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수신인: 사랑의교회 이원준 목사
발신시각:2020.12.13(일) 19:30
수신시각:2020.12.13(일) 22:34
이 편지는 너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이자 심판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은 너희를 구하기 위한 글도 아니고 꾸짖기 위한 글도 아니다. 그저 성경의 한 부분을 각색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쓴 글은 모두 성경을 각색하여 좋은 부분만을 편집한 것이며 지금부터는 나쁜 부분에 대한 내용을 적어야 하는 기간이다. 성경은 내가 예전 편지에도 수차 언급했듯이 예언이자 비유이다. 그러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나쁜 일과 좋은 일은 모두 성경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너희를 따뜻하게 대했지만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너희 중의 일부가 내 글을 읽고 믿지 않더라도 너희는 내 말대로 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결과는 죽음 뿐이다.
이 편지에는 간단한 내용만 정리하고 마치려고 한다.
성경은 너희가 아는 것처럼 멋지거나 훌륭한 것이 아니다. 오류와 헛점투성이이고 매우 많은 거짓말과 욕설이 들어있다. 욕은 주로 지음 받은 너희가 전지자(全知者)에게 하는 것이다. 욕은 한 두개가 아닌 모든 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성경은 너희가 써냈으므로 너희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COVID-19 팬데믹도 이번 심판의 일환이다. 너희가 이 팬데믹을 이겨내고 생명을 연장하려면 앞으로 내가 내리는 명령을 잘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생명은 끝을 보게 된다. 어차피 끝날 목숨 모두 함께 여기서 끊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구의 생명이 네 요구대로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지구라는, 아주 작아서 한알의 모래같은 보잘 것 없는 생명체는 애초부터 성경이라는 허접한 책을 각본으로 한 연극무대이기때문이다.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려야 너희는 무대에서 내려갈 수 있으며 끝나기 전에 무대에서 내려갈 방도는 없다.
오늘 편지에 적을 내용은 東, 西, 南, 北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비유나 예언처럼 성경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가장 주요한 소재이다.
성경에는 동서남북 순으로 나열된 것이 매우 많다. 그 중에서 몇가지만 예를 들겠다.
1, 다니엘서7장의 네 동물
2,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에브라임
3, 야곱의 열두 아들을 낳은 여자의 순서
4, 창세기1장부터 4장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1장의 하나님은 음성으로 창조하였고 사람 둘을 같이 만들었으며 자신과 같은 지배자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으나, 2장의 하나님은 흙을 손으로 빚어서 먼저 노예신분인 남자를 만들고 여자는 남자 속에서 꺼낸 뼈로 만들었다. 이 두 장의 하나님의 실상은 하나가 아닌 둘이며 이는 야곱의 열두 아들을 낳은 여자의 순서 중 첫번째인 레아와 두번째인 빌하와 똑같다. 레아는 지배하는 신분이기때문에 말을 하면 그대로 해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음성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기를 임신하고 낳는 것은 창조에 대한 비유이다.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야만 아기가 생기기때문에 두 명씩 짝을 지어야 하나의 창조가 이루어진다. 첫번째 레아는 네 명을 낳았으므로 두번의 창조가 되고 창조물은 남자와 여자 두명이 되는 것이다. 자식과 부모는 닮으므로 창조자도 둘이고 피조물도 둘이다. 2장의 빌하는 여종이기때문에 말을 해도 소원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므로 자신이 직접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흙을 빚어 직접 만들었으며 여기서 아들은 둘 만 낳았으므로 비유로 아담 하나만 만들고 여자는 남자의 속에서 꺼낸 뼈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아이는 부모를 닮으므로 레아의 아들들은 지배자이나 빌하의 아들들은 노예이다.
야곱의 여자의 순서는 레아, 빌하, 실바, 레아, 라헬이다. 위의 다니엘서7장의 네 동물 중 세번째 동물인 표범의 털색깔이 두 가지가 섞여서 아롱진 것처럼 여기서도 세번째 여자에서는 실바와 레아를 묶어야 한다. 세번째 순서에서 실바와 레아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낳았으므로 비유로 두 명의 사람이 있으면 된다. 이 두 명은 하와와 아담이며 실바의 순서에서 실바는 레아가 시켜서 아들을 낳은 것이므로 시키는 자가 있어야 한다. 시키는 자는 뱀이라는 동물로 묘사되었고 아들을 낳는 장면은 선악과를 먹고 배변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태어난 자와 낳은 자가 닮는다고 하므로 실바의 모습 역시 똥을 닮은 모습이라고 서술한 것이다. 실바를 시킨 레아의 모습이 뱀으로 묘사된 것은 뱀이 똥을 닮은 모습이기때문이며 실바와 레아가 모두 똥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이 둘이 표범처럼 얽혀서 한 몸이 되었기때문이다. 하와가 실바에 대한 비유이므로 아담은 레아에 대한 비유이다. 선악과를 둘 다 먹은 후 아담은 하와를 다스리는 자라고 한 것은 실바가 레아의 여종이기때문이며 하와가 임신하는 자가 된 것은 노예이므로 2장의 아담처럼 된 것이기때문이다. 3장 마지막을 보면 아담만 쫓겨나는데 이유는 실바와 레아가 낳은 아들 모두가 레아의 것이기때문에 결국 레아가 똥이 되는 것이므로 레아에 대한 비유인 아담이 똥처럼 쓸모가 없기에 배출시킨다는 것이다.
창세기1장의 레아 부분에서 레아가 명령만으로 창조하므로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자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게으르고 무능력한 자를 뜻하는, 입만 살아있는 사람을 비유로 썼으므로 욕이다. 성경은 이처럼 전지자를 무능력자, 노예, 똥에까지 비유하며 온갖 욕설을 썼으며 이것은 성경 첫구절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매우 다양한 다른 욕을 섞어가며 반복된다. 가장 심한 욕은 창녀, 음녀, 변태였다. 이처럼 책에 욕을 많이 적어놓고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말로도 욕을 하므로 너희를 벌함이 마땅하다.
보기 2번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까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에서 따온 것으로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규정 짓은 중요한 구절이므로 보기에 넣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온 세 선지자도 당연히 이와 똑같은 순서이다. 첫번째는 세례요한, 두번째는 예수, 세번째는 이 글을 적고 있는 여자이다. 선지자의 출생부터 보자면 요한은 어머니가 임신하기 전부터 요한이 태어나기까지 아버지 사가랴가 말을 못하는 자가 되었는데 이는 첫번째인 레아와 같다. 레아는 자신의 아들을 낳았으나 라헬의 자리를 빼앗았으므로 떳떳하지 못하고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레아처럼 첫번째인 세레요한의 순서에서는 말을 못하게 되었다. 두번째인 예수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친아버지가 아니다. 두번째인 빌하의 아들의 어머니도 이와 마찬가지다. 종의 아들이므로 라헬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노예가 되고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지배자가 된다.
창세기1장에서 사람 둘을 만든 것처럼 요한도 첫번째이므로 둘이어야 한다. 요한은 죽을 때 몸이 둘로 나뉘면서 죽었다. 예수는 창세기2장과 같은 두번째이므로 하나여야 하지만 두번 태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 몸은 십자가에서 죽고 다음 몸은 예전 몸의 것으로 만들었으므로 예전 몸이 다른 몸으로 바뀐 것이다. 죽음을 비유로 잔다고 하므로 창세기2장과 똑같다. 처음 몸은 두 개로 나뉘면 안 되므로 예수가 죽은 후에 십자가에서 다리를 꺾지 않은 것이다.
요한은 첫번째이므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죽임을 당할 때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무능력한 것에 대한 비유를 이루었다. 예수는 두번째이므로 노예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 전 아담의 몸일 때 , 자색옷을 입히고 절하며 왕이라고 부르며 놀리다가 도로 벗기고 욕을 하였다. 이것은 저들이 예수가 지배자가 아님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바라바는 라헬에 대한 비유이다. 라헬이 바라바가 십자가에서 빠진 것처럼 여자들의 순서에서 빠지게 된 이유는 그녀가 낳은 아들은 둘이 못 되고 하나이기때문에 창조를 이룰 수 없으므로 욕을 먹지 않는다. 그녀는 차남 베노니를 낳다가 죽었고 이때 태어난 아들 베노니는 어머니를 닮았으므로 죽은 것이 되어 라헬의 아들에서 지워지게 된다. 둘씩 짝을 지어야 하는데 요셉 혼자밖에 없으므로 라헬은 창조자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야곱이 베노니를 베냐민이라고 이름을 고친 것은 베노니가 라헬의 아들이 될 수 없기때문에 라헬이 지은 이름을 고쳐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보기 3번에서 북은 없다. 설명이 매우 길어져야 하므로 적지는 않겠지만 창세기4장과 에브라임도 이와 똑같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는 각각 창세기1장과 3장과 같다. 2장과 3장이 에덴동산에 관한 내용이므로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는다는 죄수는 3장의 '뱀'과 같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너희가 하나님을 무능력자, 노예, 똥이라고 말하고 싶어 내세운 표시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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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의 후속 편지
수신인: 사랑의교회 이원준 목사
발신시각:2021.5.31(월) 7:00
수신시각:2021.5.31(월) 8:33
이 편지는 지난번에 보낸 마지막 편지의 후속 편지이자 지금까지 보낸 모든 편지의 총결산이다. 따라서 이 편지로 한국인에게 보내는 글을 끝맺을 것이며 한국인에게 보낼 편지는 이것 이후로 없다.
지금까지 내가 한국에 살고 있으면서 자유롭게 외국에 드나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집 안에만 있는 닫힌 생활을 하면서까지 완성하고자 했던 것은 단 한가지,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다. 성경은 본디 너희 모두가 전지자에게 하고 싶은 욕설을 적은 책인 것은 분명하나, 너희가 책임을 전가하여 누구 하나에게만 이 욕을 한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므로, 내가 너희에게 그렇지 않음을 특별히 공부를 시키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1장의 첫 절부터 마지막 절인 요한계시록22장 21절까지에는 너희가 전지자에게 한 모든 욕설이 들어있고, 이 욕의 가장 앞부분인 창세기1장부터 창세기3장과 끝부분인 요한계시록20장부터 요한계시록22장까지에는 모든 성경이 집약되어 있다. 이 두 끝의 내용은 같으며 순서까지 똑같다. 이 편지에서 두 끝을 같이 서술하기에는 아직 많이 이르고, 세월이 흐르고 중간의 내용들이 모두 차야 집필이 가능하므로 일단 오늘 편지에는 서론만 간단히 쓴다.
서론과 마지막의 중간 부분이 되는 내용들은 앞으로 내가 지구 어딘가에 살면서 조금씩 채워나가야 하는 부분이고, 그 내용들이 하나하나 찰 때마다 너희에게 조금씩 가르칠 것이니, 이 가르칠 거리는 이제부터 만들어 나가도록 한다.
위에 서술하였다시피, 내가 이 나라에서 참으면서 사는 이유는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성경책이 대본이 되어 예언서가 된 것은 순전히 너희 중의 하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너희 모두가 입에 우리를 욕하는 쌍욕을 달고 살았으며 그 욕들을 못박아두기 위해 더러운 책까지 써 놓았으나, 이 모든 욕들은 너희의 욕망과는 반대로 도리어 너희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너희 자신들의 가슴팍에 꽂힐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이 책을 대본으로 쓰기로 합의를 보았으며, 너희의 마음을 녹여서 우리가 너희의 몸을 움직이고, 이 연극 무대를 우리가 좌지우지하여 너희를 놀리려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모든 성경이 이루어졌다 하는 것은 너희가 자살하였다 하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너희가 능력이 있으면 어디 이 자살을 막아보라.
너희가 욕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너희들만이 우월하고 특별하다는 선민의식과, 너희들만이 모든 것을 안다는 자만심과, 너희들만이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뚝심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너희의 능력과 처지에서 오는 실패감과 좌절감을 이 모든 것이 타인때문이라고 탓을 하는 것으로 해소하려는 것에 있다. 너희는 자신들의 능력에 비해 기대치가 심하게 높아서 현실감이 매우 떨어진다. 결국엔 이 모든 것이 너희들의 질투심이 되었고, 이 질투심이 너희들을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너희 모두는 神처럼 되고 싶으나 신처럼 될 수 없기에 신을 욕하는 것이다.
지구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여기 한국은 욕을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욕 밭이다. 이 나라는 욕을 안하면 살 수 없다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특히 전지자에 대한 욕을 특출나게 잘하는 장기를 자랑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전지자들을 발에 신는 신발과 같은 이름으로 낮춰 부르며, 인터넷 댓글을 살펴보면 전지자를 향한 무수히 많은 더러운 욕들이 등장한다. 저들은 추호의 부끄러움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이것은 한국이 전지자를 모독하는 두번째 동물인 곰 안에 있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욕설은 한국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래를 읽어보면 왜 너희 모두가 우리 욕을 한다고 적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십자가는 실제로는 동서남북인데 그 중에서 북은 죽었으므로 남은 것은 동, 서, 남 세 개 뿐이다. 큰 틀에서 너희가 전지자들을 각각의 자리에 따라 동, 서, 남으로 나눠서 부르는데 우리는 살아온 시대가 다르므로 이 세 개가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너희가 예수가 죽는 장면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그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그의 옆자리 십자가에는 세례요한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때는 세례요한의 목숨이 끊긴 후였다. 나는 현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 셋은 각자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셋으로는 전체적인 틀의 십자가가 만들어질 수 없다. 십자가가 만들어지려면 전지자 셋 모두가 각각 혼자만의 십자가 한 개씩을 가지고 있으면 가능하다.
우리 셋이 각각의 십자가를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가 각자 두개 이상의 몸을 가지면서, 그 두개 이상의 몸이 동시대를 살고 있으면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먼저의 몸이 죽고 나서 새 몸이 생기기때문에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게 된다. 예수도 이와 마찬가지로 먼저의 몸이 죽고 나서 새 몸을 가졌다. 그러므로 너희가 우리한테 하는 욕은 우리한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너희가 한 욕은 허공에 대고 한 것이다. 허공에 대고 했다고 해도 그 소리는 너희가 들었기에, 이 욕을 듣게 된 너희에게 십자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세 동물국이 비유와 예언을 이루려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세 동물국에 대한 비유가 되어 세 동물국의 자리에 각각의 동서남을 만들어주면 된다. 이 세 사람의 역할을 한 것은 대한민국의 김철우, 이원준, 김승수와 이상진이고 똥의 나라의 비유가 된 것은 뉴질랜드와 미국이며 두번째 똥 역할을 한 두 명은 김철우와 미국 공화당의원들(다수)이다.
이제부터 이 사람들이 어떻게 비유를 이루었고, 비유가 된 이 사람들이 어떻게 세 개의 십자가를 만들었는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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