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1년 전 서울대생 자살, 그 뒷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479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냉법
추천 : 3
조회수 : 252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1/31 17:51:38
옵션
  • 외부펌금지

서울대생 유서 전문 


명환이 형이 딱 이맘때에 떠난 것 같아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군요.
생명과학부 12월 18일엔 뭔가 있나 봅니다.
저도 형을 따라가려고요.

힘들고 부끄러운 20년이었습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고,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제 자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더 이상 힘들고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으면 안 된다.” 엄마도 친구도 그러더군요. 하지만 이는 저더러 빨리 죽으라는 과격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게 누구입니까. 이 사회,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남은 사람들’입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고, 나를 괴롭힌 그들을 위해서 죽지 못하다니요.

또 죽는다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 이걸 주제로 쓴 글이 ‘글쓰기의 기초’ 수업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제 유서에 써도 괜찮은 내용일 겁니다. 제가 아는 경우에 대해서, 자살은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일어납니다. 다분히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입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저를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20년이나 세상에 꺾이지 않고 살 수 있던 건 저와 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아직 날갯짓 한 번 못 한 제가 아까워 잠실대교에서 발걸음을 돌렸고, 제가 떠나면 가슴 아파 할 동생과 친구들을 위해 옥상에서 내려온 게 수 차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힘이 듭니다. 동시에 부끄럽기 까지 합니다.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만 꺾일 때도 됐습니다.

무엇이 저를 이리 힘들게 했을까요.

제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입니다. 저는 합리를 논리 연산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어느 행위가 합리적이라 판단하는 것은 여러 논리에서 합리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합리는 저의 합리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비합리라고 재단할 수 있는가 하면 또 아닙니다. 그것들도 엄밀히 논리의 소산입니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입니다. 제 개인적으론 비합리라 여길 수 있어도 사회에서는 그 비합리가 모범답안입니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 가을에 무작정 여권 하나 들고 홀로 일본을 갔다 온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제주도에서 돌아온 다음 날의 일입니다. 즐거운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보통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날 들은 수업은 너무나도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생물학 시간에 인간과 미생물의 상호관계를 배우고 너무나 감명 받았습니다. 인간과 미생물은 정말 넓은 분야에 깊게 상호작용 하고 있었습니다. 연달아 있는 서양사 수업에서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유물론적 사관에 익숙한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8동을 나오는 길에 든 생각이 잠자리까지 이어졌습니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정신적 귀족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때만큼은 제가 그 정신적 귀족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수저 색깔을 논하는 이 세상에서 저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맛있는 걸 먹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목이 너무 말라 맥주를 찾았지만 필스너우르켈은 없고 기네스뿐이어서 관뒀습니다. 처갓집 양념치킨을 먹고 싶지만 먹으면 메탄올의 흡수 속도가 떨어질까 봐 먹지 못하겠네요.

혹시 제가 실패하더라도 저는 여러분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눈을 잃게 되거든요. 오셔서 손이나 잡고 위로해 주십시오. 많이 힘들 겁니다.

제가 성공한다면 억지로라도 기뻐해 주세요. 저는 그토록 바라던 걸 이뤘고 고통에서 해방됐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부조 좀 해 주세요. 사랑하는 우리 동생 유정이가 닭다리 하나나 더 뜯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지막으론 감사를 전해야겠습니다. 우울증은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로 완화됩니다. 상담치료로썬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도 있지만 ‘실질적’인 위로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거도 없는 ‘다 잘 될 거야’ 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 할 때 저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실질적인 위안이 된 사람으로 둘이 기억나네요. 하나는 서영누나입니다. “힘들 때 전화해, 우리 가까이 살잖아.” 이 한마디로 전 몇 개월을 버텼습니다. 전화를 한 적은 없지만, 전화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날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힘이 됐습니다. 누나 정말 고마워. 미안해. 결국 전화를 하지 못했네...

다른 하나는 지아님입니다. 지아님도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질문 하나 할 때도 매번 안부 물어봐 주고 이것저것 챙겨다 주고 고마웠습니다. 또 제가 약대 준비할 땐 교재도 빌려 주고 결과 발표 일시도 상기시켜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습니다. 약대 붙으면 맛있는 스시를 사기로 했는데, 결국엔 사지 못하게 됐네요. 고맙고 미안해... 행복하게 지내렴.

글을 쓰고 나니 너무 재미가 없네요. 젠장, 글은 재미있어야 하는데.






유서에 나오는 누나의 글


S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나는 S와 1년 반의 학보사 생활을 같이 한 동기다.
나와 S는 같이 밤을 새며 기사를 쓰고, 수업을 듣고, 술을 마시던 친구사이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살고도 힘들다는 전화 한 통 편히 할 수 없던 사이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S가 죽었다는 문자가 와있었다. 그것은 매우 농담처럼 여겨졌다. SNS에 접속하니 S가 유서 같은 걸 남긴 것 같았다. 너무 놀라 눈물도 나지 않은 채로 그 글을 읽어 내렸다. 유서도 참 지답게 썼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은 실감할 수 없었다. 부고를 받았으면서도 아니겠지, 라는 마음이 한 켠에 남아있었다. 계속 스크롤을 내리면서 긴 글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 미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S의 유서에는 고마웠던 친구가 딱 두 명 나오는 데 그 중에 첫 번째가 씨발 나였던 것이다. 나는 S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S와 단둘이 논적도 별로 없다. 우리는 성별도 다르고 부서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걔는 에이핑크를 좋아하고 나는 f(x)를 좋아한다.) 나는 S가 고등학교 동창들과 제법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학보사 내에서만 해도 나보다 S와 친한 동갑내기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S가 좋아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라고 늘상 얘기했지만, S는 늙은 내가 부담스러웠던지 매번 손사래쳤다. 자기는 아직 ‘성장기 청소년’이라나 뭐라나.

심지어 S와 단둘이 본 것도 벌써 네 달 전의 일이었다. 걔가 초딩입맛이라 한식을 싫어했기 때문에 우리는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러 갔다. 걘 맨날 녹두에 갇혀있어서 내가 서울대입구역까지는 좀 나오라고 보챘다. 그 여름 우리는 계절학기도 같이 들었다. 교양 수업인데 내가 맨날 안 나가서 걔가 나를 걱정해줬다. 재수강을 하기로 한 나에게 S가 친히 기말고사 족보까지 만들어 보내줬고, 그 마음이 고마워 내가 밥을 사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 그 무렵 나는 S가 세상을 버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S는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농담을 하고 희망적인 얘기만 했다.

즐겁게 얘기를 하고 가게 문을 나오는데 갑자기 서글퍼져서 눈물이 났다. 걔는 눈치 없이 실실 웃고 있었다. 나보다 덩치가 작은 그 아이의 팔을 살짝 잡고 포옹을 했다. 오히려 S가 내 등을 어설프게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나는 밤에 울어도 아무도 들어주던 이 없던 나의 스무 살이 생각이 나서 말했다. “힘들면 언제든 전화해. 나 올빼미족이라 밤에도 맨날 깨있고, 우리 집에서 너희 집은 야간할증 붙어도 5천원밖에 안 나오잖아.” 걔는 멋쩍어했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이후로도 S를 안 본 것은 아니었다. S는 조금 쉬더니 한층 더 뽀얘진 피부로 신문사에 나타났다. (사실 그건 비비크림이었지만) 나는 야근에 지쳐 피부가 썩어가던 참이었다. 그는 우연히 친 PEET를 잘 본 것 같다고 우리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다. 오히려 신문사에 있던 기자들이 걔가 너무 부러워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S는 그 날 뻔뻔하게 야식까지 다 먹고 갔다.

그리고 페이스북에는 S의 여행 사진이 자주 올라왔다. 원래도 혼자 뽈뽈 잘 다니던 애였지만 수업 부담도 없으니 더 신난 듯 했다. 걔가 하도 제주도 사진을 많이 올리길래 나도 뽐뿌 받아서 수업을 째고 제주도에 다녀왔다. S가 돌아오는 날에 내가 떠나는 일정이라 굳이 만나자고는 안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제주공항에서라도 만나 오렌지가 든 초콜릿을 같이 까먹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하루 더 남으라고 졸라서 걔 스쿠터를 얻어 타고 바다 구경을 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 나는 그러지 않았고, 우리는 그 이후로 볼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제는 얼마 안 남은 논문 발표를 위해 팀원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온몸이 떨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유서를 읽고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엉엉 울다가, 조금 정신을 차려 세수를 하고, 고맙게도 나를 걱정해주는 지인들의 전화를 받고, 끊고 나서 또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갑자기 이상한 생존본능이 솟구쳐서 중간에 밥도 먹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분리수거도 했다. 짐승처럼 이불 안에 갇혀 있다가 저녁이 되어 장례식에 다녀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못 있고 나왔다. 동기들과 나는 녹두에서 12시까지 술을 마시다 헤어졌다. 걔가 먹고 싶다던 치킨집도 갔다.

너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너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한다. 명문대생이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살려는 노오력을 덜 했다고 훈계를 한다. 언론에서는 이때다 싶어 네 죽음을 ‘수저론’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환원시킨다. 널리 퍼뜨리고 싶었을 너의 마지막 말이, 사람들에게는 한낱 가십거리로 소비되어 버린다.

심지어 넌 네가 기자일 적에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기사를 쓴 적이 없었다. 이공계였던 너는 정치, 사회, 외교 분야의 기사를 쓰기 위해 책을 달고 살았다. 과학 분야 기사에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문 지식을 뽐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기자라는 타이틀이 20살인 네가 감당하기에 버거웠을 텐데도 너는 충분히 잘 해줬지. 정말 고맙다.

아니야. 사실 난 네가 원망스러워. 왜 넌 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니? 나는 네 삶을 속단할 권리는 없지만 네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당장 20가지 정도 댈 수 있어. 그리고 그것은 죽음이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 때문에는 아니야. 살면서 네가 누릴 기쁨의 순간들이 당장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지. 너는 소박한 것에 만족할 줄 알았고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것을 즐거워했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작은 소품으로 자기 방을 꾸미는 것도,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세상에 일본과 제주도 말고 좋은 관광지가 얼마나 많은데 한 군데라도 더 가보지 그랬니. 세상에 맛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라도 더 먹어보지 그랬니. 아님 그냥 손목 잡고 식당에 데려다가 맛있는 것을 잔뜩 입에 퍼 넣었다면, 너는 어쩌면 안 죽지 않았을까.

유효하지 않은 위로만 가득했을 너의 삶이 나는 너무도 슬프다. 삶에는 고난도 있지만 소소한 기쁨의 존재감도 꽤나 크다고, 그것을 같이 실감해보지 않겠냐고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너를 질식시킨 것은 그놈의 흙수저가 아니라, 고민을 털어놓아도 매번 소득 없이 돌아오는 공허한 말들이었을 텐데.

...
그리하여 나는 더욱 살려고 해.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 주변에 누가 힘들어할 때 절대 눈감이 않는 으른이 될 거시다. 부조리한 세상을 직접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얼마 안 되는 내 주변 사람만큼은 챙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아픈 친구에게 공허한 위로를 하지 않으며 먼저 연락을 자주하며 세상의 즐거운 것들을 많이 알려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은 비록 비루한 고졸이지만 나중엔 정말 잘나져서 사람들이 의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이 될 것이다.

나는 내일 건강한 밥을 먹을 것이다. 내일 모레 논문 발표도 무사히 잘 마칠 것이다. 취미 생활도 열심히 할 것이고 운동도 꾸준히 할 것이다. 계절 때 재수강하는 교양 수업도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2월에는 여행도 갈 거고 취업 준비도 할 거다. 나는 너를 잊지 않고도 잘 살 것이다.

죽음은 전염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S가 유언을 널리 퍼뜨리려 한 것은 슬픔을 전염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S는 힘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위로가 돌아가는 세상을 바랐다. 오늘도 내일도 지겹게 살아남을 나는 그의 준엄한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살 것이다.







유서에 나오는 누나의 1년 후 글


작년 12월 18일 S가 죽었다. S는 녹두 자취방에서 혼자 메탄올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유서를 발견한 사람들이 S를 구하러 찾아오자 그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 추락사했다. 그때 S의 나이는 스무살이었다.

스무살. 모두가 그 때를 호시절이라고 부른다. 모두가 그 때를 행복했다고 기억하고, 그 나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엔 그렇지 않은 스무살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맺기에 실패해서, 가난이 힘겨워서, 주변에 잘난 사람들이 늘어나서, 자유의 기쁨보다 사회인으로서 지는 의무가 더 많아져서, 혹은 생각보다 성인이 된다는 게 별일이 아니어서 스무살은 쉽게 외로워진다.

그런 스무살이 거진 다 끝나갈 무렵에 S는 죽었다. 모든 스무살이 그렇듯 S는 ‘좋을 때지’라는 말을 주변으로부터 아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유난을 떠는 것에 비해 S는 도무지 그 스무살의 좋은 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의 호들갑만큼 더 불행해졌을 지도 모른다. S에겐 당장에 져야하는 짐들이, 당장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기 때문이다. S는 소소한 일상 속의 기쁨을 알던 사람이었지만 그 기쁨은 크디큰 의무감과 피로에 가려져 자주 고개를 비추진 못했다. 실제 S는 우울증 환자였으며 자주 죽는 상상을 했다.

나는 자주 작년 여름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S와 함께 들었던 계절학기가 종강하고 기념차 같이 파스타를 먹으러 갔을 때였다. 나는 그의 우울증을 알고 있었지만 그 단어를 면전에서 꺼낼 용기는 없었다. 대신 우리는 미래에 관한 얘기를 했다. 미래가 X같다고 욕하면서, 어떻게 하면 X같은 세상에서 덜 X같게 살 수 있을 것인지 얘기했다. 나는 빨리 결혼을 하고싶다고 했고, 너는 휴학을 하겠다고 했다. 너는 또 가까운 어딘가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도 했다. 당을 먹으면서 그런 말을 나누니 실제로 우리에게 조금 더 괜찮은 미래가 펼쳐질거란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힘들면 언제든 연락해, 새벽에도’라는 나의 마지막 인사말은 그렇게 비장하게만 발화된 것은 아니었다. 죽을 만큼 힘들지라도, 네가 진짜 죽을 리는 없다는 전제가 있었다. 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너는 비장했을까, 공허했을까, 아니면 나처럼 작은 희망을 맛보았을까. 어떤 쪽인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나에게 유리하게, 혹은 불리하게 영원히 진동하며 추측할 뿐이다. ‘네 유서에서 나에게 고마웠다고 적혀있었으니 그때 네게 희망이 조금이나마 싹텄는지 몰라, 하지만 실제로 너는 나에게 전화를 한 통도 걸지 않았으니 어차피 씨발 내 말은 너에게 존나 공허했겠군’이라며.

너는 죽어서 그때 일이 희미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살았기 때문에 그때 어떻게 해야 네가 안 죽을 수 있었는지, 혹은 최소한 덜 공허할 수라도 있었는지 미친 듯이 생각할 수밖에 없단다. 네가 없어 정답은 영원히 알 순 없겠지만, 만약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최선은 너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스무살은 원래 X같은 나이다’라고. 나의 스무살이 얼마나 X같았는지 네게 들려주고 싶다. 스무살이 좋은 나이라고 훈수 두는 사람들을 함께 꼰대새끼라고 깔깔 비웃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나의 스물 한 살, 스물 두 살, 그리고 스물 대여섯 살도 여전히 X같지만 스무살 때만큼은 아니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조금 더 살아보고 결정해보는 건 어떻겠니. 살다보니 ‘그때 안 죽길 잘했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순간들이 있더라.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들이 동력이 되어 엿 같은 일상을 살게 하고, 그런 삶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더라….

물론 이 생각은 ‘아무리 생이 X같아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S가 거기에 이미 동의를 안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저런 말을 전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공허하게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죽음으로 평온을 찾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나는 죽음이 너무도 무섭고 싫은 유약한 인간이다. 너의 명복을 빌 때 가슴 한 켠이 아직도 시리기에 그냥 계속 후회하며 살아갈 것이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