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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시조를 찾아서
게시물ID : military_195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앗싸좋쿠나
추천 : 7
조회수 : 90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4/13 16:39:33

그러니까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총맞아 죽은걸로 전유럽이 전쟁에 휘말린 1차대전은 그야말로 지리한 참호전의 연속이었다. 공격 준비 사격으로 신나게 포격을 가한뒤 달려간 보병들은 기관총의 밥이 되어야 했고 대대적인 진군 따위는 기대할 수 조차 없었다. 단적인 예로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20만 독일군 30만이 사망하고난 후 영국군이 전진한 거리는 겨우 '15Km'에 불과했다.

 

이런 미친짓이 연속해서 벌어지던 가운데 영국의 공병대중령이던 스윈턴이라는 사람이 트랙터를 보고 불현듯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 저위에 철판 둘러치고 돌격하면 기관총의 세례를 버티고 참호선을 돌파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스윈턴은 이런거 함 만들어 보는거 어때요 했는데 가볍게 무시당했다. 이런 스윈턴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사장당하나 했는데 여기서 처칠이 등장한다. 당시 해군 장관이던 처칠은 스윈턴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며 해군에 이 아이디어를 실용화 시켜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처칠의 명령으로 해군이 연구에 달라붙자 스윈턴이 육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해군이 연구한다는데 육군이 가만히 있을겁니까 뭐 이런건데 결국 육군도 여기에 달라붙어 공동으로 연구를 하게 되고 1915년 드디어 최초의 전차라 할 수 있는 '리틀 윌리'(Little Willie)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리틀윌리는 시속 5km의 굼벵이같은 속도에 뻑하면 고장나서 퍼지기 바쁜데다가 생긴 모양새 역시 '애들 장난감'같은 물건이라 욕만 먹었고. 그후 1916년 리틀윌리의 문제점들을 보완한 MK1 '빅 윌리'(Big Willie)가 등장하였다.

 

리틀윌리 되겠다.

 

리틀윌리 때문에 빅 윌리에 대한 반응 역시 별로 좋지 못했는데 어쨌든 그동안 만든다고 들어간 돈고 있고 하니 한번 써보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드디어 빅 윌리가 실전에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영국 해외 파견군 사령관이던 헤이그가 이놈을 투입하기로 했는데 총 59대의 빅 윌리 중에 49대만이 정상작동했고 그중에 17대가 작전 직전에 퍼져버리고 그나마 남은 놈들이 가다가 포탄 구덩이에 빠져서 못나오고 고장나고... 하여간 59대중에 딱 9대가 남아 돌격을 했다. 무지하게 천천히... 하지만 탱크의 위력은 대단했다. 뭐 위력 자체는 사실 별 볼일 없었지만 희한하게 생긴 기계가 기관총탄을 튕겨내며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독일군에게 공포심을 안겨주었던 것이다.(암전차 수전차가 있긴한데 그냥 넘어갑시다)

 

이런 병사들의 공포감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군 지휘부는 75mm포로 탱크를 잡을수 있다고 하면서 탱크 잡는 법을 병사들에게 가르치며 어떻게든 일선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려 애를 썼다.

 

MK1 '빅 윌리'

 

솜므 전투에서 전차의 유용함을 깨달은 헤이그는 곧바로 더 많은 전차, 더 나은 전차를 요구했다. 그리고 1917년 캉브레 전투에서 342대의 전차를 집중 운용한 영국군은 별다른 희생없이 독일군의 진지를 순식간에 돌파해버리면서 전투 첫날에만 8천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는 기염을 토했다. 참호를 파기위한 삽질과 포격 그리고 무의미한 돌격으로 계속되었던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이 탱크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PS:탱크라는 이름은 MK1의 개발과정에서 유래했는데 이 신무기를 노출하고 싶지 않았던 영국은 당시 공장 노동자들이 MK1을 보고 물탱크를 닮았다고 하는데서 착안 MK1을 탱크라고 불렀고 이 탱크는 현재까지 전차를 통칭하는 말로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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