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꿈을 꿨다.
내가 살고있는 이 세상이 여러 번 재구성되는 꿈을 말이다.
때로는 굉장한 발전을 이룬 세계로,
때로는 우리가 지금 이룩한 문화와 발전수준과 별 차이가 없는 세계로,
또 때로는 인간을 찾아보기 힘든 폐허가 된 세계로...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세계의 재구성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변화는 바로 인간관계의 재구성이었다.
세계는 주기적으로 재구성되고, 자고 일어나면 어제까지 있었던 일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는 사라지고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진다.
불과 얼마전까지 알던 사람은 나와 전혀 모르는 관계가 되기도 했고, 어제까진 단순히 지인에 불과했던 사람이 내 가족이 되어있기도 했다.
죽을듯이 으르렁거리던 상대와 친한 친구가 되어있기도 하고, 뭐든지 해줄 수 있을 것 같던 친구가 날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 속에서 위화감을 갖지 못했다.
분명 생김새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새롭게 덧씌워진 그 기억이 원래 자신이라는 듯 세계에 의해 입력된 정보에 따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세계.
그런 세계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고 반복되지만 모두들 당연한 듯이 새로운 세계를 어제까지 살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때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쩌면 나는 그 세계에서에 조금 특이한 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세계가 바뀐 직후에는 잠깐이지만 세상이 변화했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던 이전 세계의 잔재가 기억속에 강렬하게 떠오르곤 했다.
데자뷰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더 훨씬 더 선명한 인상으로 말이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던 사람이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언젠가 그 사람과 함게 보냈던 시간의 기억이 떠오르거나,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목소리를 어제 일처럼 기억해내기도 했다.
언젠가 폐허가 된 낡은 학교의 도서실 구석에서 울고있던 소녀를 안아주며 위로해주었던 일도 있었고,
또 언젠가 몇 명의 친구들과 해외를 여행하며 웃고 떠들던 기억도 남아있었다.
데자뷰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강렬하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한 기억.
하지만 내가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새로운 지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매번 바보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결국 눈을 떠 정신을 차려보면 폐교의 도서실은 깔끔하고 정숙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 되어있었고,
내가 누워있던 곳은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이국의 숙소가 아닌 내 방 침대이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세계가 재구성된 과정에서 생긴 갭 때문인지 나는 종종 가벼운 위화감과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난 분명 다른 장소에서 것을 하고있었는데...'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위화감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무뎌지게 되면
나 또한 오늘도 길 거리에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 A중의 하나가 되어 새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몇 번의 삶을 경험했을까?
꽤 많은 세계가 재구성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은 알 수 있었지만 그 기억들은 아주 일부만이 남고 대부분 사라졌다.
종종 내 기억의 저편에서 가벼운 위화감과 함께 답답한 감정만을 제공할 뿐.
그리고 그렇게 반복되는 세계 속에서 나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내 방의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번에도 느껴지는 강렬한 위화감.
난 본능적으로 이번에도 세계가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도 나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인물로, 또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 때 만큼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매번 눈을 뜨면 혼자였고 문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맞딱뜨렸지만 이번 만큼은 눈을 뜬 순간부터 누군가를 발견했다.
나의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
이번 세계에서 주입된 새로운 기억에 의하면 여기서 그 사람은 내 여동생인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에게 있을 리 없는 여동생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 사람의 그 모습이, 그 목소리가 무척 익숙하다.
그녀였다. 언젠가 본 적 있던, 폐허가 된 도서실의 그늘진 곳에서 울고있던 그 소녀였다.
세계가 구성된 직후라 기억이 일부 남아있던 나는 무의식중에 큰 소리를 낼 뻔 했지만
내 머리맡에 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쓸어주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일순간 말문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표정과 안타까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건 꿈이야. 전부 꿈이야. 그러니까 잊어버려. 이번에는 여기가 네 집이야."
...라고 말이다.
그 행동은 무척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꿈 속이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흥분으로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만났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나 말고도 이 세상의 이상을 감지한 다른 사람을 말이다.
그녀에게는 묻고싶은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직후,
나는 익숙한 메시지 알림음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내가 늘 보는 익숙한 고시원의 천정.
나는 그 천정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아쉬웠다. 간절할 정도로 아쉬웠다.
원망스러웠다. 이른 아침부터 카톡질을 해온 친구녀석에게 괜스레 화가나고, 그 내용어 정말로 쓰잘데없는 내용이라 더욱 더 화가났다.
...그녀는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었다.
그것도 나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이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나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녀는 세계가 재구성되는 와중에도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특별한 사람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나 처럼 가벼운 위화감 정도로 이변을 깨닫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기억을 유지한 채 몇 번이고 재구성된 세상을 살아오던 사람.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몇 번이나 되는 세상의 변화를 맨정신으로 지켜봐 왔을까?
이 세계가 수 없이 많은 재구성을 반복하는 가운데, 어제까지 알던이가 모르는 사이가 되고
또 어제까지 전혀 모르던 사람이 친근하게 대해오는 세계.
그 세계를 모든 기억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어쩌면, 내게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에서처럼 언젠가 그녀와 나 사이에는 특별한 일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롭게 구성된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다른 사람에겐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고 전혀 다른 인간관계가 구축되어있는 세계다.
만일 내가 그녀를 기억하더라도... 그녀도 나를 기억이 남아있을지라도... 그 마음을 전할 수 없는 씁쓸한 세계...
어쩌면 그녀는 오늘도 이 세계의 어딘가에서 또 다시 몇 번째일지도 모를 재구성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