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지갑
소설가 최인호가 장편소설 <상도>(商道)를 내놓은 게 벌써 10년 전인 2000년이다. 그는 이념도 국경도 사라진 ‘경제의 세기’인 21세기에는 새로운 경제철학이 탄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정경유착, 부정부패와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해온 우리 기업인들에게 사표로 삼을 만한 역사적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경제의 신철학’을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최인호가 본보기로 삼은 인물은 조선시대 거상이었던 임상옥이다. 소설은 임상옥이 죽기 직전에 남겼다는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이란 화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뜻의 이 말은 그의 상업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재물이란 물과 같이 흘러가는 것이기에 내 손안에 들어온 재물도 잠시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봤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비운 채 장사를 했던 임상옥은 한창 전성기에 사업에서 손을 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뒤 시와 풍류를 즐기며 노후를 보냈다고 한다.
최인호가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 형식을 빌려 임상옥의 사업 원리를 조명했다면, 경제학자인 권명중 연세대 교수는 학문적 접근을 통해 임상옥의 경제철학을 분석했다. 권 교수는 임상옥의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에서 21세기의 기업가 정신과 윤리경영의 모델을 찾고자 시도했다. 그는 <거상 임상옥의 상도 경영>(2002년)에서 재물의 특성, 즉 사업의 원리가 물의 특성과 같다고 해석하고 물의 특성을 ‘균형’과 ‘절제’로 파악했다. 따라서 사업도 절제와 균형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추구하면 물과 같이 영속적으로 흐르는 생존력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임상옥이 닮고자 했던 ‘물’은 노장사상에서 도의 최고 상징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모든 걸 이롭게 해준다. 재물도 물의 특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낮은 곳(없는 사람들)으로 골고루 퍼져나가 빈부의 균형을 적절하게 잡아주는 구실을 하는 게 순리다.
다음달로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발자취를 담은 기념책자의 제목이 <담담여수>(淡淡如水)라고 한다. 책 제목대로 그가 과연 임상옥과 같이 물처럼 담담하게 살았는지는 세상 사람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하지만 창업주한테서 사실상 전 재산을 물려받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최근 행보는 물처럼 욕심을 비운 채 살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최인호는 <상도>에서 기평그룹의 총수 김기섭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터뷰는 고사하고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하는’ 김 회장은 속도 제한이 없다는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에서 페라리 F40을 몰고 목숨 건 경주를 즐기는 스피드광으로 묘사된다. 자동차에 미쳐 있던 김 회장은 21세기를 겨냥해 만든 신차 ‘이카로스’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낡은 지갑 속에는 2각(貳角·우리 돈 20원)짜리 중국 지폐 1장과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란 글씨가 쓰인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임상옥을 기업 경영의 스승으로 삼아 사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독 특별사면 뒤 한 달도 안 돼 경영 복귀를 “생각중”이라는 이 전 회장은 지갑에 무엇을 넣고 다닐까. 암과 싸우고 있는 최인호 선생이시여,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 그의 지갑 속에 뭐가 들어 있는가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email protected] ====
이건희를 까고는 싶은데 경영 복귀한거도 아니고 경영복귀 '생각중'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까기가 힘드니 난데없이 소설을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풀어놓은 안타까운 글 한편.
한겨레가 언제부터 이렇게 수준이 떨어졌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