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요즘 드라마 무빙을 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활동하던 시기부터 현재가 배경이다. 초능력을 가진 전직 안기부 특수요원들이 은퇴 후 자식을 돌보며 자영업을 한다. 돈까스 가게, 미용실, 치킨집, 슈퍼마켓, 중고서점 등 장사한다.
등장인물 중 치킨집을 운영하는 장주원(류승룡), 일명 ‘구룡포’에 집중하는 에피소드 내용이다. '아빠는 일용직을 10년 동안 했다고. 4000일의 일용직으로 집을 샀는데, 자신이 학교에서 일으킨 문제 때문에 모은 돈과 집을 잃었다고.’ 장주원의 딸 장희수가 내레이션 한다. 시간 배경은 장주원이 안기부에서 도망치고 치킨집을 하기 전이다.
장주원은 딸(희수)과 함께 여러 번 이사 다니며 일용직을 전전한다. 몇 년이 지나고 자리 잡은 직장은 탄광이다. 장주원이 희수와 티브이를 보며 식사하는 장면에서 “아빠, 귓속에 뭐가 묻었어!”라고 말한다. 장주원은 “어? 씻어도 탄이 묻어있네? 나 씻은 거 맞아.”하고 너스레 떤다. 희수는 다시 “아빠, 폐쇄공포증은 괜찮아?”하고 묻고 장주원은 “적응했나 봐,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하고 웃는다.
드라마가 드라마만 같지 않은 게 늙는 건가 보다. 일용직이라는 단어. 아픈데 아프지 않다고 웃는 일. 오랫동안 돈을 모으고 그 돈을 한 번에 잃는 경험. 그러고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을 하는 사람.
아흔이 넘은 내 할머니는 티브이를 볼 때면 걱정스러운 말을 하시곤 했다. “어, 저, 저, 아가, 저 사람들 좀 꺼내 봐야. 워메, 싸운다, 큰일 났어야.”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티브이 뒤편을 살펴보시는 것이다.
며칠 전 여자친구와 드라마 ‘무빙’을 보고 밖을 산책하며 이 이야길 들려줬다. 여자친구는 “오빠가 할머니 닮아서 유머감각이 좋구나!”하고 탈룰라를 시전 했다. 내 취지는 나이를 먹을수록 드라마에 이입하는 공감능력이 커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옛날 옛날에 내 아버지는 교회 선생님이었고 엄마는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맘에 들었고 엄마의 부모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엄마의 마음을 얻거나 데이트 신청을 하기 전에 말이다. 엄마는 아주 어릴 적에 열병을 앓았는데 약을 잘못 지어먹어 귀와 목소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엄마의 그런 특성 또한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절 엄마는 교회의 다른 오빠를 맘에 두고 있었다는 말을 몰래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눈 시리게 넓은 수박밭을 일궜었다. 후엔 철물점을 운영했고, 정수기 영업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목수를 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한 때 마동석보다 조금 부족한 덩치를 갖고 계셨는데 몸이 줄어들 때쯤 시장에서 농산물 하차일을 했다. 또 나중엔 사무실을 얻어 대형 냉장고와 트럭을 산 뒤 식자재 유통 사업을 하셨다.
명절이 되어 시골에 내려가면 창고로 쓰는 방에 들어가 보곤 한다. 방 책꽂이엔 두꺼운 붉은 표지에 스프링노트로 된 촌스런 앨범이 있다. 앨범을 넘기다 보면 호리호리한 아버지가 슬림한 청바지 위로 웃통을 벗고 라이방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외국인들과 함께 밝게 웃고 있다. 내가 실패한 정관수술 때문에 태어나기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들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추억이나 경험, 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신다.
기밀작전을 수행하고 생사의 줄 위에서 총을 쏘고 딜레마에 빠져 고뇌하는 일도 대단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랜 일용직으로 돈을 모으고 그 돈을 모두 잃고도 가족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건 어떨까. 자식과 부모를 돌보는 일, 즐겁지 않은 일을 오랜 시간 해나가는 일, 책임지며 살아가는 일은 어떨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젊은 날을 상상해 본다. 돌아오는 명절엔 옛일을 여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