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고구려는 5개의 부가 연맹하여 성립되었는데, 처음에는 소노부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그뒤 계루부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왕실을 구성하였다. '계루'는 고구려에서 성을 뜻하는 말인 '구루'와 음이 통하여, 계루부는 곧 도읍 성을 차지한 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백과의 계루부 항목에서 이렇게 말하듯이, 전의 글에서 적었지만 성의 사람들을 뜻하는 구루와 계루부와 국가를 뜻하는 그룬이 거의 동일시되던 나라가 고구려나 요나라로써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인들로부터 통경의식이 기인했다고 보여짐.
적어도 그 것을 발해는 5경으로 확대하였고, 그 것이 다시 요나라와 고려로 도입되었음.
마찬가지로 고려에서도 서경(=평양), 중경(=개성), 남경(=서울), 동경(=경주) 이렇게 되어 있었음.
여기서 계루부라는 것은 인서울북촌의 양반들과 동일한 개념의 수도의 경족들을 일컫는 말임을 알 수 있고, 그들의 패밀리라는 뜻으로 거란족이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족이라는 말을 후일에 많이 곡해하였는데, 한민족, 중화민족 요딴식으로 말이다. 족의 원 뜻은 단지 family, 혹은 family member를 뜻한다. 권문세족이라고 할 때에 그 것인 것이다.
어쩌면 기존의 통합당 계열의 친일파 인서울북촌 앙시앵레짐들은 그들이 비난받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곡해했거나 알면서 묻었을 수 있다.
계루=거란으로 해석하게 되면 즉, 거란족이 바로 계루부로써 수도의 권문세족을 의미한다면, 요금 교체기에 여진족은 그냥 여느 여진족인 잡씨들을 의미한다. 씨라는 뜻으로 족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여진과 거란이라는 것은 소싯적 기성세대가 상정하려고 했던 프레임에 불과한 민족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민족 내에서 경족과 지방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더 나아가서 비판하자면 민족주의라고 하던 그 것조차도 모조리 엉터리이다. 그들은 Nationalism을 민족주의라고 했지만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의역해도 민족주의가 되지 않는다. 민족주의라고 엉터리로 번역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을 예시로 들자면 그 것은 오히려 탈민족주의가 되어 버린다. 바덴인이나 라인란트인, 바바리아인들이 민족개념을 버리고 통합국가를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것은 오히려 국가형성주의나 다르게는 국민주의에 가깝다. 모던한 Nation의 탄생과 함께 오늘날의 공민권 개념으로 된 국민이라는 개념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에 의해서 국민의 대표집단인 의회와 기존의 세습권력이 공존하는 입헌군주제가 바로 기성세대 학자들이 국민주의를 엉터리로 민족주의라고 번역한 것의 산물이다.
되려 한민족 민족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것은 친일파 나치새끼덜의 레벤슬라움개념에 더 가깝다. 레벤슬라움이 바로 강역이고, 그간 한국사학자들이 주구장창 떠들어온 개념이 바로 강역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 강역은 반토막이 났음에도 말이다. ㅋㅋㅋㅋㅋㅋㅋ
족의 원의미는 이러한 20세기 파시스트 세력들의 곡해를 제하면 그냥 단지 씨라는 뜻에 불과하다. 그리고 씨와 개인의 차이는 출생성분이라는 뜻이 있냐없냐의 차이인 것이다. 출신으로 특이되는 개인의 다른 점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씨가 나오는 것이다. 똑같은 조선놈이지만 누구는 상민의 씨이고, 누구는 노예의 씨이고, 누구는 왕후장상의 씨가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경상도놈은 경상도패밀리의 씨이고, 전라도놈은 전라패밀리의 씨이다 이러한 중세적인 개념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란족과 여진족은 단지 통경의식에 근간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도성의 씨냐 아니면 그냥 여느 여진족이냐의 차이일 것이다.
여직女直이라고도 하는데, 아무 여자에게서 바로 난 놈이라는 뜻이다. 성(=castle, 의역은 도성)이라는 뜻을 가진 계루와 대척인 여직의 뜻이야 뭐 그냥 여느 지방놈이라는 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조의 노비종모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요컨데, 엄마(=여자)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으로 다이렉트(=직빵)으로 된다 그런 의미라고 보여진다.
그러하다면 여직인들이 거란인들을 몰아낸 것을 뭐라고 할 것인가?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요나라에서 축에도 안 쳐주던 지방놈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성의 계루부=거란족 을 몰아내고 정권교체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직인 커머너들의 대장이던 아구다라는 놈이 황제가 된 것이다.
요컨데, 엉터리 민족주의에 의해서 곡해하던 구체제 사가들의 주장은 모조리 엉터리이고, 그 것은 현대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민족투쟁이 아니었던 것이고, 그냥 단지 지방인들과 서울인들의 내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거란족과 여진족은 다른 [민족]이라는 지점이 불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민족개념은 중국민족, 한국민족, 일본민족, 만주족 요렇게 인종과 문화가 다를 때에 쓰이기 때문에 거란족과 여진족이라고 기술되었던 것은 그러한 시사점과는 상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나라는 민족투쟁을 백업한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사에 대입하자면 인서울북촌의 고관대작들을 타도하자는 슬로건이 명확했던 동학농민운동이나 혹은 남부지역에서 탄압받던 노비들이 탈출해서 가담했던 기성세대는 빨갱이라고 부르는 남부군세력과 같은 것을 지지한 것이 된다.
지방 반군들에게 군자금과 무기를 대준 것이다.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30]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31]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그렇다면 여기서 남혼여빙은 요나라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의 결과로 축출된 경족세력들 혹은 권문세족들을 사자를 보내서 다시 불러들이자는 것이다. 왜냐면 당시에 금나라는 중국과 한국과 몽골을 모두 상대하느라 쪽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렇게 축출되었던 요나라의 경족세력의 일부는 무려 트란스옥시아나까지 가서는 당시의 셀주크 투르크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전투를 벌인 뒤에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카라 키타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카라 키타이의 후속국가이자 카라 키타이 왕실과는 사돈관계이던 가문으로부터 호라즘 왕조가 성립하였는데, 죄다 몽골에 의해서 탈탈탈 털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계루부, 거란족들은 그냥 금에 귀부하기를 청해서 야율초재라든가 야율씨들은 금대에는 여느 여진족이었다가 몽골에 의해서 금이 멸망당하자 야율씨들도 원나라를 섬기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어휘가 현대 한국말과 크게 상이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원 뜻을 찾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기성세대 친일파 사학자들은 골수 우파이던 우익깡패같던 집안놈들로써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놈들이었기 때문에 초기 한국사연구에서 그러한 부분들은 모조리 곡해하였거나 배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