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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과잉
게시물ID : pony_259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불가필
추천 : 6
조회수 : 28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14 23:08:06

  햇볕이 반쯤만 통하는 천막은 따뜻해서 아늑했다. 한 켠에선 방울과 작두가 낡아가고 다른 한 켠에서 여러 약초들의 뿌리니 잎이니 하는 것들이 말라가 느긋한 냄새가 퍼진다. 늙은 버팔로는 그 향이 편안했다. “어떠요, 당골.” 그의 앞에서 등을 돌리고 앉은 노파가 고개만 돌려 물었다. 들소의 희끗해진 털끝이 배에 닿아 간지럽다. “할멈 생각마냥 근 것은 아닌께 그야 살면 되오.” 반나절이나 걸어오느라 다리를 후들후들 떤 들소는 다행이라며 참던 한숨을 몰아서 쉬었다. 병은 그녀가 우려한 것처럼 시아버지의 혼이 쓰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체한 것이었다.
  박수가 발굽으로 옆의 탁자를 더듬더니 말린 풀뿌리 몇을 들어 내밀었다. “요건 가도 묵어야혀. 귀않타고 안 묵음 진짜루 시아비 낯짝 뵈는 꼴 나오.” 고개를 숙여 몇 번이나 거듭 감사한 노파는 무겁게 일어났다. 입구로 나가려는데, 얇은 휘장이 펄럭이더니 젊은 수소가 튀어나온다. 오미야, 오메. 노파는 주저앉았다.
  “또 뭔 말이 남음시로 벌써 오여? 나가 가지라온 짝들은 다 챙겼느랴.” 젊은이는 늙은이를 다독여 보내고야 겨우 답했다. “지금 헛개 열매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포니들이, 그놈들이 또 왔다니까요?” 제자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시끄러웠고 스승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살짝 어둔 천막 안에 틀어박힌 스승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기모는 그것이 답답했다. “그것들이 와서 이런저런 물건도 뿌리고 하면서 이목을 끈다니까요. 게다가 아픈 이들에게 한다는 치료는 또 뭔지. 약초도 없이 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늙은 박수무당은 눈이 침침해 가늘게 떴다. 약초뿌리에 묻은 흙이나 조심조심 털더니 한참 후에야 제자를 슬쩍 훔쳐보더니 말했다. “별수 있겄냐. 지들이 헌단디.” 왜 이렇게 담담하나, 답답하다.
  그는 포니들의 의술을 믿지 않았고 환자들이 말하는 효험도 믿지 않았다. 그에겐 조상의 혼령과 후손의 치성을 약초로 빚은 것만이 산 것을 살리는 방도였다. “아니, 배를 째서 병을 직접 끄집어낸단 게 말이나 돼요?” 말이 아무리 열렬해도 스승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된갑제.” 기모가 스승에게 다가가더니 감히 그의 발굽에 들린 것을 빼앗았다. 속된 말로, 싸가지가 없는 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시방 뭐……” “왜 그렇게 미적지근하세요? 그놈들한테도 저한테처럼 화 좀 내보세요. 그놈들이 스승님 보고 뭐란 줄이나 아세요? 사기꾼이랍디다, 사기꾼.”
  늙은이는 화내지 않았다. 작게 웃기만 하는 그는 꼭 화낼 줄도 모르는 이인 것처럼 모습이 맑았다. “그람 단골레가 다 모리배지 아님 뭐당가. 조상이랍고 액이랍고 부적이나 붙야주고 가끔 굿이나 헌디, 특히 니처럼 맘 없이 몸뎅이만 둔 것이 모리배가 아님 뭣이여?” 반박하려던 기모는 말이 궁했다. 마음이 없다니. 어느 때에도 열도 성도 넘치는 그에게는 그저 오명이다. 오명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간 그놈들, 다 쫓아내야 해요. 고것들이 손들도 다 데려가서 지금도, 방금 그 할머니 빼면 아무도 안 오잖아요. 사기꾼이고 어쩌고 그전에 굶어죽을 판예요.” 스승은 혀를 딱 찼다. 마음에 들지 않는 투다.
  “허건은 개뿔이 허건이여. 허건 닌 그게 흠이랑께. 오는 놈 살릴 생각이나 허지는 쓸짝없이 버텅만 살아야꼬…….”
  말이 통하지 않아 기모는 답답한 울분을 참기 힘들었다. 계속해서 말이나 돌려대고, 얘기가 원점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아우.” 휘장이 다시 펄럭거린다. 투박한 뿔로 그 천 쪼가리를 밀치며 나간 그의 뒤로 스승의 목소리가 따라 나갔다. “여야! 올 때에 감재나 좀 가지오겄나!”
  한숨이 낮게 깔린다. 풀뿌리보다도 낮게끔.
  오래지않아 휘장은 또 나풀거렸다. “왔소.” 자그만 가방을 두르고 근방의 산을 타는 약초꾼이다. 그에게선 비에 젖은 나무껍질과 뜨끈한 구름 냄새가 났다. 늙은 버팔로가 그 향을 쫓아 코를 킁킁거렸으나 희미한 냄새는 좀처럼 멀리에서 다가오지 않았다. “요건 구엽초고, 엄나무랑 느릅 껍닥…… 등등 주란 건 다 챘으니 함 보시요.” 약초꾼이 탁자 위 빈 곳에 자루마냥 비슷한 가방을 내려놓아 흙먼지가 인다.
  “그라고 요거!” 적당히 늙어 중후한 맛이 있는 버팔로가 싱글벙글 웃는 꼴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나 그의 눈이 맑아 보기에 좋았다. 그는 다 해진 옷의 주머니에서 감쳐둔 약초를 꺼내었다. 흰 꽃부터 뿌리까지 통으로 있는 채이다. “요거 알지라?” 노안(老眼)이 번쩍 뜨인다. “옴시라…… 그기 삼사리 아녀?” “흐흐, 맞소.” 웃는 낯이 더욱 밝다. “삼사리꽃이제라. 전부덤 노래를 부르간만 보이길래 캤소. 어떠요, 하나 사겠시라?”
  수염을 떨며 한참이나 노려보던 노안(老顔)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돈 없어.” 손이 없어 재물도 없다. 많던 손들은 모두 유니콘들의 병원으로 가 뿔 억센 소의 천막에선 바람만 드나들었다.
  “그러요? 참 아쉽구먼.” 주름 적은 이는 곧 입맛을 다셨다. “이기 남잔텐 겁나게 좋은 풀인디. 어참 성님은 고런 게 싹 필요 없군만?” 즐겁고 가벼운 말에 천막 안이 뜨뜻하다. 무당도 웃어 푼푼하다. “허. 왜 낸테 그러능가. 자네야말루 올 년에는 장가들어야지. 뒤질 때도 혼저 뒤지겠어?” “알아서 허려요.” “풀쟁이가 허기는 개뿔을 혀…….” 약초꾼이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리는 것을 보고 그가 웃었다.
  “누구 오셨어요?” 휘장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어린 박수무당은 감자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이고 들어왔다. 약초꾼이야 그걸 보고 환호성을 내었지만 늙은이는 웃다가도 뜬금없이 화를 내었다. “그게 뭐시당가?” 자랑스럽게 내밀기를, “감자요.” 흙을 씻긴 감자가 탐스럽다. “아니, 감재나 가지오랜더니 감재를 가져와, 왜.” “네?” 이번에는 늙은이가 여간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말년에 말귀도 알아먹지 못하는 제자를 들여 마음고생이 심한 듯하다. “긍께 말헌 감재가 고 감재여? 그 뚱이 감재 말여.” 대화가 고착되어 흐르질 않으니 답답하단 것은 모두의 생각이었다. 약초꾼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그가 기모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고구마 말일세.” 젊은이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캐든 얻든 기모는 고구마를 가지러 다시 나갔고 사부의 탐탁찮은 기침은 휘장에 걸려서 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져 엎질러졌다. “것두 모르믄서 포니들이 어쩌네 저쩌네, 말만 많아야꼬. 약초나 묵고 버텅내 좀 없앰 좋겠군만은.” 설레설레 젓는 발이 약초꾼의 것이다. “함부러 말 마오. 어린놈이 어린 게 무어 허물이라고.” “금도 맞긴 헌디, 그러여도 나 다 늙어빠져서 스숭이질이나 할랑게 힘이 부치여. 좀 빨러게 알았음 좋겄는디.” 언짢은 기침이 나오고 또 뱉어진다. 목구멍이 끝없다.
  입에 댄 앞발을 쳐다보던 노무당은 그것을 배에 슥 문대었다. 스쳐지나간 자리가 지극히 붉다.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잖은 일이다. “고거 피 아녀. 괜찮소?” 행여나 남았을까 그가 박박 닦는다. “괜찮어.” 약초꾼이 약초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어느 나무의 껍질을 발굽에 들고 걱정하였다. “용헌 무당도 제 병은 못 고친다더니 딱 그 짝인디.” “필요 없당께. 나 안 죽어.” 호의를 밀쳐낸 그가 다시 통렬하게 기침하매 약초꾼은 그저 안쓰러이 등이나 쓸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서럽다.
  “이보요, 성님네 꼬망이가 뭐라 안 하던가? 성님마저 깨꼬닥허믄 마을이 완전히 말판이 된당께. 요거 그냥 줄 테니께는 푹 고아 묵고 얼렁 나서. 응?” 피를 토하면서도 늙은이는 기어코 약초꾼을 물리쳤다. 됐다니께, 됐응께, 됐시여. 거듭을 거절해도 물리지 않고 질리지도 않는다.
  “나라고 말놈들이 좋겄는가. 그냥 사니께 갖치 사는 거제… 뒈지면 단골레 될 저 기모놈 성깔이나 두려우이. 저 어리고 미친놈이 뭘 할랑가 작금도 모르는디 흙속에선 으떻게 알겄느냐.”
  약초꾼이 가슴을 탕탕 치었다. “걱정 마오. 나가 잘 지켜줄랑게요.” 그 말이 가소롭고 기쁘다. 간만에, 늙은 단골레는 크게 웃었다. “히여! 암, 내 니만 믿어. 놈도 촌구석도 잘만 구르겄제야?” 긴 대화에 지쳤는지 그는 기대던 의자에서 몸을 늘어뜨렸다. 피곤하여 쉬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하다.
  암요, 쉬오. 편허게. 그도 그를 따라 다만 빙긋 웃고 허허 웃었다. 벌써 몇 번째로 휘장이 펄럭여 약초꾼은 천막의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법을 쓰는 유니콘들에게도 굴하지 않고 뙤약볕에서도 고구마를 캐는, 젊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4102자. 원래 이런 소설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더 만족스러움. 당골과 단골레와 무당과 박수가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덤으로 의원 역할도 하도록 서술했습니다.

대화들을 구어적으로 표현하는 데엔 역시 사투리만한 것이 없는 듯. 물론 조금 변형된 것들도 있지만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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