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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동 개싸움 이야기.(부제: 31사태)
게시물ID : humorstory_4467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요망
추천 : 0
조회수 : 7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9/28 11:21:04
우리는 놀랍게도 10년을 넘게 알아온 사이면서도 내, 외부적으로 감정을 앞세워 크게 다투거나 싸웠던 적이 없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1947년 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세계 재구축을 둘러싼 냉전이 2000년대 들어 동대문과 강남이라는 지역에서 재현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후 인간관계 편성의 재구축을 위한 이성적인 동남냉전체제였고 아버지의 3번 아이언을 훔쳐 들고 "이 씨발노마 빠큐!" 같은 개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와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 10년 사이에 '냉전(Cold War)'은 있어도 '열전(Hot War)'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0년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2016년 9월 3일, 약수동 사거리에서 이른바 '31사태'가 일어났다. 

31사태는 이랬다. 
나, K군, C군, 그리고 J남매 이렇게 다섯이서 가벼운 입가심을 할겸 베스킨로빈스31로 호기롭게 입장했다.
입장 당시 어린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건장한 남성손님 한분이 계셨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채  베리베리스트로베리를 낭랑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외쳐댔다.
순간 남성손님이 그것이 맘에 안들었는지 우리 일행에게 마치 돈따러 온 곤이를 조지려는 존나 카리스마 넘치는 아귀의 톤으로 '18'을 시전하였고, J군은 곤이와는 정반대인.. 그러니까 비범한, 용맹함, 젠틀함, 산전수전, 단맛쓴맛과는 거리가 먼 재기발랄한 톤으로 '먼저 하시라고요' 를 구간반복 하였다.

내가 볼때 이 상황은 새치기에 화가나니 널 후두려 패주겠다는 교양없는 남성손님의 대결신청을 흔쾌히 승락하는 분위기였다.
맘 같아선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지만, 순간 드는 생각은 저 경이로운 덩치가 안보이나?, J군이 많이 맞고싶나 보다, 요즘 돈이 궁한가 보다, 유치장 생김새가 궁금한가 보다, 약수 인생 26년 홈그라운드 필살기가 있나보다, 좋아요 받고싶나 보다 등등 이었다.
이윽고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K군과 J양이 중재에 나섰지만, 두 남자의 뇌는 주변사람들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눈과 입은 서로에 대한 아낌없는 덕담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 나는 J군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 대갈돼지새끼는 힘은 또 왜이리 센지, 뿌리치며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찬사를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이 둘을 떼어놓는게 이 상황을 타파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좋게 타이르며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이새끼는 마치 강백호라도 빙의한 듯 내 영광의 시대는 압구정 갤러리아때가 아니라 지금이다 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래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야 라고 말할 뻔 했다.

결국 나는 J군을 데리고 나가는데 성공했고 가능한 J군을 데리고 로빈스31에서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이녀석은 가게 바로앞에 앉아있었다. 술집으로 이동하자는 나의 말이 안들렸는지, 아니면 숨겨둔 필살기를 위해 기를 모으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곧 손님만 나오시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구경이 시작될거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J군을 향해오는 남성손님의 슈왈제네거와 같은 발걸음, 그리고 뒤따라 그를 막으러 오는 사람들. 모든 것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순간 내 사고회로에 오류가 났는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J군을 막기위해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난 직후 말리러 오는 줄만 알았던 C군이 갑자기 남성손님한테 멱살잡이를 시전했다. 이모든 상황은 남성손님이 나온지 3초 내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고, 내가 미리 예상했던 풍경보다 한층 더 교양없는 풍경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선시대때 있던 투견대회는 스포츠 정신에 의거하여 개와 개가 닭을 쫓아 싸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개포츠였지만, 이건 그냥 21세기판 개싸움이었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상실 한 듯 싶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찾기위한 선조들의 지혜로운 방안을 모색해보려 했지만 나에겐 무리였다.

동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셋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사회가 호락호락 하지 않듯이, 이 세명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성 손님은 거대해서 말할 것도 없었고, J군과 C군은 시선이 한사람한테 쏠리면 다른 한사람이 지랄을 도맡아 떨었다. 공격과 어그로의 완벽한 콜라보레이션 이었다.

특히 C군은 틈만나면 쌍욕섞인 덕담을 상대방에게 시전하였는데, 나의 가슴을 울리다 못해 존나 쎄게 내리치는 듯 한 문장이 많았다.
'야 때려봐라 깽값물을 돈은 있냐', '빠큐!! ㅆㅃㄴㅇ' 등등.. 이 사회란 프로세스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그리고 이새끼의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문장들이었다.
특히 빠큐를 외치며 높이 치켜든 그의 팔뚝과 중지는 아무것도 아닌것을 결의한 병신같은 존나 참병신의 모습이었다.

대충 상황이 마무리 되어갈 때 나는 그제서야 주변시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 이기는게 우리편은 아니지만 누가이기든 싸움을 응원하는 사람들, 투철한 시민의식에 신고를 하는 사람들, 모든 것을 데이터화 시켜놓는 기자 지망생및 따봉충등등.
이 사람들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챙피했지만 그래도 5명이라는 것에서 위안을 삼았다.

어린 동생들의 혈기왕성한 행동에 화가난 J양과 K군은 이 두 사람을 집에 보내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씩씩 거리는 와중에 무엇인가에 홀린듯이 술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곤이는 딴돈의 반만 가져갔지만, 우리는 결제한 아이스크림의 1/5만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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