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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대륙에서 3,800킬로미터, 가장 가까운 핏케언 섬에서도 2,6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남태평양상의 절해고도 이스터 섬. 여러 문명과 완전히 절연된 채 외롭게 떠 있는 이 섬의 명칭 이스터는 네덜란드 제독 야곱 로헤벤이 처음 섬을 발견한 날에서 비롯되었다. 1722년 4월 14일, 섬을 발견한 날은 마침 부활절(Easter)이었다. 섬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섬을 데·핏·오·데·헤네아(세계의 배꼽 혹은 중심)라고 불렀다.
폴리네시아 군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어 주변 지역과 지리적으로 단절된 이 섬에는 모아이라고 불리는 불가사의한 석상(石像)이 존재한다.
모아이 상은 높이 3~10미터, 무게 3~10톤으로 된 거대한 석상으로, 120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작은 이스터섬에 1,000개 이상 건설되어 있다. 모아이 상은 섬의 동남부 연안에 있는데, 모두 바다 쪽을 등지고 섬의 중앙을 향해 줄지어 서 있다.
모아이 상의 겉모습은 모두 인간의 상반신을 닮았으며, 특히 얼굴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좁은 이마, 높고 큰 코, 긴 귀, 턱을 조금 내밀고 굳게 다문 엷은 입술, 좌우로 붙어 있는 뺨, 낮고 오목한 눈. 눈 부분에는 산호와 붉은 화산암이 박혀 있으며, 머리 부분에는 재질이 다른 모자 형태의 돌이 얹혀져 있다. 현재는 이 모자와 모아이의 눈이 파괴되어 있는 것도 많다.
이 거대한 모아이 상은 주로 라노라라크 화산에서 채취한 돌을 가공한 다음, 섬 곳곳으로 운반해왔던 것 같다. 화산 주변에는 제작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모아이와 돌을 자를 때 사용했던 흑요석 도구가 남아 있다. 화산암은 흑요석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돌을 자를 수 있었을 것이다. 잘라진 모아이는 목재 썰매와 로프를 사용해서 운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츠 마츠아에서 장이족, 단이족까지
이스터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선조는 서기 450년경 폴리네시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문화적으로 유사한 면이 많고, 또 거리상으로도 남아메리카 대륙보다 훨씬 가깝기 때문에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94년에 이스터 섬에서 발견된 인골을 유전자 감식을 통해 조사한 결과, 폴리네시아인의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당시 이스터 섬에는 야자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바나나와 사탕수수 같은 작물들을 폴리네시아에서 들여와 재배했던 것 같다. 점차 인간 생활에 적합한 환경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또 조사를 통해 흙 속에서 탄화한 수목층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섬에는 오래 전부터 나무들이 무성했으며, 사람들은 화전농업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이스터 섬에 최초로 도착한 사람은 호츠 마츠아라는 왕이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적도 부근에 있었다는 히바 군도의 한 섬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데다 자연 재해를 비롯한 여러 재난이 몰려오자 섬을 탈출해서 이스터 섬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섬에 들어오게 된 것은, 꿈 속에 마케마케 신이 나타나 그들을 이스터 섬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꿈에서 신이 일러준 대로 이스터 섬에 도착한 그들은 야위어 홀쭉한 몸에다 황색 피부와 기다란 귀를 가진 종족을 만났다. 그후 이 선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새로운 종족들이 나타났다. 아네아 모츠아라는 지도자를 따르는 이들은 어깨에 닿을 만큼 귓불을 길게 늘어뜨린 기괴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독특한 신체적 특징으로 장이족(長耳族)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장이족은 선주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새로운 종족이었다.
장이족은 먼저 섬에 들어온 호츠 마츠아의 자손들인 단이족(短耳族)을 지배하면서 모아이 상을 만들도록 했다. 모아이 상의 귀가 긴 것도 바로 장이족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아이 상의 제작은 1000년경부터 이루어졌다. 이후 600년 동안 모아이 상은 계속 제작되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모아이 상을 만들었던 것일까?
17세기에 이 섬을 방문했던 제임스 쿡 제독은 섬 주민들에게 모아이 상 하나하나마다 각기 다른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에는 주로 수장이나 왕을 뜻하는 '아리키'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 구전에는 왕이 죽으면 그 상을 세워 죽은 왕의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모아이 상은 죽은 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금까지는 유력하다. 부족의 수장은 신의 자손이며, 유력한 부족의 수장인만큼 그만큼 지위도 높아서 그에 걸맞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즉, 조상숭배의 일종인 것이다. 폴리네시아 문화권에서는 그런 독특한 개념이 있는데, 이스터 섬도 그런 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라진 이스터 섬의 문명
이스터 섬의 문명이 몰락한 이유는 다른 문명의 예에서 본 것처럼 환경 파괴가 원인이 되었다.
1500년경 이스터 섬의 환경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화전농업을 유지하기 위해 나무들을 지나치게 벌채함으로써 토지는 황폐해졌고, 그 결과 급격하게 증가하는 인구를 전부 부양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결국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부족간에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전쟁은 격화되어 상대 부족의 모아이 상을 파괴하는 일도 일어났다. 조상숭배 신앙을 가졌던 그들에게 신앙의 상징인 모아이를 파괴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치명적인 행위였다.
전쟁으로 인해 섬은 점차 피폐해졌고, 인구는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당시 제임스 쿡 제독은 "섬의 모든 사회가 붕괴 일보 직전"이라고 본국에 보고했을 만큼 모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이스터 섬에는 비극적인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19세기에 페루의 노예무역 상인들이 섬에 들어와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을 납치해서 팔아넘기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타히티 섬에 선교를 위해 와 있던 목사의 도움으로 납치되었던 몇몇 주민들이 해방이 되어 섬으로 돌아왔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더 나쁜 상황을 초래했다. 섬으로 되돌아온 주민들이 천연두와 결핵을 섬 전체에 퍼뜨렸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무렵에는 섬 주민이 불과 100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스터 섬의 문명은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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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모아이석상 어떻게 세웠을까요??
이스터섬에 처음 오게되어 모아이 석상을 본 유럽인들은
어떻게 원주민들이 이렇게 거대한 석상을 만들고 운반을 했는지
이해를 할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의견들이 나오기도 했구요.
여러 의견들 중에서는 남아메리카의 잉카인들이
이스터섬으로 이주하게 된 후 문명을 건설했다는 의견,
이스터섬은 먼 옛날부터 태평양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무대륙의 잔재라는 의견, 심지어는 외계인들이 이스터섬에
내려와서 모아이 석상을 만들고 갔다는 의견 등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현대에 오면서 학자들이 직접 실험을 해본 결과
그리 큰 힘이 들지않는다는것을 알게 되었고
실제 이스터섬의 원주민들이 직접 만들고 세웠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모아이석상을 만드는 과정으로는,
우선, 이스터섬에 있는 세개의 화산 중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라노 라라쿠에서 석상의 몸통 부분을 만들 수 있는 응회암을 채굴합니다.
석벽에 붙어있는 상태로 석상의 모양을 만든 후,
수십명의 석공이 돌로된 연장을 사용하여 이를 떼어낸다면 충분히 작업이
가능하다고 해요. 이때 사용되는 돌로 된 연장은 다른 화산에서 얻을 수 있구요.
그리고 이렇게 제작이 끝난 석상을 화산 부근 채석장에서 이동시켜서
세워야 하는데요, 현재까지 발견된 모아이 석상 중에서 가장 큰 석상의 경우에도
500명 정도의 인원만 있다면 이동 후 세우는데 문제가 없다고 해요.
이스터섬에는 당시 10,000명 이상의 인구가 있었기 때문에
인원에 대한 문제도 없었다고 하구요.
채석장에서 해변까지 석상을 옮기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통나무 롤러나 썰매를 이용하여
옮겼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답니다.
[출처] 거대한 모아이석상 어떻게 세웠을까요??|작성자 쫑아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2683&cid=43109&categoryId=43109 http://blog.naver.com/jonga47/220142676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