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 ‘탐정특집’편은 세계인을 사로잡은 드라마 <셜록>에 영감을 얻은 제작진의 연출이 돋보였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등장은 이날 방송이 <셜록>을 흉내 내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과 조우하게끔 만들어 흥미를 더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가)로 시청자에겐 SBS 미스터리물 <그것이 알고싶다>의 ‘고정출연자’로 잘 알려져 있다. 표 전 교수는 한국인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프로파일링협회 회원자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범죄수사와 관련해 표창원만큼 권위 있고 대중적인 전문가는 없다. 때문에 탐정특집에서 그의 등장은 자연스러웠다.
아마 <무한도전>에 등장한 표창원 전 교수를 보고 불쾌감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사건을 떠올리고 싶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표창원은 경찰대 교수직을 내려놓으면서까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인물이다.
표창원 전 교수는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에 대해 “헌법을 부정해 국가정보원을 불법선거운동조직으로 운영, 여론을 조작하고 야당과 국민다수를 ‘종북’으로 규정해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대통령선거에 서울경찰청장이 개입해 허위사실을 수사결과라며 공표해 투표권을 유린했다”고 정의한 바 있다.
더욱이 그는 “국정원의 오랜 기간에 걸친 불법적 색깔론 여론조작이 없었으면, 12월 16일 경찰의 허위 수사결과발표가 없었으면,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박근혜 대통령도 닉슨처럼 사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범죄수사 권위자인 그의 주장에 많은 시민들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여당과 주류언론에겐 부담스러운 존재일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김용판 전 서울경창청장의 무죄를 선고한 1심판결(6일) 이틀 뒤인 8일 프로그램몰입도 1위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했으니, 부담도 이런 부담이 없었을 거다. 표창원 전 교수는 이날 방송에서 “추리란 알고 있는 것을 통해 알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이라 말했는데, 마치 충분한 정황과 증거를 갖고 있었지만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은 의지가 없어보였던 1심 재판부를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인상을 남겼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축소·은폐해 공직선거법 및 경찰공무원법·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두고 명확한 물증이 없고 수사 축소·은폐 의혹을 제기한 권은희 전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이 신빙성 없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대선 직전 발표한 경찰의 국정원 대선개입 중간수사결과가 이미 허위로 드러났지만 누구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 온 것이다.
표장원 전 교수는 <무한도전> 멤버들에게 탐정수업을 위한 미션을 던지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얼마나 많은 것들(증거)을 보셨나요.” 이 물음은 재판부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하다. 재판부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가 TV토론에서 국정원 의혹을 지적한 직후 이뤄진 발표 시점을 두고 “아쉽다”고만 표현했다. 경찰이 국정원 여직원의 접속기록 30만건 중 20만건은 분석도 하지 않고 전수조사 했다고 발표한 점, 발표 전 경찰 상부가 국정원·새누리당 관계자들과 수차례 통화하거나 만난 점 등 관련 증거에 대해서는 납득할만한 설명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검색하는 키워드를 수서경찰서가 요청한 100개에서 4개로 줄이는 과정에서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재판부가 탐정의 자질이 없거나, 아님 탐정이길 포기했거나 둘 중 하나다.
재판부는 내부고발자인 권은희 수사과장의 증언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나머지 증인 17명의 일관된 증언을 신뢰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17명의 증인은 언론으로부터 김 전 청장의 혐의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있었다는 점에서 법정에 출석하기 전 말을 맞추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왔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들이 입을 맞췄을 가능성이 없다고 밝혔다.
표창원 전 교수는 8일 방송에서 유재석을 향해 “당신의 그 한마디 가지고 사람이 엉뚱하게 누명을 쓸 수 있어. 확신하나”라고 호통 치듯 다그쳤다. 권은희 수사과장을 ‘거짓말쟁이’로 만든 17명의 증인을 대신해 유재석이 당황하는 장면이었다. 표창원의 다그침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본질을 은폐·왜곡하며 부당하게 집권한 정권을 옹호하는 경찰·검찰·재판부를 향한 비판이었다.
정형돈이 이날 방송에서 “국가가 국민입니다”라고 외치며 어설프게 영화 <변호인>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했지만 탐정이 설 자리를 잃은 부당한 현실에 우리는 TV속 탐정들의 활약에 만족할 뿐이다.
미디어 오늘 정철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