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불교 명산 구화산 |
[시사중국] 중국의 불교 성지 구화산(九華山)에는 원적 후에도 육신이 썩지 않는 높은 경지의 승려가 많이 나타났는데 청나라 말기에 태어난 대흥(大興)스님도 그 중 한 분이다. 실제로 대흥스님의 시신을 항아리에 넣었다가 3년 후 열자 신체가 여전히 살아 있는듯 했으며 얼굴 모습도 생전 그대로였다.
대흥스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롭고 관용했는데 괴로움을 참고 힘든 일을 견디며 수행에 정진했다. 아래 일화는 대흥스님이 큰 치욕을 참으며 속인을 초월한 경지를 나타낸 일화다.
구화산 아래에는 부유한 한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 집에는 금지옥엽 귀한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은 부모의 명령에 순종했으며 좋은 가문의 한 공자(公子)와 혼인을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 3년 전에 딸은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 부모의 엄격한 추궁 하에 딸은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제가 구화산에 올라가 절에서 향을 사르고 참배를 올릴 때 대흥스님에게 겁탈을 당했으며 이후에 임신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딸의 부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힘센 장정 여럿을 데리고 절에 뛰어 올라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흥스님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갓난아이를 스님에게 떠넘겼다. 하지만 대흥스님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아이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선재(善哉)라, 아미타불!”이라고 염했다.
이때부터 이 지방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던 대흥스님의 위신은 단번에 바닥에 떨어졌다. 스님은 도처에서 사람들에게 조소와 멸시를 받았으며 사람들은 늘 그를 “파계승”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스님은 이런 비웃음을 마음속에 두지 않고 매일 산을 내려가 아기를 위해 젖동냥을 했다. 스님의 정성스런 보살핌 하에 아이는 점점 성장해 살도 포동포동 찌고 총명하고 영리하게 자랐다.
이렇게 시간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딸은 정식으로 시집을 가게 됐다. 신혼 첫날밤, 신랑은 아이의 행방을 물었다. 신부는 눈물을 흘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튿날 젊은 부부는 부모님께 사실을 고했다. 원래 그 아이는 그들의 친 혈육이었으나 혼전 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 대흥스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3일 째 친정에 돌아온 기회에 딸은 또 사실대로 친정 부모에게도 진실을 고했다. 친정 부모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후회가 막급했다.
양가 부모는 즉시 부부를 데리고 절에 와서는 대흥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아이를 돌려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자 대흥스님은 기뻐하면서 아이를 안아 공손하게 엄마 품에 안겨주었다. 스님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허허 웃으면서 “데리고 가십시오! 아미타불!”하며 두 손을 합장하고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진실이 밝혀진 후 많은 승려들과 백성들은 대흥스님의 인내심과 관용에 탄복했으며 스님을 더욱 우러러 받들고 존경하게 됐다.
출처 | http://sscn.kr/news/view.html?section=2&category=10&no=42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