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진주고 VS 진주농고의 세시간에 걸친 육박전
진주농고와 진주고교의 학생충돌사건은 결국 피를 보고 말았다. 진농고생의 집답투석에 보복행위를 감행한 진고학생은 약3시간동안 농고생의 낮, 쇠스랑, 호미에 대결하여 투석, 몽둥이질로 육박전을 전개한 끝에 진농고생 12명과 진고생 19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취재기자와 민간인 2명도 부상을 했다.
남강교를 경계로 하여 서로 대치했던 진농고와 진고의 학생은 9일 하오2시 양교학생대표의 화해로 일단 해산되어 귀교했다.상오10시40분 1천2백명의 진고생이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 진농고에 이르렀을때는 약1만평에 달하는 진농고 「탱자」울타리 둘레에는 1천4백명의 농고생이 수업을 중지하고 교실을 뛰어나와 교정나무아래서 진고생에 대항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진교생들은 농고입구의 경찰저지선에서 강력한 만류에도 굳게 닫힌 진농고의 정문과 뒷문을 뛰어넘으려했으나 농고생의 수비가 물샐틈없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석전만 되풀이하는 통에 농고생 8명이 먼저 돌에 맞아 교무실로 운반 긴급가료를 받게 되자 흥분한 농고생은 교실뒤편에 있는 농기구보관창고를 파괴 낮, 호미, 쇠스랑, 들것을 끄내어 정문을 돌파 진교생과 육박, 후퇴하는 진고생의 낙오학생을 난타 추격을 거듭 5백「미터」나 떨어진 남강교까지 밀려와 대치하게 되었다.일단 싸움을 그친뒤 남강의 남쪽에는 1천4백명의 농고생이 양손에 흉기를 들고 북쪽에는 밀려쫓긴 7백명의 진고생이 돌멩이와 몽둥이만으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진농고생은 미처 남강교를 건느지 못한 약 3백명의 진고학생을 색출하는 바람에 진고생은 부근인가에 숨고 남강물을 헤어건너가는등 혼란,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한 소동을 일으켰다.그런데 부산서 진주로 오는 대한금속 「뻐스」 경영504호에 은신 해오던 2명의 진고생은 농고생에 붙잡혀 몽둥이에 맞아 실신되고 「뻐스」마저 던진 돌과 몽둥이에 맞아 대파되었다.진주에서 처음으로 양교 충돌사건 때문에 양교학부형들은 연 1「킬로」에 걸친 도로변에 나와 싸움을 하지말라고 외치며 혹은 아들을 찾는등 아우성을 쳤다. 이틈에 취재하던 대구매일기자 성영재기자도 부상을 입고 학부형으로 보이는 민간인 2명도 부상을 입었다.하오 2시 길이 2백94「미터」를 경계로 남북으로 갈린 양교의 대치는 결사적으로 말리는 학부형과 시민들의 만류로 남강교 중앙지점에서 진고 김성호, 진농고 석상현 양학생대표들이 회합에서 먼저 양교학생들이 물러간다는데 합의를 보고 일단 학교로 돌아갔다. 부상자는 「앰블런스」에 실려 도립병원과 김윤양병원, 동대, 중앙병원에 분할 입원했다.원문 댓글론 영화 친구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