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메이슨의 '비밀주의'와 음모론에 대한 소고
2015년 08월 24일 허핑턴포스트
러시아 18세기는 프리메이슨의 세기였다.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용어는 원래 석공(石工) 길드를 일컫는 용어로 14세기 유럽에서 등장했다. 프리메이슨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크게 네 가지 설이 있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집트 기원설, 히람 아비프 기원설(구약 역대하 3장), 성전기사단(Templar)기원설, 중세 유럽의 석공길드 기원설이 그것이다. 이들 기원설은 현재 프리메이슨의 몇몇 특성들을 설명하는 데에 용의하다. 가령 성전기사단 기원설은 프리메이슨의 기사도와 신에 대한 충성을, 이집트 기원설은 다양한 상징과 건축가의 이미지(전시안(all-seeing eye)이나 피라미드 등)을, 히람 아비프 기원설은 프리메이슨의 비밀주의를, 중세 석공길드 기원설은 석공이라는 직업과의 연관성 등의 속성을 보여준다.
이들 기원설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비밀주의이다. 비밀주의는 프리메이슨을 이해하는 데 있어 온갖 억측을 낳게 했다. '적그리스도'의 단체, '반정부' 단체, 심지어 '세계정복'을 꿈꾸는 단체로 오해하게 만든 주요 이유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비밀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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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알려진 모스크바의 돈스코이 수도원 (사진출처: retromap.ru)
사실 중세 유럽의 석공 길드 역시 건축 기술을 비밀로 간직하였다. 이것이 중세 석공들이 길드를 형성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혹은 담합하기 위해서). 오늘날과 같은 공학 교육이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를 가정해본다면, 당시의 건축술은 일일이 손에서 손으로,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도제식으로 전수되어온 온 기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벽돌을 쌓아 올릴 때 접착제로 달걀 흰자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기술이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에서 프리메이슨들은 석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근대의 프리메이슨은 그 시작 시기가 명확하며 자체의 헌법도 가지고 있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중세의 석공길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점차 약해졌다. 점차 이 길드에는 석공 이외에 귀족, 상인, 성직자, 교수, 평민 등등이 합류를 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집단은 서서히 사변적인 집단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1717년 7월 24일 영국에서 각지의 석공 길드들을 모아 영국대지부(Grand Lodge of England)를 설립하게 되고, 1721년 제임스 앤더슨이 앤더슨 규약이라 불리는 프리메이슨의 『헌법』을 만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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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의 헌법
이 헌법을 보면 우리가 이해(오해)하고 있는 프리메이슨의 이미지는 전혀 없다. 1장이 「신과 종교에 대하여」, 2장이 「시민의 권리에 대하여」인데, 1장에서 강조하는 바는 도덕적 규범, 무신론자 참여 불가 선언이며, 2장에서는 프리메이슨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음모론이나 적그리스도의 이념은 낄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세계 정복의 음모'를 꿈꾼다는 프리메이슨의 이미지와 『앤더슨 규약』 사이의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장 합리적인 설명방식은 이러저러한 전설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리메이슨이 유래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프리메이슨이 이 전설들을 자신의 존립근거로 끌어왔다고, 즉 사후적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이들을 통해 확립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의 프리메이슨인데,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표트르 대제에 대한 전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표트르 1세의 경우에 종종 프리메이슨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우선 줄과 망치, 낫 등 제도와 건축 용품들의 이미지가 표트르의 이미지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표트르는 황태자 시절에 네델란드로 유학을 가 선박건조술, 운항술 등을 스스로 배워온만큼 엔지니어임을 자처했다. 또한 건설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기존의 모스크바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고, 그 도시에 '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의 페테르부르크(Petersburg)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도시는 모스크바의 목조 도시와는 대비되게 돌로 만든 석조 도시였다. 표트르의 이미지는 석공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도 이 장면에서는 의미심장하다. 표트르의 영어식 표기는 피터, 헬라어로는 베드로인데, 베드로는 튼튼한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지만 표트르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주장은 후대 러시아의 프리메이슨들이 끌어다 온 측면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시기상 근대적 프리메이슨의 지부는 표트르 이후에 세워졌고, 이러저러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구전이나 전설 등에 기반하고 있어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표트르는 '근대 러시아' 그 자체와 같은 단어였기에, 러시아의 새로운 프리메이슨들은 표트르에게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의 활동은 근대적 러시아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첫 사회단체 중의 하나였다.
러시아에서 이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8세기 후반인데, 이는 예카테리나 2세의 시대와 거의 겹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러시아 프리메이슨의 목적은 평등, 박애, 봉사, 헌신 등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계몽이었기 때문이다(물론 모든 프리메이슨의 단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이념들은 근대화의 물꼬가 막 터진 당대 러시아 지성계에서 강력하게 요청되었다. 반동적인 정책으로 돌아서기 전까지 '계몽군주' 예카테리나와 프리메이슨은 모종의 우호적인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프리메이슨들은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는데, 러시아 최초의 생명보험사와 상조회 설립, 자선활동, 의료활동, 그리고 출판과 교육활동 등은 프리메이슨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18세기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의 역할은 시민적 사회활동에 포커스가 있었다. 그들은 비밀조직이기는 하되, 공공연한 비밀조직이었다. 모두가 다 아는 비밀. 우리는 이미 많은 저명 인사들이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음을 알고 있고, 그들의 활동 역시 비밀이기는 했으되 '공공연한 비밀'임을 알고 있다(예를 들어 『전쟁과 평화』에서 어리숙한 피에르의 행동이나 미국독립의 선구자들이 프리메이슨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 등을 상기해 보라).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실제 우리의 관심사가 그들의 '비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프리메이슨하면 연상되는 몇몇 단어들 - 신비주의, 연금술, 철학의 돌, 강신술 등 - 에 대한 논의는 우리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연마하고 찾아내는 것이 프리메이슨의 진정한 목표라면,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즉 사회 공동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이른바 비밀주의란 자신들만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들만이 정보를 공유(그나마 각 등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보가 제공된다)하고, 영원히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속성의 것이라면, 그것은 한편으로 아무런 내용이 없는(혹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비밀과 '기능적으로' 또는 '현상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비밀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기능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측면이 있다. 어느 역사가의 말을 빌리자면, "프리메이슨들은 가끔 국가 관리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공개하곤 했다. 대체로 지부에서의 "비밀주의"는 정치적 방어막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또한 메이슨을 메이슨으로 만들어주는 상징적 속성이기도 했다. 나아가 그 속성은 메이슨의 비밀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에는 상관없이, 여타 공동체들의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당시 러시아 프리메이슨의 비밀 회합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들이 그곳에서 의결한 것은 대부분 지부의 예산 수입, 지출내역, 다음 자선회 활동 계획, 사회사업 활동 내역 정리 및 플랜 점검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문제는 음모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을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프리메이슨은 음모의 소굴로도, 생산적인 사회활동 단체로도 볼 수 있다. 다만 두 경우 모두에서 그들의 '비밀'이란 현상적으로는 내용없는 기표(최소한 근거 없는 전설)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가 음모론을 개진한다면, 그 자신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서광진 박사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