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당시 결정적으로 명군을 원군으로 보내고 식량으로 막대한 양의 쌀을 조선에 보낸 명나라 황제인 신종(만력제)은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했습니다.
이중 10살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융경제가 죽자 1572년에 즉위한 것입니다.
등극초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신의 스승이자 강력한 후원자였던 장거정에게 모든일을 맡겼습니다.
집권 10년동안 철혈재상이라 일컬어지던 장거정이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해 전국의 토지측량, 일조편법을 실시해 명의 재정을 크게 늘렸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관리의 탄핵을 담당했던 언관이나 각지의 서원등의 입을 막는등 일종의 언론탄압이 자행됐고 기존 권력층인 기득권의 침해등으로 명 조정과 재야 실력가들의 장거정에 대한 불만은 가득차게 됩니다.
실제로 장거정 본인도 1577년 만력 5년에 부친상을 당했지만 자신의 휴직 공백기에 탄핵이 두려워 휴직을 청하지 않고 복상하지 않았고, 1581년 만력 9년에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후, 장거정에 대한 무수한 탄핵이 잇따릅니다. 부친에 대한 복상을 빠트린것은 물론, 심지어 그가 개혁을 진행하면서 명의 재정뿐 아니라 본인의 재산을 막대한 규모로 늘려 치부했다는 내용까지...
실제로 만력제는 장거정의 비리사실을 확인후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의 막대한 가산을 모두 몰수해버립니다. 장거정의 장남은 자살하게 되고 남은 가족들은 변방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후 인간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을 갖게 되고는 1582년부터 1620년간 아예 국정을 전혀 돌보지 않게 되고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인간 불신시대랄까? 많은 사학자들은 믿고 의지했던 스승이자 정치적 후원자였던 사람의 추악한 뒷모습에 사실상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고 해석합니다.
결국 만력제 말기에 임진왜란을 통한 막대한 군비 및 원조 식량 징수로 나라살림은 어려워졌고 만력제 또한 나라를 전혀 돌보지 않고 자신에게 아부하고 금은보화를 바치는 간신들을 중용하는등 착실하게 나라를 말아먹었죠.
만력제 사후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명은 결국 만력제 사후 24년만에 청나라에 의해 망해버립니다.
여러 사학자들도 실제로 명나라 망한것은 만력제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중국의 가장 평판이 나빴던 황제였던 만력제였지만 조선에는 구세주로 등장합니다.
임진왜란 만큼은 황제 업무를 보이콧할 정도로 태만하게 굴었던 그가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쳐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만력제는 장거정의 사후 뒷통수 치기에 인간자체에 불신을 갖고 환멸한 시기였습니다.
믿을놈 하나 없다...
그런데...
저기 밑에 작은 신하의 나라인 조선이...명나라 치러갈 테니 길을 터달라는 왜놈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전쟁을 불사한 태도에 꽤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넓디 넓은 중국땅에서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인간불신의 시대를 살면서 황제노릇도 하는둥 마는둥 했던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이른바 소국의 의리있는 행동에 느끼는바가 컸던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만력제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병을 일으켜 이여송을 사령관으로 조선에 출병케 하고 막대한 양의 식량을 조선에 원조 보내기 시작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력제는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습니다. 집권초기 장거정과 함께 과감한 개혁을 단행할 정도로 충분히 사리판단하고 머리도 좋았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만 장거정의 뒷통수 치기의 여파가 워낙 커서 세상만사가 귀찮고 믿을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국정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그도 앞서 언급한대로 사리판단도 할줄 알았고 일국의 황제로 국제정세에도 나름 빠르게 머리가 회전했던것 같습니다.
분명 왜국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내외적으로 조선을 통해 명나라를 쳐서 명 황제를 자신의 신하로 삼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댔으며 전국시대를 통해 일본 자체가 거대한 병영국가나 마찬가지였을 정도로 막강한 군세를 자랑했습니다.
여기에 만력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번에 조선을 도와주지 않으면 분명 당시 상황으로는 왜군은 조선을 정벌하고 바로 요동으로 올라가 칼끝을 명나라로 향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만력제 스스로도 전쟁터를 자신의 영토, 특히나 여진족들이 서로 분열했다가 서서히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뭉치는 상황에서 자신의 코앞에서 전쟁을 벌이기에는 부담이 크다는 것입니다.
당시 명은 여러 여진족 부족들을 분열시켜 그중 힘있는 한놈을 구슬러 관직을 내려 다른 여진족들과 대결구도를 형성하게 하는 정책을 썼는데 당시 그 대표적인 세력가가 건주여진 5부족을 통일했던 누르하치였었습니다.
겉으로는 명이 컨트롤 가능한 누르하치였지만 언제고 세력을 키워 명을 골치아프게 할수 있는 존재인데 왜국이 조선을 통해 북진해 누르하치와 손잡고 명에 쳐들어올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한것 입니다.
이에 대군을 일으켜 누르하치에게 어느정도 위세도 펼치고 조선에 대한 의리도 지키고 겸사 겸사 해서 조선 출병을 적극 추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국가가 군사를 일으켜 출병을 하는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변방의 소국인 조선을 돕는다고 거병하고 막대한 식량을 보내는 데에는 나라의 백성들이 어느정도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한 것이죠.
만력제가 선택한 명분 중 하나가 바로...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인 관우를 내세워 도원결의 3형제의 환생설이었던 것입니다.
중국 백성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의리의 화신 관우가 만력제를 꿈속에서 찾아와 형님 하면서 조선 국왕이 장비 환생인데 도와야 한다고...
아는 사람들이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이긴 하지만...당시 일반 백성들의 교육수준을 고려하면 충분히 통할수 있는 명분이 된것이죠.
여기에 조선 입장에서야 너무나 감사한 따름이니, 저러한 중국내의 명분을 조선에서 너도 나도 인용해와 관운장의 신병이 도왔다느니 등등의 언급하는 소리가 곳곳에 눈에 띄게 된것입니다.
심지어는 관운장 사당도 세우고... --;
임진록은 아래에도 언급한것 처럼 그냥 조선판 sf소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하지만 만력제도 판단미스한 것이...자기가 생각한 것 보다 더 빠르고 크게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 여진 중심의 만주군이 해서 여진을 중심으로 한 아홉부족 연합군과 1593년부터 1599년까지 정복전쟁을 벌여 승리해 버렸습니다. 아예 여진족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된 것이죠.
이에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엄호장군이라는 관직을 하사 하면서 아직도 자신들이 여진세력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결국 임진왜란 여파로 명나라가 국가적으로 왜군과의 전쟁에 정신이 없던 시기를 틈타 누르하치가 더욱 세력을 강력하게 키워 1616년에 후금을 세우게 되고 결국에는 누르하치의 손자인 순치제가 1644년 명을 멸망시키고 뒤를 이어 중국을 차지하게 됩니다.
조선에게는 소중한 의리남 만력제를 기려 대대로 제사도 지내주고 심지어는 관운장 사당도 만들고...
여기에 당시 합리적 실리 외교노선을 걷던 광해군까지 왕에서 몰아낼 정도로 극성....--;
당시 국제 정세와 당시 중국대륙내 정세변화 등을 고려하면 왜 이렇게 스토리가 나오게 됐는지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제가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뭐 미갤 보다는 역갤에 더 어울릴 글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관련 글이 아래에 있어 약간 답답한 마음에 짧고 모자란 상식으로 글을 써봤습니다.
생각해 보니 미갤에는 첫 글인듯... 평소 많이 와서 글 읽는 게시판인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