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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靈)과 신(神)을 만드는 방법 - 원영신
게시물ID : mystery_35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유전
추천 : 1
조회수 : 289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1/02 09:55:42
작성자: 유전(mindbank)
 http://blog.naver.com/mindbank/memo/100125084164

 
제목: 영(靈)과 신(神)을 만드는 방법 - 원영신
필명: 유전 2011.03.31 17:17:49
 
불교는 보살행을 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도교는 원영신을 만들어 장생불사(長生不死)를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영신에 대한 한자의 표현이나 뜻이 모두 제각각이라 이것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정확한 의미부여와 표현이 되도록 해 보겠다.

불교의 석존은 결가부좌를 하여 하반신을 거의 폐쇄 하다시피 만든 후, 모든 에너지를 상단전에 집중 하도록 하여 정신의 통일(소승 대승을 지나 일불승)로 묵조선(청정 수행)이나 간화선(화두선, 청정을 깨고 온갖 사유 = 고통 을 불러 지혜를 추구)을 거쳐 불이(둘이 아님 不二, 색즉시공, 청정과 지혜의 일체행)의 경지를 이루어야 한다. 청정이라고 하는 중심이 없으면 온갖 사유에서 마장에 휘둘리게 되고 청정만 앞세워서 세속이나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면 반야의 지혜가 없다. 그냥 청정한 돌부처에 지나지 않다.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면 보살도 아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법신불(法身佛 청정) 보신불(보살행, 성령에 해당 됨) 화신불(법신불과 보신불의 가피력을 직접적으로 받는 현세의 몸)이 삼위일체를 이루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의 체(體 몸)가 셋으로 나뉘어진 경우에 해당 되는데, 법신불은 활동성의 제약으로 고정되어 있고 그러한 활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보신불과 연결짓고 보신불은 다시 화신불에 닿아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법신불의 마음은 우주 어디에라도 닿으며 일체유심조로 일체의 모든 것을 비추어 만들지만(造) 단지 마음만으로 만든 것이어서 물질에 있어 하나의 형태인 색(色)과 무색(無色)의 경계를 구분할 수는 있어도 온갖 색(色)인 물질 전체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마음 밖에 따로이 구할 것이 없다" 라는 화두와 같이 마음 수련을 강조하고 나(유전)의 글에서도 똑같이 이러한 화두를 강조하지만 이 또한 마음과 몸이 둘이 되어서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다만 마음을 먼저 닦는 것이 악업(惡業)을 덜 짓게 되는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먼저 강조 하고자 함이지 몸을 닦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마음만으로 된 법신은 우주 전체에 퍼져 있어 어떠한 작용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 법신 자체가 물질로 화(化)하여 생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생명 창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 불교 교학의 이론자들은 이 부분에서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의 결과로 진화론적 생명의 영성화를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 영성(靈性)의 원인이 되는 설법이 빠져 있고 다만 영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의 윤회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뿌리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우선 이러한 영성을 이야기 하기 전에 영혼의 그릇이라고 하는 몸을 먼저 살펴 본 후 영성에 관하여 이야기 하겠다.

그러면 어떠한 몸을 닦아야 하는가? 도교에서는 양신(養身, 養神)수행이라고 하여, 몸을 먼저 닦고 그 몸으로 신선(神仙)이 되어야 하는데 몸이라고 하는 신(身)의 한자 모양은 임신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아이를 배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몸을 닦기 위해서는 반쪽짜리 몸이 아닌, 상반신은 물론 하반신 까지 모두 수련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교에 비하여 도교의 수행은 대부분 좌선을 시작으로 하더라도 몸의 부분 부분을 극도로 훈련하여 결국 몸 전체를 만들어 가게 하는 행공(行功)을 기반으로 각종 도술(道術)을 연마하기 때문에 도교의 어느 파벌이든 거의 무술(武術)을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태극권과 같이 기체조로 볼 수 있는 느린 행공이나 태권도(太拳道)와 같이 주먹과 발을 빠르게 펼치는 것도 모두 도교의 행공 수행에 해당 된다. 또 신체를 기른다고 하는 체육활동 또한 모두 행공 수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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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10장 (해석: 유전)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싣을 재,운영할 영,넋 백,감싸안을 포) (떠날 리)
專氣致柔 能嬰兒乎? 전기치유 능영아호 (오로지 전,이를 치,유연할 유) (갓난아이 영,아이 아)

몸 속의 백(魄 , 넋 백)을 감싸 하나에 싣고 운영하면서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기(氣)를 유연히 이르게 하여 (그러한 백을) 갓 낳은 아이 처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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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와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내려간다 라고 이야기 해 왔다. 기독교에서 구약은 민족적 무속(제사장, 도교)이면서 유교의 형태도 보이는데 "구약 전도서 3장 21절: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이렇게 비슷한 구절이 있다.
 
그러면 몸 속의 백(魄)을 어떻게 하나로 모으고 감싸서 싣고 다니며 운영을 하는가에 있어, 그 주체는 기(氣)이다. 인체의 기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면 이것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의 의심이 항상 반론으로 제기 되는데 중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파급되어 있는 파룬궁(法輪功 법륜공)의 인구와 인도의 요기 수련자들의 인구를 포함하고 그 이외의 각종 도교 및 불교 또는 명상 수련자들을 모두 합치면 가히 10억명 이상이 이에 대한 심리적 확증을 가지고 수련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재만의 체험 인구수이며, 수천년 역사에 있어 그것을 경험하여 기록에 남긴 인구까지 합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가 입증을 하고 있다. 또한 과학적으로도 인체의 전자기파를 측정할 수 있는데 그렇게 측정되는 전자기파도 일종의 기(氣)다. 모든 물질에는 전자기파가 있는데 인체에만 전자기파가 없을 수도 없는 일이다.

수련에서 기(氣)를 느낀다고 하는 기감은 몸 속에 있는 기에 대한 반응이다. 이러한 기감을 느낄 수 있는 자가 있고 아직 그러한 때가 되지 못하여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기를 느끼는 기감이 가능한 자라면 그 기에 대한 고도의 집중된 관법(觀法)에 따라 잘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본인의 의지(意志)로 조종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부터를 수련에 정식으로 입문한 단계로 본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조종하여 기를 돌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나중 문제로 기를 돌려 소주천을 이루고 복부의 단전이라는 곳에 소약(小藥)이 형성 되었을 때 이다. 기를 돌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파에서의 주장도 그것을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지만 억지로 무리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의지를 가지고 소주천을 할 수 있다는 사항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기를 돌리지 않아야 한다, 또는 기를 돌려야 한다고 각각 주장하는 이면에는 기를 느끼는 것에 대하여 전자의 경우 기의 전체를 느끼는 경우와 후자의 경우 기의 전체를 느낄 수 있지만 그 기가 새롭게 길을 열어가는 시초점을 인식할 경우 그 시초점에 의지를 더욱 집중하여 그것을 의지에 따라 끌고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기의 도인(道引)이라 한다.

이것은 도덕경 1장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차양자, 동출이이명 (此兩者 同出而異名)
(유전: 천지에 시작이 있으니 이름이 없음이요, 이름이 있어 만물의 어머니로 불리지만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니 서로 이름이 다를 뿐이다. - 한자 해석의 순서를 이해가 쉽도록 도치했음)

기를 도인(道引)할 것인지 아니면 하지 않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나는 기를 도인도 하고 도인하지 않기도 한다. 특히 무리를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의념을 강하게 보내서 무리를 한 부분의 근육이나 내부 상태에 지혜 추구의 화두선을 할 때의 상단전에(머리 부분) 쏠려 있던 혈액과 에너지를 거두어 무념무상(가수면 상태)으로 만들 정도의 최소로 남겨두고 그 혈액과 에너지를 몸의 아픈 부위에 집중적으로 보내어 자연 치유력을 높게 한다. 물론 내 몸에 암이 발생 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되겠다.

이렇게 가능하게 되기 까지에는 수 많은 고통을 수련의 때에 미리 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함부로 따라하든 말든 모두 각자의 책임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나의 경우는 가수면 상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일상적 활동 중에 잠시만의 의지만으로도 컨디션 회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구약에서 짐승의 혼이라 지칭했다고 보는 백(魄 파자로 풀면, 하얀 귀신 鬼)을 황제내경에서도 설명을 하는데 스스로 의념(意念)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다. 몸 속의 자체적으로 있는 귀신이 자연치유력을 제대로만 발휘를 하면 귀신이라 불리든 신(神 God)이라 불리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인간에게 있어 생로병사 중에 생노사는 말하기 어렵고 최소한 병(病) 조차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백(魄)이라면 자연치유력에 있어 가히 귀신이라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멍청한 자연치유력을 발휘하는 상태를 말한다.

도덕경 노자의 경우에는 도(道)를 최고의 경지까지 올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무위(無爲, nirvana 니르바나 열반)를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도에 연결된 상태에 있는 자에게나 해당되고 병(病)에 이르면 큰 병이나 작은 병이나 도가 끊긴 상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멍청한 백(魄)을 도(道)의 신(神)에게 빌기 보다 스스로의 의지로 다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근기가 약하고 악업(나쁜 습관으로 쌓인 몸 속의 귀신들)을 많이 지은자는 몸 속의 귀신도 강하기 때문에 다스림도 쉽지 않아 자신이 믿는 신(神)에게 비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부처님(석존)이나 태상노군(노자)이나 예수님이나 최종적으로는 자등명, 스스로 닦은 성인(聖人), 자신의 십자가를 강조한 경우와 같이 결국 자신의 몫이다.

몸에는 백(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神)도 있다. 신경계(nervous system/nerve, 神經系) 라고 하여 온갖 신들이 자체적으로 있는데, 자기 의지의 주(主)가 되는 신(神)이 대표적으로 판단을 내리게 되겠지만 이러한 판단의 주(主)된 신(神)도 판단이 왔다 갔다 하듯이 때로는 수시로 교체 된다. 주관이 뚜렸 하다가도 흐릿하거나 때로는 바보가 되기도 하며 심하면 망상에 시달리다 미치는 경우도 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말한다.

자기의 몸 안에서 흩어진 기를 융합하고 융합하면 정기(精氣)라 하고 온갖 신(神)에서 하나로 주(主)가 되면 정신(精神)이라 하는데 이러한 정기와 정신이 과연 창조주가 심어준 내안의 신성인지, 이름 할 수 없는 도(道)에서 나온 진정한 성(聖)스러움인지, 내안의 불성(佛性) 즉 본래면목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본인들만이 알아서 신성을 찾았다고 하거나, 자등명을 성취했다며 이러 저러한 표현으로 말 하고 있으며 그러한 표현들에 공감하여 각각 파별로 수 많은 동조자들과 그의 문하들로 형성되어 주장하고 있을 뿐이지만 결국 관점이 다른 시각에서 보면 모두가 사탄이요 마구니일 뿐이다.

어차피 이러한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유전) 또한 한때 몸을 극한의 과정까지 수련했던 입장으로 도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몸 수련 경전의 최고로 인정되는 도덕경의 입장과 상당히 공감하는 것을 위주로 나의 주장을 해 보겠다.

위 도덕경 해석을 다시한번 읽어 보기를 바라여 다시 한번 강조한다.

"몸 속의 백(魄 , 넋 백)을 감싸 하나에 싣고 운영하면서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기(氣)를 유연히 이르게 하여 (그러한 백을) 갓 낳은 아이 처럼 할 수 있겠는가?"

기(氣)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너무나 미세하여 측정하기도 어려워서 가히 양자역학에나 등장할 정도의 수준에 있다고 보는 현상이지만 다행히 그것이 몸 속에 있는 것이라면 감각에 의하여 포착되고 느낄 수 있다 하겠다. 그 기를 모으고 모아서 점(點)이 선(線, 실타래)으로 연결이 되고 다시 그 실타래와 같은 선이 모아지면 면(綿 잇닿을 면)이 될 수가 있겠는데 다음과 같이 도덕경에 나온다.

도덕경 6장 是謂天地根 (시위천지근) 綿綿若存 (면면약존) 用之不勤 (용지불근)
(유전: 하늘과 땅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데 면면으로 있는 것 같이, 쓰임에 있어 (힘을 내려 해도) 부지런을 떨지는 않는다)

기가 모여 선이 되고 면이 되면 그러한 면으로 보자기의 용도로 쓸 수 있듯이 조심 조심 부드럽게 감싸 백(魄)을 모두 모아, 하나의 덩어리로 새롭게 만들어 (갓 낳은 아이가 되기 전의) 임신한 몸 즉 신(身 임신한 모습)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화두이다. 태아를 갓 낳은 아이로 표현할 수 없듯이 하단전에만 머물거나 상단전에만 머물거나 하반신이 묶여 있어서 절반의 상태만 있다면 이것은 완전히 태어난 아이가 아니다.

완전히 태어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자(赤子)의 과정이 필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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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55장 ("노자를 웃긴 남자"의 저자 구름 이경숙 번역)
함덕지후 비어적자 봉채훼사불석 맹수불거 확조불박 (적자 - 赤子 붉은 자식, 그외 한자 생략)

두터운 덕을 간직한 사람은 갓난아이(적자)와 같아서 벌이나 전갈, 독사도 쏘지 않고, 맹수도 잡아가지 않으며, 사나운 새도 나꿔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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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은 도올을 비판하여 노자를 웃긴 남자로 표현을 했는데, 노자를 알지도 못하고 번역했고 다시 벽운공 이라는 수련법으로 현재 노자를 다시 또 알아 가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노자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 했다는 나의 관점으로 보면 역시나 노자를 웃긴 여자에 해당 된다.

적자(赤子)를 직역하면 "붉은 아들"이라 할 수 있고 아들에 해당되는 당사자는 수련자에 해당 된다. 즉 수련자의 기가 모아지면 그 기가 점차 상승하여 위로 올라가서 상기(上氣)라고 하는데 아주 당연한 현상이다. 쌓이면 올라가게 되어 있다. 쌓이고 쌓여서 막히면 얼굴 색이 벌겋게 된다. 상기 증상의 하나로 병(病)으로 인식하는 경우인데 아프지 않으면 병은 아니다. 보약을 먹어도 혈색이 붉으스레 하게 되는 것 처럼 단순히 홍조를 띄운다고 해서 병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점차 증가하여 올라간 기가 압력이 세지고 어디로 빠져 나갈 곳이 없게 되면 고통스럽게 되는데 그 기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기를 스스로의 의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인 도인(道引)이 중요하다. 이 도인술에도 두가지로 나뉘는데 단전에서 몸의 앞부분으로 가슴의 중단전을 지나 얼굴을 거쳐 머리 꼭대기에서 뒷목을 타고 내려와 척추를 통한 후 배꼽 위치의 등(背 등 배) 뒷 부분에서 약간 아래인 명문혈을 지나 다시 단전으로 가는 것과, 반대로 단전에서 등 뒤로 빼고 명문혈을 거쳐 척추로 올라가는 역순의 경우 두가지이다.

전자든 후자든 서로 상대의 경로가 거꾸로 된 역순이라 비난들을 자주 하는데, 나는 몸의 앞부분을 지나 머리로 올라가서 척추로 내리는 방식을 선호 한다. 이것에 대하여 역순으로도 많이 해 보았는데 얼굴이 창백히 하얗게 되거나 푸르죽죽, 때로는 투명하게도 보일 정도여서 어떤 때는 보기에 좋아 보일 수도 있는데 몸 수련이 아닌 정신적 고통의 수련이 먼저 찾아 오게 된다. 또 이 경우에도 다시 얼굴이 붉게 물드는 적자 현상이 보이게 되기는 한다. 반전 효과일 뿐이다. 그리고 먼저 폐단이 찾아 온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 마저도 도인술을 모르고 기만 느낀 초심자들은 올라간 기를 내릴 수 없어서 초기에 벌써 상기병 증상으로 고통을 당하고 수련에 대하여 온갖 비난을 하게 되는데 스스로 자초한 선택이며 이미 시작한 것에 대해서 지혜가 없어 당하는 고통일 뿐이며 스승이 있어도 제대로 알지 못하여 해소 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다.

모든 수련에는 정점이 있기 마련이고 도인술을 할 수 있다 하여도 언젠가는 상반신 전체가 붉게 적자(赤子)가 되겠는데 고도의 수련자들이라 하여도 대부분 겪는 일이다. 다시 하반신으로 확대하여 머리에서 척추로 내려와 명문혈에 닿은 기를 단전으로 보내지 않고 미추혈과 회음혈(낭심과 항문 사이에서 약간 뒷 부분)을 지나 양쪽 다리로 갈라져서 다리 전체로 내리고 주맥인 엄지 발가락을 타고 올라와 발등을 타고 다시 단전까지 올라간다. 상반신 수련시에는 양쪽 팔을 지나 손가락 까지 모든 세맥이 이미 뚫려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상반신에만 쌓인 기들이 몸 전체로 흩어지기 때문에 해소 시킬 수 있는 기간을 벌 수 있겠지만 새끼발가락 까지 모든 세맥을 다 뚫게 되는 힘과 압박이 증가하게 되면 결국 전신이 붉게 되어서 마치 온 몸이 뻘겋게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여서 오해를 살 수 있다. 보약을 먹었다고 핑계를 대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소주천 대주천을 지나 전신주천으로 완전한 적자(赤子) 상태가 되려면 근기도 좋아야 하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 하여야 한다. 몸의 준비 상태도 필요한데 몸이 너무 뚱뚱해서 지방이 많으면 적자 상태에서 꼭 필요한 지방을 제외하고 필요 없는 지방을 거의 대부분 녹이게 되기 때문에 피(血 피 혈) 속에 지방이 많아지는 고지혈증에 걸릴 수 있다. 또 몸이 너무 근육질로 되어 있으면 전기치유(專氣致柔 오로지 기를 부드럽게 이끌다)가 어렵기 때문에 적당한 몸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성장기에 있는 미성년자 이거나 (남자의 경우 만27세 정도는 넘기고 시작하는 것이 좋음. 노화가 진행되기 전) 앞으로 실제 임신을 할 계획이 있는 여자의 경우에는 자궁(최고의 자율기관)과 중복이 되기 때문에 기 수련은 좋지 않다. 여자 스님인 비구니나, 천주교의 수녀는 상관이 없다. 이 경우에도 여성의 미용이나 건강에는 좋을 수 있고 적자 상태에 이룬 이후에 몸을 새롭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백(魄)을 모아 영(嬰)을 낳을 수는 없다. 실제 현실의 아이를 더욱 소중히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게 되어 있다.

적자 상태 이후 벌모세수로 몸에 있는 모든 부분의 백(魄)을 다 모아서 자라게 하면 환골(換骨, 어긋난 균형의 뼈를 맞추고 뼈의 성분 자체도 바뀜) 탈태(脫胎 아이밴 태)의 현상을 거친 온몸을 구족한 상태로 갓 낳은 아이가 몸 속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만들어져서 태어난 아이는 이후에 수련자가 어떠한 사고를 당하여 신체의 일부가 훼손 되었다 하여도 다른 형상으로 바뀔 수 없다. 마치 이미 태어난 아이가 그의 어머니가 다쳤다고 해서 아이까지 다치는 것은 아닌 경우에 해당 된다. 또 이미 수련을 시작 하기도 전에 몸을 다쳤다고 해서 포기할 필요는 없다. 만들어진 만큼 다음 생에서 그대로 따라 오기 때문에 모자란 부분 만큼만 채워지면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상태를 한자로 표현하면 원영신(元嬰身)으로 표기할 수 있겠는데 완전한 영(嬰)을 만들었다면 영의 왕, 王 + 嬰 글자인 영(瓔 구슬목걸이 영)으로 도가에서나 불교의 선가에서 마음 속의 구슬이나 보배를 잘 닦아야 한다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 영은 열반이나 현세를 떠날 때 본체에 귀속되지 않고 따로 분리 될 수 있는데 본체의 활동력을 대신 수행할 수 있는 그러나 본체와 항상 연결되어 있는 영(靈)으로 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 하겠다.

이렇게 본체에 귀속되지 않고 따로 분리 된 원영신(元嬰身)이 다른 사물에 붙으면 영물(靈物)이 되고 다른 생명체에 붙으면 신(神)이 된다. 그 이유로는 백(魄)이 원래 의념(意念)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념의 완결체가 바로 영(嬰)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영(嬰)이 되기 전의 상태에 있었던 즉 완전하게 갓 태어난 영(嬰)이 아니라 하여도 조금이라도 수련이 되었다면 그것은 언제든 그 수련자의 원인을 찾아 환원 시킬 수 있거나 수련자의 의지에 따라 연동할 수 있겠지만 만약 수련자 자체가 지나친 죄업이나 갑작스러운 죽음 깊은 원한으로 그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할 경우 떠돌이 영(嬰)의 신세가 되기 때문에 에너지의 높고 낮음에 따라 스스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어떠한 물체나 생명체에 붙어서 자리를 잡게 되고 신령(神靈)이 되는 것이다. 원래 수련이 되지 않은 백(魄)은 땅으로 가야 하지만 고도의 수련자가 마음을 덜어내고 덜어 내어서 공성(空性)을 가졌다면 그 공성의 크기만큼 땅으로 내려가지 않고 어디든 다닐 수 있다.

만약 도(道)의 조종이라고 하는 노자가 잠시 동안만에 만든 미숙한 영(嬰)이라 하여도 그 에너지는 다른 수련자가 오랜 기간 연성하여 나온 영 보다 크다. 그러나 완전하게 태어난 영(嬰)이라면 그것은 노자 이전 창조주가 인간에게 심어 놓고 나온 영(嬰)이기 때문에 같은 동일한 원형이라 할 수 있어 갓 태어난 아이들 처럼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영(嬰)은 언제든 항상 그 원인 수련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수련자의 수준에 따라 그 수준도 달라진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창조주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자신이 창조주가 아님 또한 밝히고 있다. 다만 자신이 상제(象帝) 보다는 먼저 있었지만, 본래의 창조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정의 내릴 수도 없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도(道)라고 말할 뿐이다 라고 한 것의 내용이 도덕경 1장과 4장이다.

영(靈)이라는 문자의 구성을 보면 하단에 무속인을 뜻하는 무(巫) 위에 비(雨)와 그 아래에 입(口)이 세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신령(神靈)(무당이 몸주로 받아들인 신)" 이라고 나와 있는데 구약 창세기 1장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spirit)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중요 구절만 영문으로 살펴 보면,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kjv 영어판)" 으로 영(靈)이라는 문자와 완전한 일치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신(神)이니 하늘에 있을 것이요, 하늘에 있는 물이니 비와 그 구성 성분인 구름 속의 물(the waters)을 뜻하는데, 신(神) 영(靈) 무속인(巫)이 각각 하나씩의 입(口)이 있겠는데 중간에 위치한 영이 신과 무속인을 연결하는 매개체를 담당하여 결국 삼위일체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다시 영(嬰)으로 돌아와서 원문인 "능영호아(能嬰兒乎)?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를 기독교에서의 문구로 찾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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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창세기 2장23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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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고린도전서 11장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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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데, 아담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니 생략하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영적인 지식으로 판단하고 주장)에 입각해서 나온 말로 현실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도덕경도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자를 낳는다고 전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노자는 남자이며 역시나 도덕경의 1장에 "욕심이 없으면 묘(妙 파자로 풀면 작게'小' 이어진'/' 여자'女')를 보게 될 것이다"로 나와 있으며 신선의 세계에서 반드시 언급되어 선녀(仙女)가 등장하는 이유이다.

영지주의적 남녀관계를 더 살펴 보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God은 구약의 인간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경우가 아에 없다. 이 God은 원래 "엘(남성)"과 "엘로하(여성)"가 합쳐진 "엘로힘" 이라는 장엄복수로 둘 이상의 관계를 하나로 함께 묘사했고 1장의 등장과 함께 2장 처음 부분에 바로 사라지는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에 사실 1장에 기술된 사실이 어떻게 전해진 것인지에 대하여 전혀 알 수가 없는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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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1절과 2절이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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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로 안식에 들어간 이후에 2장4절 부터 느닷없이 여호와가 등장을 하는데 이 여호와는 구약의 여러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고 그와 유사한 다른 이름이거나 여호와의 흉내를 내지만 여호와가 아닌 경우도 많다. 여러 영(靈)들이 대립과 투쟁 속에 교체 되고 있는 현상으로 현재 기독교에서는 "God" 이슬람교에서는 "Allah"가 대표적 영일 뿐이며 유태교에서만 "여호와"로 정착한 상태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슬람 민족의 모든 이름을 배제하고 단 한번 그 이름을 부르는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다 "엘이시여 엘이시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뜻이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이 엘의 아들로 다시 말해 엘을 창조주로 본 것은 아니다. 이슬람 민족의 근원적 신령(神靈)의 이름으로 불렀고 현세에 나오기 전의 인연, 즉 전생에 예수님과 엘의 인연에 따라 부른 것으로 안식에 들어가 있던 "엘과 엘로하"를 예수님 피(血)의 댓가로 깨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고행 이전에 예수님은 자신이 간 이후에 새로운 영(靈) 즉 성령(聖靈)이 올 것이다 라고 제자들에게 예언을 했고 제자들은 예수님 이후에 성령을 목격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내용은 내가 모든 종교적 체험을 거친 후 나온 나의 주장일 뿐, 어차피 각자 본인들의 성향에 따라 어떤 내용은 동조할 수 있거나 어떤 내용은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모든 종교적 시험(test)을 다 거쳐서 체험을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가 처음이자 다른 누가 주장할 수도 없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갔다 온 후에 "이렇더라" 라고 설명한 경우에 해당 되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으면 이해 되는 것이고 이해 되지 않아도 상관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러한 전체적인 체험이 각 종교별로 성향별로 조각 조각을 이어 나가다 보면 점차로 맞아 들어가는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어 동조자들이 점차적으로 증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 않고 나의 주장이 진리가 아니어서 가치가 없고,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여서 진리가 거짓을 물리치게 되는 속성상 나의 주장은 자연 소멸될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도 없다. 반대로 나의 주장이 진리라면 다시 그동안의 거짓들은 점차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고 역시나 자연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수련시 상기병의 이해와 벌모세수 환골탈태의 과정
 http://blog.naver.com/mindbank/memo/100084352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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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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