가 대칭된다. 구려와 그룬은 같은 단어로 보인다. 다만 초기에 신라 이사금과 광개토대왕의 우호적인 관계에 근거해서 려자를 수려할 려자로 이두표현내에서 격칭을 붙인 것이 아닌가 간주된다. 연개소문이 언급하듯이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본디는 아주 좋았는데,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함으로써 관계가 나빠진 것이었다.
즉, 고구려는 고그룬으로 고씨들의 나라라는 뜻이 된다.
대청제국의 Daiching 이 Daicing Gurun과 음역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채택되듯이 작명센스라는 것은 애초에 시적인 것이다. 음운과 의미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룬이라는 단어는 금대와 청대에 모두 등장한 너무 뻔한 부분이다.
고우리, 구리, 고려 등등=여진어 그룬의 뜻이 전혀 함의되어 있지 않은 5대 10국시대에 한반도로 난입한 중국계 해상세력들이 뜻도 모르고 그냥 참칭한 것.
즉, 중세에 한반도세력인 고려는 오랑캐 왕조이다.
야율=이리=유리=연(고려 지배계급인 당나라놈들의 짧은 발음.)
연개소문=이리카스미=윤이가순미(=신라식 한국어표기)=야율이가순미와 야율카스미 중간정도 발음이었을 거라고 본다.
따라서 야율씨들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동북3성인들의 민족적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전후관계까지 말하자면 야율덕광이라는 놈은 중화투르크놈들의 거점이던 카이펑까지 947년에 점령함으로써 고구려도 하지 못했던 그 이상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전후관계를 면밀하게 따져보면 고구려가 존재하던 때부터 사이가 나쁘던 중화와 동이간의 전쟁이 야율덕광이 허난성의 정저우와 카이펑일대까지 진격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놈들은 그들이 가해자였던 역사를 모두 곡해하고는 단지 오랑캐의 침략정도로 기술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매너리즘까지 소중화로 자처했던 한국기성세대 사가들이 답습한 것이다.
즉, 실제로는 고구려의 주류인종집단이 나라를 되찾은 뒤에 중국으로 쳐 들어간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한 무브먼트에 의해서 요와 금이 중국전체를 지배하는 체제까지 수렴하였고, 오늘날의 북경체제의 탄생의 원인이 되었다.
한국 기성세대 사가들의 아전인수, 우물 안 개구리식 설명과는 다르게 고구려인들은 끝내는 중국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되려 중국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딜레마에 봉착하였다. 적어도 947년에는 야율덕광을 따르던 부하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성화에 못 이겨서 연운 16주일대로 군세를 다시 물렸고, 오늘날의 북경이 된 지역일대에 요나라인들은 정착하였다. 이 시대, 요나라때까지는 고구려인들의 국가가 중국국가와 별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금나라 이후에는 급격하게 중화화 될 것이다.
동북공정이라고만 한국인들은 여기지만 되려 고구려만큼은 북경인들도 자기들 역사라고 주장할 근거는 있는 것이다. 되려 삼한과 고구려의 이질적인 부분이 한민족과 주르첸들의 경계에 해당된다.
요컨데, 삼국론이라는 것은 고려지배왕조의 오랑캐 전제주의 세력들이 그들을 이방인왕조로 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밑밥을 깐 것이고, 실제로는 삼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한이라는 것은 신라, 백제, 가야로만 귀결되었고, 신라, 백제, 가야만이 한민족 문명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를 축소지향적인 왕조로 비하하는 것도 모조리 일제세력들의 프레임이고, 되려 연개소문의 말이랍시고 남아있듯이(=진위여부는 모름. 단지 정황적인 것의 당시 지식인들의 연개소문의 입을 빌린 형태의 기술일 수 있음. 뭐 일종의 카더라.) 신라는 정주문명의 생산력과 쪽수를 앞세워서 진흥왕대부터는 고구려지역들을 엄청 후려간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이라는 엉터리 이론과 다르게 실제로는 신라국의 노던 프론티어지역에 대한 정복과 점유가 함경도의 일부지역과 강원도와 경기도북부 지역등이 한국문명으로 현대에 넘어오게 된 원인이다.
그리고, 강동6주를 한민족국가에 넘겨준 것도 정작 주르첸들이고, 백두산정계비를 통해서 한민족국가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한정지으려고 한 것도 주르첸 혹은 여진족으로 불리던 만주족들이다.
한국의 국뽕 사가들은 어떻게 설명하던간에 한민족은 고대초기의 판세에 비해서 북쪽으로 영토를 엄청 넓혔고, 입장을 바꿔보면 되려 여진족들이 압록강와 두만강 이남으로 한민족의 영토를 제약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북공정조차도 실상은 중국인들의 신경질적이고, 수세적인 입장이 반영되어 있지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이 한반도를 접수하기 위해서 밑밥 깐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지금도 북한인들이 자꾸만 동북3성으로 넘어와서 중국은 골치아프다고 하는 판이고, 한국과 중국이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면 중국이 느낄 프레셔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것은 요금대 이래에 지속되어온 북경체제에서 중국의 정치적 중심이 옮겨가게 될지도 모르는 수준의 안보리스크를 중국의 현정권에 강요하는 것이다.
애초에 왜 고구려는 현대적 역사기법을 표방한 세력들에 의해서 한민족 역사로 조선왕조의 관점이 답습되었나.
고그룬이라고 하면 완전히 여진족 느낌이 확 나버리면서 이건 우리나라가 아니다라고 했을텐데 말이다. 가장 기본적인 mothod만 취합해보더라도 이렇게 뻔한 것을 말이다.
그 것은 당시에 현대적 역사기법을 표방한 세력들이 친일파였던 것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지배이념에 의하면 조선식민지와 만주국과 일본본국은 모두 한국가로써 내선일체에 의해서 만주국도 한민족들에게 우리나라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물론 만주국이라는 것은 일본놈들이 만주사변이라는 아주 파렴치한 뻔뻔한 짓을 통해서 중국인 장작림을 폭사시키고, 그의 아들인 장학량과 그의 세력들은 만주에서 군사력으로 축출해버리고 세운 괴뢰국이고, 당시에 국제 연맹으로부터 규탄받았지만 정작 일본은 국제 연맹을 전격 탈퇴, 2차 대전의 발발 원인이 되었던 만주사변이라는 것으로부터 세워진 나라이다.
만주사변 직후부터 중국과 일본은 전시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한민족들에게 우리 나라로 여기게 하는 것은 전쟁프로파간다도 겸하는 것이다.
뭐 알랑가 모르겠는데, 2차세계대전은 히틀러가 폴란드에 선전포고해서 발발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역사가들이 중일전쟁을 그 시발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중일전쟁 이전에 이미 만주사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애초에 2차세계대전은 일본이 일으킨 것이다.
그러한 일제와 친일파들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는 역사적 관점인 바로 중국의 만주 혹은 동북3성이라고 불리던 땅에 존재했던 고구려왕조를 한국인들의 역사로 여기도록 엉터리로 엮어내었다.
요컨데, 고구려=만주국이고, 가야, 신라, 백제만 조선이다라고 하면, 당시에 일본의 전쟁수행에 별반 도웅미 되지 않는 한반도 고립주의가 되어버리니까, 만주지역에 대한 내선일체를 강조하려고 고구려도 끼워넣은 것이다.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실제로는 금나라 때에 행해진 거란족과 여진족의 결합운동이었던 남혼여빙의 인지라고 보여진다.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30]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31]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그런데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인 광개토왕릉비나 『위서(魏書)』에는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원래 북부여의 시조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5세기경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한 뒤 부여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결합,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는 정작 광개토대왕릉비나 위서에서조차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유화는 고구려의 왕실집안인 계루부를 뜻하고, 해모수는 여진인일 것이다.
계루=거란이라고 보이므로 역시나 거란인이 고구려지배세력이 맞다. 즉, 고구려 지배세력이 발해를 축출하고, 카이펑까지 쳐 들어간 뒤에 요나라를 건국했지만 또다른 서던 퉁구스카들인 여진족들에게 정권을 뺐겨서 금이 성립한 것이다.
초기 고구려는 5개의 부가 연맹하여 성립되었는데, 처음에는 소노부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그뒤 계루부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왕실을 구성하였다. '계루'는 고구려에서 성을 뜻하는 말인 '구루'와 음이 통하여, 계루부는 곧 도읍 성을 차지한 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말하지만 구루는 성이 아니라 나라지. 아마도 도읍지의 지배성분이 곧 나라의 지배세력이 되는 통경의식이 고구려인들에게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계루부는 조선왕조로 치면 인서울북촌인들의 경화사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지방놈들은 소노, 절노, 순노, 관노의 노예 노자가 들어가는 중앙지배성분들의 노예에 불과한 지위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지점에서 오늘날 수도중심의 한국사회의 폐단은 고려놈들이 역시나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미국인 학자는 5부제와 팔기가 실상 같은 제도라고 하였는데, 5부에서 지배성분인 계루부만을 뺀 소노, 절노, 순노, 관노가 duplicate 한 것이 팔기라고 보여진다.
깃발은 남색, 황색, 백색, 홍색 4가지 색을 가지며, 깃발 전체가 단색인 정람기, 정황기, 정백기, 정홍기[1]와 깃발에 홍색 테를 두른[2] 양람기, 양황기, 양백기, 양홍기 총 8개 기가 있어 팔기라고 했다. 모든 구분은 깃발로 이루어졌고 깃발이 곧 부대가 되었다[3].
팔기는 남색, 황색, 백색, 홍색의 4가지 단색인 정람, 정황, 정백, 정홍이 홍색테를 두른 단색인 양람, 양황, 양백, 양홍으로 본래 4개이던 것이 8개로 페어가 된 것이다.
람기가 정람과 양람, 백기가 정백과 양백으로 자가분열 한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도 고구려가 실상 만주-여진족 국가임을 의미한다. 거란족은 여진족 내에서 고구려 시대에는 지배층으로 행사하던 계루부를 일컫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