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입대전 전역 후,
나는 어느 주유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사장님이 작은아버지 친구분이라 시급은 올림해서 천원단위로 끊어주고,(2천원대 시절임.)
예를 들어 813,850원이 내가 받을 돈이면 쿨하게 85만원이 입금되었고 장사잘되는 달에는 90~100으로 입금되었다.
학교행사로 빠져도
숙취로 못일어나 빠져도
요일을 햇갈려서 빠져도
봐주기는 개뿔...
친구조카는 내 조카라며 사랑의 헤드락에 걸려야했다-_-ㅋㅋㅋ
(고등학교때까지 레슬링하셨던 분임...)
지금은 안주지만 10여년 전에는 기름넣고 주는 사은품이 그 주유소의 흥망을 결정하던 시절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거 본사에서 뿌리는지 아는데, 이거 주유소에서 개별적으로 사서 주는거였다.
그래서 휴지는 2만원이상, 물티슈는 3만원이상, 장갑 생수는 5만원이상이란 체력장같은 기준이 있었고,
츄레라나 덤프트럭같이 한번 주유하면 최소 10만원 단위...
그것도 여기가 편하다고 단골로 오는 아저씨들은 들고가고 싶은대로 가져가시라고 두는 편이었는데 오다 주웠다며 깡깡 언 아이스크림 주고 갈지언정 뭐 가져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알바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분들도 어흠...모르는척 몇개씩 넣어드렸음.
말했잖아. 체력장같은 기준이라고...고쳐적으면 내 기록이여ㅋㅋㅋㅋ)
그러다가 포인트카드 단골이라고 최대한도인 10만원씩 끊지 좀 말라고 노래를 부르던 본사 형님이 오셨다
(말만 이렇게하고...단골유지용이라고 하면 그려그려, 그래도 적당히해. 나 구박받어라고 하던 8살차이나던 형님이셨음.)
그 형의 은색 산타페가 주유소 한켠에 멈추더니
"XX야. 이것 좀 옮기자."
라며 부른다.
"어??? 무겁네??? 형. 이거 뭐요???"
"사은품. 아.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어서와요. 뭐요. 이건 또???"
박스를 까니, 그 안에는 봉지단위로 포장된 보리쌀이 들어있었다.
5만원이상 주유하고 포인트카드제시하시는 분께 드려라.
그 형은 쉽게 말하고 갔지만...
그걸 줘야하는 현장의 알바들에게는 피가 말리는 일이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었다.
어??? 저거 뭐야??? 보리쌀??? 나는 왜 안 줘??? 뭐??? 5만원이상??? 나 여기 단골이야!!! 왜 안줘!!! 빼애애애애애액!!!!!!!!
차라리 4~5천원 넣고가는 다방오토바이배달들은 말이라도 통했다. 애초에 사은품에 욕심도 안냈고...
주유해줘요.라고 하고는 사무실가서 알아서 영수증도 끊어가고,
어쩌다 필요하면 다방에서 서비스로 돌리던 스포츠신문이나 요구르트 몇줄 주고 휴지하나 트레이드해서 가져가곤 했는데...
경차부터 억단위 수입차까지...
그 몇백그램짜리 보리쌀에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5만원이상 주유하고 포인트카드있으셔야준다는데도,
웃는 낯으로 안돼요 내가 욕처먹어요.라고해도 못알아먹고 내 감정을 팍 상하게 만들던 사람들이
그 빌어먹을 보리쌀행사로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2~3만원넣고 줘. 휴지도 줘. 물티슈도 줘. 장갑도 줘. 생수도 줘. 보리쌀도 줘. 한개가 뭐야. 몇개씩 줘. 나 여기 단골이야.
내가 여기 단골은 뭔 단골이야. 내가 여기 일한지가 연단위인데 처음보는 얼굴이구만...;;;;
원래는 학기중에도 일주일에 3~4일. 주말에 늘어져노느니 나와서 일하고 등록금에 보태던 나였지만,
질리고 질려버려서 그 학기에는 입대전 날려먹은 학점매꿔야한다며 주유소에 오지않고 신나게 놀아재끼고...
이거 ㅆㅂ 계절학기를 들어야하나???하는 지경에 이르며 방학을 맞이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니가 가긴 어딜 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시 주유소로 출근한 날 소장님이랑 야간타임 형이 나를 보고 엄청 웃어재꼈다.
시끄러버요. 라며 옷갈아입으러 안으로 들어가니, 그 엠병할 보리쌀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찹쌀에 데인 강시처럼, 마늘에 데인 흡혈귀처럼 이게 뭐야 빼애애애액!!!!하고 튀어나오자
"아. 그거 아무나 줘버려라. 행사끝났다. 어차피 본사에서 떠넘긴거니까 막 줘버려."라고 소장님이 말했다.
진짜 그냥 막 줬다.
나 집에 밥솥없어.라는 다방오토바이배달하는 동생한테도,
1~2만원 넣고 주유소사은품으로 한살림해가려는 일부 아줌씨들한테도,
부스에 앉아있다가 길거리에 아는 사람 지나가도,
그냥 막 주는데도,
내가 예수님이 되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는건지 이것들이 자가분열생식을 하는건지 도통 줄어들 생각을 안했다.
주랄땐 안주더니 흥칫뿡. 그래도 줘서 고마워.라며,
오늘은 또 어떤 이가 내 멘탈을 날릴까.라며 쓰린 위장을 안고 출근하던때와 다르게 분위기는 한층 훈훈해졌다는 개뿔...겨울이라 얼어뒤질뻔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흰색아반떼 그녀.
분홍색핸들커버가 씌어져있고, 헬로키티카시트가 앞뒤좌석에 다 있고,
항상 "3만원 주유해주세요."라고 하던 아침 7시 반이나, 저녁 6시 반에만 오던 곱창머리띠를 하던 그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연단위로 일하니까 자주 오는 사람들은 구분이 됨.)
공무원연금이란 문구가 들어간 S사 카드를 쓰는걸 보니, 본인이 공무원이거나 아빠가 공무원이거나 했을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던 그녀.
밥할때 섞어드세요.라며, 물티슈나 주던 그녀에게 나는 보리쌀을 검은 봉다리에 몇개씩 담아 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만 준게 아니라 다른 손님들한테도
주유소 뒤편 슈퍼에 가서 보리쌀 한박스를 주고 검은 봉다리 한뭉치와 트레이드해와
하나씩 감질나게 안주고 그냥 무한 살포를 한거였다.
"어서오세요~. 휘발유 3만원이시죠?"
아침 7시반. 그녀가 왔다.
항상 3만원이라, 그렇게 물으니 수줍게 카드를 건네며
"네. 3만원이요."라고 한다.
알았으니 주유구 열어주세요 (휘발유유증기때문에) 현기증난단 말이예요.
(항상 주유구여는거 깜빡하시던 분이었음. 어멋!!!하고 주유구대신 트렁크여는건 덤.)
라고 주유를 하고 결제를 하는데,
항상 창문닫고 주유끝나고 사인받으러 오던 나를 기다리던 그녀가 부스까지 나오셨다.
일부 성질급한 아저씨들이나 이러는데, 안그러던 사람이 그래서 진짜 깜짝 놀랬다.
"예???"
나 진짜 그 여성분보고 뭐 필요한거 있으세요???가 아니라 이렇게 말했음.
너무 당황한 나를 보고 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을 한듯 입을 여셨다.
"저...저기!!!! 저 남자만날 생각없어요!!!!
항상 주유할때마다 챙겨주시는건 감사한데 죄송합니다!!!!"
찌지직찌지직.하며 전표나오는 소리만이 그 적막을 깨고 있었다.
남자는 군대갔다오면 머리가 굳어진다던가...
상황파악하는데 시간이 꽤 오래걸렸다.
"저...저야말로 죄...죄송합니다!!!!
그 보리쌀. 재고가 많이 남아서 자주오시는 단골들한테 몇개씩 드리던거였거든요!!!!
저...오...오해하게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고백하지않고 차인 나와,
고백받지않고 차버린 그녀는,
말없이 전표에 사인하고 사인받고,
그녀는 그래도 잘 받아가던 물티슈마저 받지않고 황급히 떠나갔다.
그리고 그 날은 군대전역한날 딱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 날이었다.
그 보리쌀은 겨울방학 내내 일하며 뿌리고도 남았고,
그 주유소는 2주일에 3~4번와서 3만원씩 주유하던 단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