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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위주로 쓰여진 일본역사의 개구라.
게시물ID : history_300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
조회수 : 114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7/17 00:09:23
이 점은 본인은 헬조센사이트에서는 피력한 적이 있다. 사실상 오늘날의 간토오 중심의 도쿄지배세력은 본디는 야마토계로 간주되지 않던 종자들이 일본의 단일민족 세뇌를 통해서 마치 그들이 본연의 일본인인양 각색된 것이다.

그러한 각색에 따라서 단지 외세의 침략에 불과했던 정복이 통일로 묘사된 것이다.

1457년에 후일의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회전을 벌였던 다케가 가문의 다케다 노부히로가 아이누족의 지도자 코샤마인을 죽인 일이 있었다. 이 때를 보면 다케다 가문은 아이누족과 야마토족의 경계를 다스리는 야마토문명의 동쪽의 변경백처럼 묘사된다.

게다가 다케다 노부히로는 다케다 8용사의 집안 중 하나인 카키자키씨가 되었다. 다케다 8용사 집안이 대대로 그러한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던 성격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교토의 야마토문명의 입장으로 본다면 후일의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쓰라는 놈도 외세나 다름 없는 놈이다.

그러한 후대의 야마토식 이름을 후일에 쓰게 된 이누족 새끼덜이 스페인 이양선의 도래 이후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초래해서는 그들의 숙적이던 다케다가문을 꺾고, 교토와 간사이로 난입했다는 것이 더욱 실제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승자 새끼덜이 야마토 피지배민들 위에서 용이하게 군림하기 위해서 그들 또한 본연의 야마토였던 것처럼 코스프레를 한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그러한 혼내와 다테마에는 실존해서 도쿠가와 가문이 제멋대로 영주들의 영지를 회수했을 때에도 바로 도호쿠와 간토오의 이누족계열로 간주된 것들은 죄다 살아남았다. 반면에 간사이의 영주들은 폐족을 면치 못하였다.

다테나 사나다는 그들이 동쪽 출신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은 것이다. 반면에 서쪽의 모리나 시마즈가는 멸족과 영지의 대폭축소를 면치 못한 것이다.


그래놓고는 외세의 침입을 열도의 통일로 치환시키면서 그들은 실상 이민족이라는 부분을 불식시킨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것은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에 따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어쩌면 도요토미라는 놈은 혼간지의 변 때문에 대놓고 간토오의 하프이누들이 그들이 주인임을 선포하기 껄끄러우니까 간토오와 간사이의 중간 정도에 있는 나고야주변 출신인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에 실세로는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중신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래는 출신이 비천한자로써 수완이 좋은 자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제로는 군사력이 가장 대단했지만 깐에 관백을 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은 정작 아비로부터 받을 직속영지도 없었고, 단지 관백으로 지내던 오사카를 거점으로 여겼으니까 오사카에 파견나와 있더라도 뒤에는 영지와 영지의 병사들이 있는 도쿠가와하고는 처음부터 실권차이가 큰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항쟁을 벌인다고 했지만 실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대항마가 필요해서 적당히 띄워준 것이었고, 그 손에 놀아난 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오다로부터 받은 직속 병사들만을 레버리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참가하는 조정의 실권자가 되었을 뿐이고, 임진왜란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죄다 참가해서 기획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면서 서쪽의 야마토계 영주들의 힘을 꺾은 것이다.

즉 1457년의 상황으로 보면 일본내에서는 야마토와 이누라는 두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지, 그 것은 결코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간사이의 야마토와 간토오의 이누라고 봐도 될 것이다. 관서는 야마토, 관동은 아이누인 것이다. 그러나 우세권은 야마토가 쥐고 있었다.

신장의 야망 게임을 해본놈은 알겠지만 스페인선이 처음에 일본에 나타났을 때 그 것은 태평양쪽에서 나타나서 관동지역에 기항하였다. 여기서부터 전통적인 우세가 역전된 것이고, 그에 따른 역학의 역전이 바로 다케다 신겐과 오다 노부나가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즉, 일본의 통일 이후의 사가들이 적고 있는 것처럼 그 것은 실상 열도의 난립이 통일이 된 것이 아니라 관동의 이누계들이 관서의 야마토계들을 정복한 것이다. 그러한 작전이 서상작전인 것이다. 즉 그 것은 적어도 중국의 할거와 통일의 반복과도 같은 동질성에 근거한 것은 없고, 실상은 타지역 새끼덜이 다른 타지역으로 진출한 순수한 정복인 것이다.

그 정복을 미화하기 위해서 전국시대라는 개소리를 만들어놓고는 마치 중국사와 같은 난립한 구도를 평정한 것으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일본역사의 개구라, 역사주작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본디의 일본민족의 한민족이라는 지점은 사후에 합리화된 것이다. 실제로 금각사나 은각사의 연원을 보면 본래는 일본의 혼간지세력으로써 도쿠가와와 오다의 이누계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던 호국불교집단은 도쿠가와가문이 잡고 나서는 도쿠가와의 마눌이던 네네라는 보지년의 성불이나 빌어주는 시녀집단으로 변모하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복의 흔적은 종단의 변화와 타락에 있는 것이다. 고려조가 화랑도와 화엄정종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조계종계 교종으로 대체하였듯이 정복당한 자들의 지배종교는 결코 그냥 내버려둠을 당하지 않았다.

특히 혼간지는 가장 격렬하게 이러한 동쪽 오랑캐들의 침략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단지 불문의 이름만 남아있지 실제의 구성원들은 모조리 숙청당하거나 축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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