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란 것은 늘 그렇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해낼 수 없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곧바로 적응하게 된다.
이번의 경우는 눈앞에 놓여진 녹색 베레모와 각잡아 개켜진 개구리복장, 워커.
를 판매하는 펜션의 안내데스크였다.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간다.
이거 다 주세요.
베레모 각을 언제 다 잡아서 쓰나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하며
행여나 하자품이 아닐까 요리조리 뒤집어 보던 차에
매미 울음소리가 뇌를 흔들어대는 여름날의 아릿한 풀냄새가 소금비린내에 섞여 코끝을 스친다.
후각을 따라 시선이 옮겨진 곳에는 투명한 연녹색으로 정갈하게 채색된 논과 들판이 나타난다.
아 그 곳이구나.
주섬주섬 의복을 정제하고 발길이 닿는 곳으로 허리춤까지 자라난 잡초들을 휘적휘적 손으로 헤치며 다다른 곳은 작은 관사였다.
벽에 금간거 봐라 이걸 그냥 뒀네 빠졌네 새끼들 미쳤네 미쳤어를 속으로 되뇌이며
무엇에 홀린듯이 담쟁이가 건물을 휘감은 것 마냥 잔뜩 균열이 간 건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내 머리위의 빨간 글씨는 오랜세월 고된 바닷바람과의 사투의 결과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잠을 잘 수 없었던 그 지옥같던 며칠 후의 발 뒤꿈치와 비슷한 모습으로
다 헤어진 문틀을 넘어가는 내 머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관사 안은 생경했다.
하지만 이내 서류에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어대는 앳된 아저씨의 리드미컬한 손목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마치 전투수영을 하는 녀석들의 허리놀림과 비슷하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고개를 살짝 비틀어 바라본 아저씨의 얼굴이 제기에 올라간 바싹 말린 붉은 대추와 같다는 것을 보고
입을 비죽 내밀어 베레모의 앵카의 위치를 느릿느릿한 손동작으로 바로 잡는 시늉을 한다.
그 손은 이미 리듬을 잃은지 많은 시간이 지난 듯 보였다.
서류는 산처럼 쌓여있었고 아저씨의 리듬이 숨이 가파오를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아저씨의 리듬은 독주가 아니었다.
스읍 턱턱 터더덕 흡 하는 장단의 반복이었는데 흡으로 한구절이 마무리되는 부분에 다른 손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 호흡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보았더니 녹색베레모를 쓰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 줄지어선 녹색베레모들이 마치 녹색 지네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이었지만 입술 끝이 파르라니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전역자다.
올커니 이 주름진 대추알의 사내가 건조하게 연주를 하는 이유는 전역증을 발급하고 있는 게로구나.
흥미가 돋아 허리를 앞으로 쭉 내밀고 서류를 자세히 바라봤다.
요즘 전역증에는 무슨 퀴즈도 풀어야 되냐?
쉰 목소리가 도장찍는 소리로 가득한 침묵을 가른다.
일순 기분나쁜 고요가 후덥지근한 공기에 하나의 날카로운 점을 찍는다.
수많은 시선이 그 점에 집중된다.
내 입술은 이빨 사이로 말려들어가고 눈썹이 들썩인다.
그 무거운 침묵 사이로 무엇인가 비집고 들어온다.
그 무엇인가의 이름을 굳이 말해보자면 이렇다.
심술.
그걸 왜 네가 풀고 있냐. 빠져가지고. 애들한테 제대로 풀라고 안하냐.
동그래진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작은 한숨과 함께 볼펜을 녹색지네의 머리에게 넘겨준다.
슬쩍 들여다본 전역증의 퀴즈 답안은 그랬다. 개판이었다.
필시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대추머리의 아저씨는 상냥했다.
답안을 본인이 채워넣고 도장을 찍어 대한민국의 아들을 한 여자의 아들로 되돌려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녹색 지네의 길이가 끝이 보이지 않았기에 절차상의 귀찮음을 피하고자 함도 분명 있었으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만
분명 그는 상냥했다.
내 귀에 아름다운 리듬으로 반복되던 탁음이 정말로 탁해지기 시작했다.
됐다 그냥 네가 풀어라. 애들 안되겠네. 눈부신 해병대 정신을 물려받았다고 쓰는거 봐라.
멋쩍은 듯 팔짱을 끼고 돌아나와 보니 바람에 살랑이는 연녹색의 물결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막사가 보인다.
잘익은 대춧빛의 윤기가 흐르는 몸을 한 아저씨들이 지금 막 뭍으로 올라온 듯 등목을 하고 있었다.
필승.
등목을 마친듯한 아저씨 하나가 낮잠이나 늘어지게 한숨 돌리려 다시 펜션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불러세우며 손짓으로 내 베레모의 앵카가 삐뚤어졌다고 알려준다.
이 부대 남자들은 상냥하구나.
충성.
내리쬐는 태양이 목을 태우는 듯하다.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이 마치 막사를 가로지르는 균열 하나를 타고 올라가는 듯하다.
도장을 찍는 리듬보다 내 심장의 두근거림이 더 빨라진다.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미간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걸음을 재촉한다.
언덕을 오르는 발걸음 뒤로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을 애써 모르는 척 빠른걸음으로 풀숲에 몸을 내던진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힌다.
야 오늘 무슨 전달받은 거 있냐? 왜 외부사람이 군복입고 부대에 들어와 있어?
펜션에 도착한 나는 입고 있던 것들을 모두 벗어 소각장에 집어 넣는다.
빨간 혓바닥이 낼름낼름 잘도 받아 먹는다.
뜨겁게 일렁이는 공기가 세상을 일그러지게 만들지만 그것마저 기분이 좋다.
더운 기분을 시원하고 하고자 동네 아이들과 멱을 감으러 내려간다.
저 멀리서 훈련나온 부대가 보인다.
깊은 개천을 일렬종대로 건너며 하나의 흐트러짐이 없다.
필시 아까의 그 해병대 부대이리라.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얼굴에 흙을 뭍히고 아이들 사이에 몸을 묻는다.
야. 찾아내. 무슨 아놔 어이가. 미친거 아니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아저씨 하나가 나를 돌아본다.
시선이 부딫힌다.
반대편 시선의 주인이 미간을 우그리려는 순간 아이들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저녁을 재촉하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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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까 나는 장난치러 들어간건데
전역증 발급하던 아저씨는 진짜 뭐 된거고
그 부대 전체가 다 뒤집어졌을테고 장교들 징계 엄청 떨어졌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소름이 쫙 돋음.
문제는 그러고서도 결국 날 못잡았다는거.
영창.. 갔을까. 아저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