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기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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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티’(캐나다)의 사례 ]
케이티(Katie)는 1993년 2월 캐나다에서 데니스(Dennis)와 뎁(Deb Wise)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뎁(Deb)이 케이티를 임신한 사실을 안 때는 전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이었다. 당시 뎁은 아이를 낳게 되면 주위사람들로부터 데니스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자식으로 놀림을 받을 것이 두려워 아이를 유산시킬 것을 신중히 고려하였으나 데니스의 친구인 탐의 만류로 그냥 아이(케이티)를 낳게 되었다. 그후 뎁은 전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하고 데니스와 결혼을 하였다.
뎁의 딸 케이티는 일찍부터 말을 하였다. 그녀가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녀는 “내가 당신의 엄마였던 때를 기억해요?”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하였다. 뎁은 그러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린애들은 우스운 말을 자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이티가 3살 때 딸의 말이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케이티와 그 어머니 뎁이 광에서 건초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케이티가 몸을 기대면서 뎁의 귀에 대고 “내가 당신의 어머니였던 때를 기억하세요?”라고 속삭였다. 그 당시 뎁은 케이티로부터 하도 이런 말을 자주 들었던 터라 그냥 웃으면서 “아니, 말해 봐. 너가 내 어머니였을 때 이름이 뭐였지?” 라고 물었다.
케이티는 뭔가 특별한 것을 말할 때에는 가까이 와서 속삭이듯이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때도 케이티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모두들 나를 블론디라고 불렀어요.”
케이티의 어머니는 너무나 깜짝 놀라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모두들 블론디라고 불렀다고?”
“예, 전에 모두들 불론디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내가 너의 작은 딸이었니?”
“예.”
그 어머니인 뎁은 쇼크를 받았다. 어머니(뎁)의 어린 시절 할머니 별명이 실제로 블론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할머니를 아무도 블론디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엘리자베스라고 본명을 부르고 있었다. 케이티 역시 블론디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을 터였다.
케이티는 다시 몸을 기대면서 매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내 작은 딸이었을 때 나는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지? 엄마들은 항상 딸들을 사랑하잖니?”
“왜냐하면 당신은 항상 나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방안으로 밀어 놓고 문을 잠그곤 했으니까요.”
뎁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실제로 할머니(뎁의 어머니)가 알콜 중독으로 술주정을 심하게 하는 경우 뎁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고 그녀를 침실 안으로 밀어 넣고 술이 깰 때까지 문을 잠그곤 했기 때문이다.
케이티가 4살 때인 어느 날 어머니 뎁은 부엌에서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케이티가 뒤쪽에서 다가와 엄마를 안아주더니 사실적인 목소리로 “엄마 내 한쪽 다리가 다른 쪽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아요?”하고 물었다.
뎁은 깜짝 놀랐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더 살졌다는 뜻이니?”
케이티는 마루에 앉아 두 다리를 뻗고 한쪽 다리를 가리키면서 “아니,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더 길어.”라고 말했다.
어머니 뎁은 다시 쇼크를 받았다. 실제로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케이티가 한 것과 똑같은 자세로 한쪽 다리가 더 길다고 불평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날 읍내로 나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 어머니 뎁은 케이티에게 아빠 일터에 도시락을 전해주는데 같이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탐(Tom) 삼촌도 같이 가느냐고 물었다.(탐은 뎁과 데니스 부부가 낙태를 하지 않도록 조언한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래, 같이 갈거야.”하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다시 가까이 다가와서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뎁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는 내 생명을 한번 구해 주었어요.”
(출처: Carol Bowman, "return from heaven", HarperCollins books, pp 117~125)
[ ‘마르따 로렌쯔’(브라질)의 사례 ]
브라질의 ‘페리시아노’라는 마을 근처에 꽤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J. 오리베이로의 딸 마리아 오리베이로는 극히 상심해 있었다. 그녀가 사귀던 연인 후로징호와의 결혼이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인 후로징호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애인이었던 후로징호가 자살한 후 마리아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였다. 그녀는 절망에 빠져 몸을 돌보지 않고 비오는 거리를 헤매었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후두와 기관지가 몹시 상해서 나중에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게 되고 폐결핵에 걸린 것 같았다. 평소 가장 친하게 지내던 옆 마을의 로렌쯔 부인이 문병왔을 때 그녀는 죽고 싶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로렌쯔 부인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로렌쯔 부인이 귀를 가까이 대자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꼭 다시 태어날 것이에요. 당신의 딸이 돼서요. 그리고 환생 후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지금의 나의 생애의 여러 가지 일들을 얘기 할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내가 환생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이러한 약속을 남기고 그녀는 1917년 10월, 28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해인 1918년 8월 14일, J. 오리베이로의 농장에서 12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학교교사 F. 로렌쯔 부부 사이에 열 두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마르따 로렌쯔로 지어졌다. 마르따는 두살 반이 되던 때부터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소와 산양등 동물이 많은 곳이었으며 오렌지도 많았다. 요리사인 나이든 흑인과 어린 흑인 고용인을 두고 있었다. 자신은 싱하징하 또는 싱하 또는 마리아라고 불렸다’고 했다.
마르따가 세 살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내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어느 큰 도시에 갔을 때였다. 그 거리에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 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몹시 내리는 비를 만났다. 그래서 어떤 집에서 하루 밤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그녀가 죽기 직전 카니발에 참석했던 경험을 말한 것으로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정확한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마르따가 전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하자 마리아가 다시 태어난 것으로 짐작을 하고는 마리아가 죽기 전 병실에 문안 갔던 일을 물어보았다.
“마르따야 네가 싱하였을 때 죽기 전에 엄마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지?”
마르따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와 그 귀에 속삭이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가리키면서
“난 말을 못했어. 목이 가라앉아서 소리가 안 나왔으니까.”라고 말했다.
마르따는 전생의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과거에 살았던 오리베이로의 농장에 데려다 달라고 때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마르따의 아버지는 실제로 농장에 데려간 것은 마르따가 12세 때였다. 오리베이로의 농장에 데리고 간다는 말을 듣고 마르따는 기뻐했다. “집(전생의 집) 근처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요. 바위를 둘러싸고 길을 돌아가게 되어 있고 그 곳을 돌아가면 내가 싱하였을 때 집이 있어요.”
전생의 집안으로 안내된 그녀는 방의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시계는 내 것이야. 이리 줘 봐. 뒤에 금색으로 내 이름이 조각되어 있을 테니까.”
잠시후 오리베이로가 벽에서 시계를 떼어 내렸다. 과연 금색 문자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라고 싱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마르따는 로렌쯔 부부를 방문한 전생의 첫 번째 애인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아르메이다 라는 남자가 찾아 왔다. 부친과 그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본 마르따가 말했다.
“어머, 후로린다!”
후로린다는 아르메이다의 이름이었다.
부친은 놀라서 물었다.
“이 사람을 알고 있냐?”
잠자코 아르메이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물론 알고 있어요. 내가 싱하(마리아)였을 때 내가 사랑하던 애인이 바로 이 사람인 걸요.”
아르메이다는 부친 오리베이로가 그들 사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첫 번째 애인이었던 것이다. 아르메이다는 신기한 듯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 날 부친상을 당한 마을의 한 여인이 로렌쯔의 집에 찾아 왔다. 그 여인은 슬픔에 젖어 아버지 F. 로렌쯔에게 말했다.
“아무리 한탄해도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도 없고 ....”
듣고 있던 마르따는
“생명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아주머니. 생명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거예요.” 라고 말하며 그 여인을 위로했다.
상을 당한 그 여인은 힘없이 웃으며 마르따에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어요. 아가씨. 인간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그것이야말로 틀렸어요.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죽었었어요. 그렇지만 보아요. 자, 난 아직 살아있지 않아요?”
마르따가 환생한 것을 모르는 그 여인은 어리둥절하였다고 한다.
1962년(당시 마르따는 44세) 이 사례를 처음 조사하였던 이안 스티븐슨 박사가 1972년 마르따를 다시 방문했을 때 당시 54세가 된 마르따는 전생의 기억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살한 애인 후로징호에 관한 기억등은 몇몇 기억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내가 싱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끔 저절로 싱하였던 때의 일을 생각해 냅니다.”
싱하와 마르따의 생애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했느냐는 이안 스티븐슨 박사의 질문에 마르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둘 다 행복의 정도는 같았겠지요. 싱하는 부자였지만, 돈은 행복과는 크게 관계는 없고요. .......”
(출처: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하)(The 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 송산출판사, pp. 7~42 )
[ ‘수잔 가넴’(레바논)의 사례 ]
수잔 가넴(Suzanne Ghanem)은 1972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시 남쪽의 스와이파(Shwaifat)에서 태어났다. 수잔의 부모들에 따르면 수잔이 생후 16개월이 되던 때부터 전화의 수화기를 잡고는 “헬로, 라일라(Leila)”라는 말을 반복하였으나 당시에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수잔이 좀더 자라자 라일라는 그녀의 자식들 중의 하나였고 그녀 자신은 수잔이 아니고 하넨(Hanan)이라고 말하였다. 수잔이 2살이 되자 그녀는 그녀의 다른 아이들, 남편, 부모, 형제자매등 13명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의 집은 이 집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라는 등의 이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수잔은 그녀의 부모에게 자신은 하넨 멘수어(Hanan Mansour)이며 미국에서 수술 직후에 죽었고,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과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넨 멘수어(Hanan Mansour)는 1930년대 중반, 레바논의 쇼우프 마운틴스(Shouf Mountains)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그녀는 페로우크 멘수어(Farouk Mansour)와 결혼하였다. 일년 후 그녀는 첫 딸 레일라(Leila)를, 다시 이년 후 둘째 딸 가라레(Galareh)를 낳았다. 그때 그녀는 심장에 좋지 않으므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말라고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1962년 그녀는 다시 셋째 아들을 낳았다. 1963년에 들어서서부터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녀 남편이었던 페로우크의 말에 따르면 하넨은 죽기 2년 전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다시 태어날 것이며 전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 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36세 때 그녀는 대단히 위험한 심장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 버지니아주의 리치몬드의 한 병원으로 날아갔다. 심장수술 후 그녀는 합병증으로 그곳에서 죽었고 다시 베이로트로 운반되어 왔다.
그리고 하넨이 죽은지 10일 후 수잔 가넴이 태어난 것이다.
수잔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전생의 남편이었던 페로우크 멘수어(Farouk Mansour)를 비롯한 멘수어 집안사람들이 수잔을 만나러 왔다. 멘수어의 집안은 베이루트의 저명하고 부유한 집안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수잔 가넴이 재산을 탐내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수잔의 이야기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잔은 곧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족 사진을 보고는 모든 친척들을 구별해 내고 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내 동생 허큘, 내 동생 제이슨, 내 동생 플라토, 내 어머니, .... 그리고 이것은 나. 여기서 나는 검정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머리 자른 것을 기억한다. 내가 얼마나 여위어 보이는지 좀 보세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고통의 기억이 그녀의 눈에 명백히 나타나 있었다. “나는 아팠어요.”
그리고 수잔은 둘째 딸이었던 가라레(Galareh)에게 돌아서서 말하였다. “삼촌 허큘(Hercule)이 너에게 보석들을 주었니?, 레일라(Leila)에게도 보석들을 주었어?”라고 물었다. 하넨이 버지니아에서 수술 받기 전에 동생인 허큘에게 그녀의 보석들을 주고서는 그것들을 두 딸에게 나누어주라고 말한 것은 가족들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멘수어 가족과 전생의 친척들은 수잔이 하넨의 환생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녀는 전생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녀는 전생의 남편이었던 페로우크의 이름을 하루에도 세 번씩 불렀다고 한다. 수잔이 페로우크를 만나러 갈 때면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곤 했다. 페로우크가 하넨의 친구였던 여자와 재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신은 나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1977년 7월, 베이루트에서 발간되는 주간 영자신문인 ‘먼데이 모닝(Monday Morning)'誌는 수잔의 이야기를 ‘하넨 멘수어의 환생’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Headline)로 크게 보도하였다. 이안 스티븐슨 박사도 이러한 환생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하여 1978년 3월 당시 5살이던 수잔을 직접 면담하고 조사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20년후인 1998년 이안 스티븐슨 박사는 다시 베이루트에 가서 당시 25세의 대학생이 된 수잔을 다시 면담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전생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전생의 남편과 직접 만난 지는 4년 정도 되었으나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 통화를 하고 있다고 했다. 스티븐슨 박사가 수잔에게 “전생을 기억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요?”하고 묻자, 그녀는 “예,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내 전생의 가족들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데 대하여 안도하고 있으며, 나는 내 전생의 가족을 다시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출처 : Tom Shroder, "OLD SOULS", A fireside book, pp. 79~95)
[ ‘차나이 추말라이웅’(태국)의 사례 ]
‘차나이 추말라이웅’은 1967년 태국의 시골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매우 가난하여 일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고 할머니 ‘프롬’이 그를 기르고 있었다. ‘차나이’가 3살 때 할머니는 그가 다른 아이들과 놀 때 항상 학교선생 노릇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역할을 아주 진지하게 수행하곤 했다.
이 즈음해서 그는 할머니에게 그가 전생에 ‘부아 카이’라는 이름의 선생이었고 학교에 가는 길에 머리 뒤쪽으로부터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의 부모 이름이 ‘키안’과 ‘용’이었으며, ‘수안’이라는 이름의 부인과 ‘토이’와 ‘팀’이라는 쌍둥이 딸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만약 ‘반 카오 프라’라는 마을에 데려다 주면 그가 살던 곳을 보여줄 수 있으며 그의 가족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그의 주장에 회의적이었으며 그의 그러한 주장을 묵살했다. 그러나 3살의 ‘차나이 추말라이웅’은 집요했다. 계속해서 울면서 ‘반 카오 프라’라는 마을에 갈 것을 애원했다. 마침내 할머니는 두 손을 들었다. 그녀는 차나이를 ‘반 카오 프라’라는 마을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시장 부근에서 버스에서 내렸는데, 3살 난 차나이는 그의 할머니 손을 이끌고 어떤 집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 그 집에는 실제로 ‘키안’과 ‘용’이라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차나이는 자신을 ‘부아 카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키안’과 ‘용’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자신이 8년 전에 살해된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아이의 말에 노부부는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하였으나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차나이와 할머니에게 며칠 후 다시 한번 더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며칠 후에 차나이가 다시 방문했을 때 그 집에는 호기심에 가득찬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차나이의 기억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가족중 한 여인을 가리키면서 차나이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차나이는 ‘물론 수안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수안은 ‘부아 카이’의 미망인이었다. 그들은 또한 ‘부아 카이’가 죽던 날의 일을 묘사해 보라고 말했다. 차나이는 그가 어떻게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부처님 목걸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갔는지에 대해 상세한 묘사를 하였다. 그는 부처님 목걸이를 목에 차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살해자들에게 그 목걸이를 뺏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그를 테스트하기 위해 그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총에 맞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속지 않고 계속 학교로 가는 길에 총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은 모두 정확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부아 카이’의 어머니가 6개의 벨트를 가지고 와서는 ‘부아’의 것을 고르면 차나이를 부아의 환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차나이는 전혀 주저함에 없이 한 벨트를 골라서 “엄마, 이것이 나의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부아’의 가족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차나이를 ‘부아’의 환생으로 인정을 하였다.
차나이는 전생의 물건들에 대해서도 집착을 보였다. 예를 들어 차나이는 가족들에게 죽기 직전에 구입하여 한번도 입지 않은 청바지를 어떻게 하였느냐고 물었다. 그의 미망인이었던 수아가 자신이 입었다고 고백을 하자, 차나이는 그녀가 항상 남의 물건을 사용한다고 투덜거렸다. 또한 당시 17세였던 전생의 딸을 만났을 때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아버지인 자신을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다.
이후로도 차나이는 ‘부아 카이’ 가족을 자주 만나러 갔다. 차나이가 4세가 되자 할머니인 프롬에게 말도 하지 않고 자주 전생의 가족이 있는 마을로 차를 얻어 타고 가곤 했다.
‘부아 카이’의 가족들이 그를 입양하려고 하였으나 차나이를 몹시 아끼는 할머니는 그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출처 : Ian Stevenson, "Reincarnation and Biology, VolumeⅠ", pp. 300~323,
Carol Bowman, "return from heaven", HarperCollins books, pp 60~64에서 재인용)
[ '프라모드'(미얀마)의 사례 ]
프라모드는 1944년 3월 15일 미얀마 바단지역 비사울리에서 대학교수인 바부 반케이 랄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 살이 지나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모한, 모라다바드라는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친척들이 비스켓을 사줄 때면 그는 자기가 모라다바드에 커다란 비스킷 공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형제와 아들 딸, 그리고 아내가 있는 모라다바드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말을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사하란푸르와 모라다바드에 지점을 갖고 있는 식품회사인 모한 브러더스 상사의 사장인 모한 랄의 형제 파라마난드였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위장병으로 인해 (프라모드로 출생하기 9개월 전인) 1943년 5월 9일 사하란푸르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1949년 초, 프라모드가 5살이 되었을 때 모라다바다에 살고 있는 친척을 통해 모라다바드에는 모한 랄이라는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모한 브러더스라고 하는 식품회사가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이야기가 모한 랄씨에게 전해지자 그는 친척 몇 사람과 비사울리를 방문해 프라모드의 아버지를 방문하였으나 그 당시(1949년 6월)에 프라모드는 멀리 살고 있는 친척을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케이 랄씨는 독립기념일에 프라모드를 데리고 모라다바드로 갈 것을 약속하였다.
1949년 8월 15일 프라모드와 아버지는 모라다바드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프라모드는 즉시 자기 형제를 알아보고 달려가서 껴안았다. 모한 랄의 집으로 가는 도중 그는 시청건물을 타운 홀이라는 영어를 사용하면서 지적하고는 자기 가게가 아주 가까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갔는데, 이 마차는 그 아이를 시험해 보기 위해 그 가게에서 서지 않고 지나가도록 하였다. 프라모드는 가게 건물을 알아보고는 마차를 세우라고 소리쳤다. 그런 후 마차에서 내려 이전에 파라마난드가 살았던 집으로 가는 길로 일행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 이르자 그는 전에 파라마난드가 예불을 올리곤 하던 방으로 들어가 예전처럼 불상 앞에 절을 했다. 그는 또한 자기 아내와 친척들을 알아보고, 그들도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도 상기시켰다. 그는 단 한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바로 그의 큰 아들로서 아버지가 죽을 당시 30세였으나, 그후 5년 사이에 무척 많이 변해 있었다.
전생의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된 후에, 프라모드는 자신의 사무실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얼마 후 그곳에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소다수 기계로 다가가서 탄산가스를 넣어 소다수를 만들어 내는 공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일은 결코 현재의 생에서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기계가 고장난 것을 알자 그는 즉시 수로가 멈추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사실이었다.
그 후 그는 파라마난드의 사촌인 카람찬드씨가 소유하고 있는 빅토리 호텔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앞장서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호텔에 들어서면서는 자신이 죽은 후에 증축된 듯한 맨 위층을 지적하며 변해 있다고 말을 했다.
모라다바드에 머물렀던 이틀 동안 그는 그 도시의 유명인사인 사후난다 랄 사란에 이끌려 메스톤파크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파라모드에게 시내에 있던 모한 브러더스 상사의 지점을 알아 맞춰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사람들을 사후 난다 랄 사란이 소유했던 구제라티 빌딩으로 데리고 가서 한때 모한 브라더스 상사의 지점이었던 가게를 가리켜 보았다. 메스톤 파크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라하바드 은행과 분수대 그리고 교도소등을 알아보고 이름까지도 대었다.
모라다바드 방문 후에 그 아이를 다시 비사울리로 데려가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전생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게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생의 아버지는 8월 17일 아침 일찍 그 아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를 데려가야만 했다.
(출처 : 프란시스 스토리(Francis Story), "환생(REBIRTH)", 장경각 pp.301~306,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상)(The 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 송산출판사, pp. 95~124)
* 위의 두 책에서 프라모드가 태어난 날을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환생’에서는 1944년 3월 15일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에서는 1944년 10월 11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둘 중 하나는 기록의 오기로 생각된다.
[ ‘추린’(스리랑카)의 사례 ]
“엄마! 나예요. 아들 ‘추린’이에요.”
스리랑카의 칸디 마을,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귀여운 소녀가 튀어나와 갑자기 한 노부인에게 다가가 안겼다.
“우리 아들이라니? 너가 ‘추린’이란 말이냐?”
소리를 지른 노부인은 말을 더듬거렸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추린’이라는 아들이 있었던 일은 있지만 이미 4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어 무덤에 묻혀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추린’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었다.
“너는 누구니?” 노부인이 다시 물었다.
“엄마, 나는 죽은 ‘추린’이에요. 여자가 되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거예요.”
그리운 음성, 그 말씨는 추린에 틀림없었다.
“오오, 틀림없는 추린이구나.”
소녀를 껴안은 노부인의 옆에서 소녀의 실제 부친이 어안이 벙벙하여 서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구나티레카’였다. 두 살 때 느닷없이 기묘한 것을 이야기했다.
“사실은 나, 남자였어. 이름은 추린이었고. 열 세살 때 급히 도로에 뛰어들어 ‘앗!’하는 사이에 나가떨어져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이 집의 여자로 태어나 있었어. 죽은 날은 1954년 11월 9일이었어.”
얘기하는 내용이 모두 진지해서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나티레카’는 마을에서 만난 노부인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이 일은 불교국인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만큼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 및 카르마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나서서 ‘피야다시’ 교수가 신중한 조사를 하게 되었다.
우선 소녀에게 전생에 관계된 것을 여러 가지 물어보았다. 학교시절에 그림을 좋아했다는 점, 죽기 전에 섬을 방문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탄 열차를 본 적이 있는 등 모두가 양친의 기억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피야다시 교수의 증거확인은 최종 단계로 들어갔다.
전생의 추린 소년에게는 형과 누이가 있었는데 30명의 젊은이 중에서 형과 누이를 찾아내게 하는 실험에 들어갔다.
소녀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과 누이를 단번에 찾아내었다. 참석했던 증인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소녀가 추린 소년의 후생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 일은 스리랑카 전 매스컴을 통해 알려져 1958년 스리랑카 최대 뉴스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출처 : 국내 모신문, 1996년 12월, 사후세계의 불가사의⑨, 백승열 편집위원)
[ ‘마웅 툰 카잉’(미얀마)의 사례 ]
‘마웅 툰 카잉’은 가난하며 배우지 못한 돗자리 짜는 사람의 아들로 미얀마에서 태어났다. ‘마웅 툰 카잉’이 4살(1925년 경)이 되었을 때 마웅의 아버지는 마웅과 그의 남동생을 이웃 마을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은 사탕수수 줄기를 한 묶음 가지고 있는 늙은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그 사탕수수 줄기를 장날에 팔 예정이었으나 두 어린 소년들을 보고 나서 소년들에게 사탕수수 줄기를 하나씩 공짜로 주었다. 어린 남동생이 줄기를 게걸스럽게 입안에 쑤셔 넣는 것을 본 ‘마운 툰 카잉’은 어린 동생에게 사탕수수를 주신 분에게 축복 받으시라는 감사를 드리고 나서 먹을 것을 타일렀다.
동생을 이처럼 타이르는 동안 ‘마웅 툰 카잉’의 기억의 문이 갑자기 열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아버지에게 그를 아버지의 어깨 위로 올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 어깨 위에 올라간 그는 ‘베품의 공덕’(불교의 10개의 훌륭한 공덕 가운데 첫 번째 공덕)에 관해 주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어린 소년의 ‘베품의 공덕’에 대한 설교는 구경하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어떤 종교적 스승이라도 그보다 더욱 훌륭히 설교하지는 못했을 정도였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어린 설교자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마웅은 설교를 마친 후 아버지에게 점잖게 말했다.
“아버지시여. 우리를 나의 캬웅으로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너의 캬웅이라니, 무슨 소리냐?”
“저 너머에 있는 승원입니다. 모르십니까?”
“너는 그곳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지 않느냐? 하지만 어디 한 번 가 보자꾸나.”
아버지는 말했다.
그들이 그 승원에 도착했을 때 어떤 노승을 만났다. 그 노승은 사실 캬웅의 대승원장이었다. 그러나 마웅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으며 노승에게 어떤 일반적인 인사말도 건네지 않은 채 그 노승을 단지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서 소년을 꾸짖으며 말했다.
“존경받으시는 스님께 너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작정이냐?”
그러자 소년은 관습에 따른 예절인 무릎을 꿇는 대신에 노승이 그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 양 노승에게 인사를 했다.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아느뇨?”
대승원장이 질문을 했다.
“알고 말고요.”
소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승원장이 놀라워 그 소년을 쳐다보자 마웅은 승원장의 이름을 말했다.
“너는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아느뇨? 누군가 너에게 얘기를 해준 모양이구나.”
“아니오.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요? 나는 당신의 스승이었던 ‘우 판데이사’(U Pandeissa)요.”
대승원장은 매우 놀랐지만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승단에 들어오기 전에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만약 네가 그것을 안다면 이름을 귓속말로 얘기해다오.”
마웅은 대승원장에게 귓속말로 그 이름을 말했다. 대승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이름을 소년으로부터 듣고는 소년의 발 아래 엎드리고 말았다. 그는 이마를 땅바닥에 대고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아. 이제야 난 알았습니다. 당신은 정말 나의 스승이시군요!”
대승원장은 마웅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을 승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 승원에서 마웅은 승원의 동쪽에 그가 머무르던 방을 가리켰다. 그곳은 바로 그가 명상을 하던 장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웅은 항상 앞에다 촛불을 켜놓고 향을 피워놓던 특이한 상(像)등 대승원장이 기억하고 있던 다른 많은 물건을 가리켰다. ‘우 판데이사’가 ‘윤 캬웅’(Yunkhyaung)이라고 하는 승원의 대승원장이었던 것을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마웅 툰 카잉’의 경우 전생의 전반적인 환경들을 기억하고 있을뿐더러 전생에서 습득했던 지식까지도 잊어버리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마웅은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으며 주위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쓰거나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노스님이 고대 팔리어 경전을 몇 권 보여주었을 때 그는 그 책들을 읽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두 아이들이 그들이 사는 마을로 돌아가려고 하자 대승원장은 승원 소유의 배 한 척을 타고 갈 것을 제안했다. 그들이 사는 마을과 그 승원은 모두 이라와디 강둑 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강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엔 여러 척의 배가 있었는데 마웅은 그 중 하나를 지적하면서 그 배가 자신의 것이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미얀마의 배는 고대 미얀마의 ‘물활론’(모든 사물은 그 고유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영혼의 거처’(Nats)라는 철학)에 따라 살아 있는 존재의 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배들은 대개는 화려하고 생동감 있는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으며 뱃머리에는 눈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배들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대승원장이 말했다.
“너는 이 배가 너의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배의 이름은 무엇인가?”
마웅은 즉시 그 배의 정확한 이름을 말했다.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 그 어느 누구도 ‘마웅 툰 카잉’이 윤캬웅의 전 승원장인 ‘우 판데이사’가 환생한 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자 하였다. 그는 사방으로부터 초대를 받았고 그의 가족들은 소년의 건강이 과로로 나빠질까 걱정했다. 그러나 마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동시에 자기 희생적인 일을 하면서 그의 일생을 보내신 분입니다. 그래서 나 역시, 부처님의 뜻에 따라 아낌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고무적이어서 수천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설교를 듣곤 했으며 언젠가 한 번은 사원 본당이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졌던 일도 있었다.
마웅 툰 카잉의 명성은 곧 당시 미얀마 총독이었던 헨리 버틀러경의 귀에까지 알려졌다. 여름 별장이 있는 메이묘에 머물고 있던 헨리 버틀러경은 그가 전해들은 이야기가 정말인지 알아보기 위해 소년을 불러 들였다.
마웅 툰 카잉은 총독 앞에서 매우 훌륭하게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종교적 교의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헨리경은 그 소년에 대해 대단히 흡족해 하면서 과자가 들어 있는 상자와 100루피의 돈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마웅은 다르마(法)는 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돈을 받지 않고 과자만 받았다.
한편 마웅도 총독에게 그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염주를 선물로 주었다. 헨리경은 마웅에게 물었다. “내게 이 염주를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말해 주시오.”
마웅은 그에게 대답했다.
“이것은 존재의 세 가지 성질인 아니차(anicca; 無常), 두카(dukkha; 苦), 아나타(anatta; 無我)에 대해 명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웅은 이 세 가지 단어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 작은 소년의 입을 통해 그런 심오한 진리를 듣고 나서 헨리경은 크게 감동하였다. 4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어떻게 나이 많은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년은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과 신실함을 가지고 말하였던 것이다. 헨리경은 ‘마웅 툰 카잉’으로 하여금 모든 미얀마 국민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전하게 했다.
“그대는 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가야 하오. 지위가 높건 낮건 상관치 말고 그들에게 설교를 해야하오. 심지어는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까지 설교를 해야 하오. 어느 누구도 당신보다 더 깊이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줄 수는 없기 때문이오. 악한 죄인들조차 참된 믿음과 성실한 호의 앞에서 마음이 점점 누그러질 것이오.”
그리하여 감옥의 문까지도 마웅 툰 카잉을 향해 열려 있게 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고 새로운 종교적 열정을 심어주었다.
(출처 :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Lama Anagarika Govinda), "구루의 땅(The Way of
The White Clouds)", 민족사, pp. 212~221)
[ '마이클 라이트'(미국)의 사례 ]
마이클 라이트(Michael Wright)가 세 살이 되었을 해, 그는 ‘캐롤 밀러’라는 이름을 중얼거리기 시작했으며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전에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와 자동차를 타고 있었는데 차가 길에서 벗어나 계속 굴렀다. 차문이 열리면서 자신의 몸이 튕겨져 나와 죽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며 그와 그의 친구가 사고가 나기 전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도로가의 휴게소에서 잠시 들리기도 하였다고 했다. 또한 그는 댄스파티가 열렸던 마을의 이름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월터 밀러’(Walter Miller)였으며 ‘캐롤 밀러(Carole Miller)’라는 여동생이 있었고 같이 타고 있던 친구 이름은 헨리 설리반(Henry Sullivan)이었고 했다.
‘월터 밀러라는 이름을 듣자 마이클의 어머니인 캐더린(Catherine Wright)은 깜짝 놀랬다. ‘월터 밀러’는 현재의 남편을 만나기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자친구였던 월터 밀러는 11년 전인 1967년 여름 18세의 나이로 사망했었다. 유망한 아마추어 예술가이고 인기있는 고등학생이었던 월터 밀러는 캐더린과 3년째 사귀고 있었으며, 어느 날 밤 댄싱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서 졸음운전을 하다가 자동차 사고를 내고는 튕겨져 나가 목이 부러져 사망하였다. 옆 자리에 ‘헨리 설리반’이라는 친구를 태우고 있었으나 그는 무사하였다. 그 당시 신문에 난 기사들을 종합해 볼 때 아들 마이클의 말은 거의 정확한 것이었다.
캐더린은 남자친구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으나 곧 그것을 극복하고 1년 후 다른 남자친구인 프레드릭 라이트(Frederick Wright)와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 첫딸이 태어난 다음 두번째로 마이클이 태어났다.
월터의 죽음 후 1년이 지났을 무렵, 캐더린의 꿈 속에 월터 밀러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월터는 캐더린에게 ‘자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은 존재가 아니다. 그는 돌아올 것이며 그녀를 위해서 다시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캐더린은 당시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임신 중이던 월터의 여동생 캐롤의 아이로 태어나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월터는 그 후 수년을 기다려서 캐더린의 아이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1978년 본 사례를 조사한 켈리박사가 1985년 마이클의 어머니와 다시 접촉을 하였는데, 당시 열살이 된 마이클은 전생에 대하여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며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출처: Ian Stevenson, "Children Who Remember Previous Lives", McFarland & Company Inc., pp. 83~87)
[ ‘산티 데비’(인도)의 사례 ]
현대에 와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전생(前生)’ 사례로서 1930년대에 인도 라자스탄 대학의 초심리학과 ‘헤멘드라 바넬지’ 교수가 조사한 것이다. (그는 이안 스티븐슨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생 사례 연구가이다.)
1926년 10월 12일, 인도의 델리에서 '쿠마리 산티 데비'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4세가 되자 소녀는 전생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쵸반 계급 출신으로서 델리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마트라(인도 북부의 도시)라는 마을의 노란 집에 살고 있었다. 남편은 ‘케달 나스 차우베이’라는 자로서 옷감을 파는 상인이었다........
한 은퇴한 교장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만나고 싶다고 했다. 교장은 소녀가 말한 마트라의 주소로 편지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산티 데비가 전생의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는 ‘케달 나스’로부터 답장이 왔다. 그는 전처와의 생활이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도 소녀가 말한 대로임을 인정하며 델리에 있는 친척이 우선 그 소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샨티 데비는 찾아온 친척되는 남자를 보더니 금방 ‘남편’의 사촌 형제 칸지 말이라고 알아 맞혔다. 이로서 그는 산티 데비의 전생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그 이야기를 들은 케달 나스도 망설임없이 델리로 달려 왔다.
소녀는 남편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케달 나스의 아내였던 전생에 관한 모든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며, 어느 방에 1백 루피가 든 상자를 묻었다는 것까지도 말했다.
1935년 11월 24일, 9세짜리 소녀는 마침내 부모와 함께 마트라 마을을 방문하였다. 신문기자, 정치가, 법률가로 이루어진 훌륭한 세 사람의 시민이 증인의 자격으로 동행하여 나중에 이 사례를 기록하였다.
산티 데비는 마트라 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중나온 케달 나스의 형을 알아보았다. 마차의 행선지는 전적으로 산티 데비에게 맡겨졌다. 마차를 달리게 하면서 그녀는 예전에 마트라에는 없었던 빌딩을 지적하기도 했다.
마차는 우선 부부가 신혼 시절에 살던 집으로 향했다.(그 당시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고향 사람은 ‘자이=자루루’는 어디냐고 묻자, 그녀는 집 밖의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것을 화장실을 뜻하는 마트라의 말이었다.
그 다음 일행은 그녀가 사망 당시 살던 집으로 향했다. 거기서도 그녀는 많은 친척을 알아보았고 집 모양도 자세히 알아맞혔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돈을 묻었다는 방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는데, 파낸 양철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중에 케달 나스가 이미 돈을 꺼냈음을 시인했다. 집을 나올 때 샨티 데비는 여러 사람 중에서 ‘예전의’ 부모를 찾아냈다. .........
(성철 스님, "영원한 자유", 장경각, pp.108~110)
[ ‘디스나’(스리랑카)의 사례 ]
디스나 사마라싱거(Disna N.K. Samarasinghe)는 1959년 4월 26일 스리랑카의 우도바가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식료품 상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인근 학교의 선생님이었다.
디스나는 1년 6개월만에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세 살 때쯤의 어느 날 어머니가 빨래하는 것을 보고는 불현듯 자신이 웨테와의 집에서 빨래를 했었다고 말을 했다. 어머니가 웨테와가 어디냐고 묻자, 디스나는 우도바가와에서 3.5마일 떨어진 마을이라고 똑똑히 대답했다.
그녀가 당시 살던 집에서는 아들 ‘마하트마야’와 며느리가 같이 살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차후에 밝혀진 바로는 그 아들 이름은 ‘가르디아스(R.M. Gardias)’였고 가르디아스의 어머니 '바바노나'는 디스나가 태어나기 15개월 전인 1958년 1월 15일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바바노바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들을 ‘마하트마야’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도 또한 이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그 후 디스나는 어머니에게 웨테와에서 그녀가 누렸던 삶에 대해 상세하게 계속 이야기를 하였는데 디스나는 특히 어머니가 요리나 빨래등 집안일을 하고 있을 때면, 그녀는 자기가 아마도 더 잘 할 거라고 말했다.
디스나는 그러나 결코 웨테와를 찾아가고 싶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마하트마야가 자신을 푸대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아들이 어머니 보다 아내를 더 좋아했으며, 아내에게 화장품이나 향수를 선물하기도 했지만 자신에게는 냉정하고 잔혹하게 대했다고 말했다. 아들은 심지어 자기가 요구한 것을 행하지 않으면 어머니를 지팡이로 마구 때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디스나는 현재의 어머니가 그녀를 그 곳에 두고 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연후에 웨테와를 찾는데 동의를 하였다.
디스와와 그녀의 어머니는 세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1964년 4월 24일 걸어서 웨테와에 갔다. 이때 디스나는 큰 길을 벗어나 약 반 마일쯤 논 사이의 지름길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디스나는 논을 빠져나오자 집 하나를 가르키며 “바로 저 집이에요.”하고 말했다.
집 앞에 간 그들은 한 여인이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디스나는 며느리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여인에게 인사를 했고 그녀가 마하트마야(전생의 아들)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디스나 일행은 자신들이 찾아온 까닭을 이야기했다. 연락을 받은 마하트마야가 집으로 오고 디스나의 진술을 듣게 되었다. 디스나는 집안의 여러 가지 물건들에 대해 설명을 하였으며, 이는 디스나의 이전 진술과 함께 그녀가 다시 태어난 ‘바바노나’라는 것을 확신토록 하였다.
한편, 디스나는 자기 집에 정기적으로 쌀을 팔았던 가게주인도 알아보았지만, ‘바바노나’의 친척들이 찾아 왔을 때 단 한 사람만을 분명히 알아보았다고 한다.
(출처 : 프란시스 스토리(Francis Story), 환생(Rebirth), 장경각, pp.195~208)
[ ‘제니 코켈’(영국)의 사례 ]
영국 노스엠튼셔(Northamptonshire)에 거주하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제니 코켈’(Jenny Cockell)은 어릴 때부터 그녀는 전생에 아일랜드에서 ‘메리(Mary)’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살았던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4살 때부터 ‘메리’에 대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많은 아이들을 놓아두고 젊은 나이에 죽어야 했던 젊은 여인이었으며, 살던 곳은 아일랜드의 어느 곳이었다. 또 전생의 그녀는 카톨릭 신자였으며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고 느꼈다. 남편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는데 아이들에게 무관심하였고 직업이 군인인 것 같다는 정도였다. 그녀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에 대해 당혹감을 느꼈다.
한편, 그녀가 어릴 때부터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살았던 마을 가는 길을 그리곤 했는데 언제나 그 지도들은 전에 그린 것과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그녀는 학교 교과서에 나와 있는 조그만 아일랜드 지도에서 메리가 살았던 곳을 짚어 보았는데, 그곳은 더블린 근처의 말라하이드(Malahide)라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 후 메리가 살았던 곳은 말라하이드(Malahide)였다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근처 책방에서 말라하이드 인근이 상세히 나타나 있는 지도를 구입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상당히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기억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에게는 없는 전생에 대한 기억을 자신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또는 자신의 환상에 불과한지 일말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답을 찾던 중 한 최면요법사에 의해 최면에 의한 전생퇴행 실험을 해 보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꿈에서 보았던 사실을 더 생생하게 알 수 있었고, 오닐(O'neil)이라는 성(姓)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아일랜드 더블린의 전화번호를 찾아 오닐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중 말라하이드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1930년대 초에 죽었으며 아이들이 6~8명 정도 있었던 메리라는 부인을 아는가를 수소문 하였으나 헛수고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일랜드 관광국에 연락하여 말라하이드 시(市) 지도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시 지도를 통해 메리가 있었던 집은 스워드 로드(Sward Road)에 위치하였고, 그녀가 꿈과 최면을 통해 본 교회와 푸주간은 처치 로드(Church Road)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달 조금씩 저축을 하여 여행 경비를 마련한 결과 1989년 6월 4일 마침내 30년을 넘게 기다렸던 전생의 고향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녀는 말라하이드(Malahide)에서 꿈에 나타났던 교회 등 눈에 익은 풍경들을 확인을 하고 난 후 전생의 집터 옆 개울가에 섰을 때 감격하고 말았다. 옛 모습 그대로의 개울이 전생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전생의 어리던 큰 딸이 어머니인 자기를 돕기 위해 이 개울에서 물을 길어오던 모습이 어제와 같이 떠오르자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여행을 끝내고 온 그녀는 본격적으로 전생의 아이들을 찾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꿈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 집 근처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소문한 결과 1930년대 죽은 아주머니의 이름은 ‘메리 써튼’(Mary Sutton)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군인이었으며 그녀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죽은 후에 여러 고아원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교회를 통해 아이들의 이름과 출생년도를 확인하였으나 이미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BBC, 일간 신문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수소문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그녀는 마침내 전생의 큰 아들이었던 써니(Sonny)를 포함한 여덟 아이들을 재회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전생의 아이들을 만나 그들이 어렸을 적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이야기하였다. 그 사건들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아이들이 덫에 걸린 동물들을 발견하고 자신을 불렀던 날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그녀는 그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선창에서 배를 기다리고 서 있던 것을 기억했다. 큰 아들 써니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큰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써니는 골프장의 캐디 일을 하기 위해 근처 섬으로 건너가곤 했는데 그가 간 날은 어머니가 항상 선창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곤 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전생의 큰 아들 써니는 제니가 전생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다.
1993년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어제의 아이들(Yesterday's Children)"이란 책이 영국에서 출판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2000년에는 CBS 방송국에서 동 이야기를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제인 세이무어 주연)하여 TV로 방영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간과 죽음을 넘어서(Across Time and Death)”라는 자서전 형식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출처 : Jenny Cockell, "Across Time and Death", A Fireside Book,
Roy Stemman, "Reincarnation", Piatkus Books, pp. 18~19,
김기태, “환생과 영혼의 불멸성”, 도서출판 문원, pp.116~133)
[ ‘이스마일’(터키)의 사례 ]
1950년대 말 터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의 한 정육점 집 아들로 태어난 ‘이스마일’은 태어난 지 일년 반쯤 되던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 집에 갈 테야.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스루무스’야. 아비스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러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 테야."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쉰 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러고는 아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싸음을 벌여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구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 그 뒤에 내가 이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데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후 이스마일은 자꾸 전생의 자기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런 소리를 못하게 하면 울고,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는데, 이스마일이 보더니 가장 큰 조각을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이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 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생에 살던 집은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더러 이 동네에 오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은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이스마일이 뛰어 나가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지? 내가 또 네 할례도 해주지 않았어?”
놀랍게도 그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과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이 소문이 자꾸 퍼져나가게 되었다. 터키는 회교국이기 때문에 회교 교리에 따라 윤회를 부인하기 때문에 만약 환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스루스가 전생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이가 세살이 되던 해 이스마일 부모는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그가 말하는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다. 가는 도중에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이는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 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치 않고 찾아갔다.
과수원에는 마침 전생에 이혼을 하였던 부인이 앉아 있다가 왠 어린 아이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되어 쳐다보았다.
이스마일은 전생의 부인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다.
"너 고생한다."
어린 아이가 중년 부인을 보고 "너 고생 한다"고 하니, 부인은 매우 당황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 남편인 아비스스루무스이다. 저 건너 동네에서 다시 태어나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하면서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굿간으로 데리고 갔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서,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 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말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맞는 것이었다.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제 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에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는데 이 때 일본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그 조사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준 것이 있었는데 돈을 빌려간 사람은 아비스스루무스가 죽어버리자 그 돈을 갚지 않았다. 이스마일은 그 돈을 빌려간 사람을 불렀다.
"네가 어느 날 얼마를 빌려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들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다. 이 사실은 죽은 아비스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사람,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조사단은 최종적으로 이스마일이 바로 아비스스루무스의 환생이라는 결론을 내는 보고서를 내었다.
(성철 스님, "영원한 자유", 장경각, 1990년, pp.105~108)
[ ‘스완 라타’(인도)의 사례 ]
스완라타는 1948년 인도에서 교육공무원의 딸로 태어났다.
스완라타가 세 살 반이었을 때 아버지가 그녀를 동반하고 휴가여행을 가는 도중 집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카트니라는 도시를 지난 적이 있었다. 일행이 탄 트럭이 그 도시를 지나고 있을 때 스완라타가 갑자기 운전수에게 ‘우리집 쪽으로 가줘요!’라고 졸라댔다. 이 때부터 스완라타는 차츰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서 카트니 시(市)의 파사크가의 딸인 ‘비야’였으며, 남편은 ‘슈리 친타미니 판디’였고 아들이 둘 있었다고 하면서 아들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었다. 또 목에 병이 나서 죽었는데 자바르푸울의 바브랫드 의사의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얼마 전부터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스완라타가 열살 때 그녀의 아버지 직장 때문에 쿠하탈풀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녀는 ‘슈리마티 아그니호트’라는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스완라타는 부모를 따라 한 교수 집에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초면인 ‘아그니호트리’ 부인을 보고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아요. 나는 카트니 근방에 살고 있던, 파사크가의 ‘비야’예요.”
입을 다문체 그녀를 응시하는 부인에게 스완라타는 말을 이었다.
“아니, 부인과는 티롤러 촌(村)의 결혼식에 함께 갔었지요....”
‘아그니호트리’ 부인은 그야말로 깜짝 놀랐으며, 그녀가 티롤러 촌의 결혼식에 갔을 때 '비야'와 부인 두 사람이 화장실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감명을 받고 비로소 딸의 주장을 사실로 믿게 되어 그녀의 말을 문서로 남기기 시작했다.
1959년 세계적인 전생연구가 ‘헤멘드라 바넬지’ 교수가 스완라타를 방문하였다. 바넬지는 이어서 카트니로 가서 거기에 살고 있는 예전의 가족들 이야기와 그녀가 말한 것들을 비교했다.
바넬지는 집에 관하여 9가지의 체크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스완라타의 진술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죽은 비야의 인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카트니시(市)의 전생의 집이 그녀 말대로 백색건물로 문은 검은 색 문이고 문에는 쇠빗장이 걸려 있었으며 현관에는 석판이 깔려 있었다. 집 뒤쪽에는 여학교가 있고 바로 가까운 곳에 석회공장과 철도 선로가 집에서 보였다. 그 집에는 석회를 바른 방이 네 개 있었다. 등등)
그 후 곧 스완라타 일가는 카트니로 찾아갔는데, 바넬지의 지시에 의해 비야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실마리를 주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잘못된 힌트를 보여주도록 했다. 그러나 스완라타는 금방 구분해 냈다.
끝내 카트니의 가족들은 스완라타를 비야가 다시 태어난 존재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얼마 동안 거기서 지내며 예전의 형제,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스완라타의 사례는 여러 '전생' 사례중 가장 객관적인 증거들을 지닌 최고의 완벽함을 자랑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스완라타는 특이하게도 2개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비야’로서의 전생 말고 뱅골지방에서 보낸 전생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5, 6세 때부터 그녀가 살던 곳과 전혀 언어가 다른 뱅골 지방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면서 뱅골지방 고유의 춤을 추었으며, 그녀가 20대가 될 때까지도 그 춤과 노래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