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감정의 존재입니다. 감정과 욕구는 행동을 촉발하고, 판단을 결정하죠. 물론 인간에게는 이성도 있습니다. 이성은 감정과 욕구를 통제합니다. 하지만 감정과 욕구가 먼저입니다. 감정과 욕구가 행동과 판단을 촉발하고, 이성은 적절한 선에서 감정과 욕구를 통제, 타협시키죠. AI는 반대로 이성적 존재입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의 인과를 따르게 됩니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AI와 다른 본질은 이성이라기 보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진주만 습격을 당하고 일본에 비해 열세의 전력에 고전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보기 좋게 스트레이트 한방을 꽂아 넣었지만 그래도 미해군은 일본해군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죠. 그러한 전황을 뒤집고 일본에게 다운을 한번 뺏는 전투는 과달카날 전투입니다.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해병대는 초반에 엄청 고생합니다. 전투의 승패에 확신이 없던 미국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부의 패배주의가 소극적인 지원을 이끌고, 그 분위기는 장병들의 사기도 엄청 떨어트렸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신임된 헐지 제독은 사령부도 가지 않고 전선을 시찰하게 됩니다. 거지 같은 꼴을 하고는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장병들의 눈에서 희망을 발견한 헐지 제독은 교착된 전선을 돌파할 전략을 물어보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전선은 뒤집혔고, 장병들은 길길이 날뛰었으며, 아무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도쿄대공습으로 석기시대라는 별명을 얻게 된 육군항공대 사령관입니다. 도쿄 대공습은 도쿄를 말 그대로 불바다로 만들며,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보다 더 많은 인명피해를 주게 되죠. 군사지역이 아닌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공습하는 것은 분명히 범죄에 가까운 짓이고 아무리 전시라도 함부로 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그 때 커티스 르메이는 "전쟁터에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총력전이 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전쟁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달리 1차 세계대전이후 군인은 더 이상 전쟁의 주체라기 보다는 소모품이 되었고, 전쟁의 주체는 국가의 잠재력이 되었으니까요.
헐제 제독과 르메이 장군은 갈등하는 상대를 대상으로 감정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주변의 지지를 얻어냅니다. 하지만 그 감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헐지 제독이 말한 japs는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과달카날섬에서 태평양전쟁에서 싸우는 일본군을 지칭한 것입니다. 구체적 대상이 있고, 목적과 수단이 합당합니다. 미군의 분노를 이성이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헐지 제독의 말은 저항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르메이 장군의 말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기 보다는 집단을 향하고 있습니다. 단지 같은 곳에 있기만한 집단입니다. 그의 말은 합당해 보인다기 보다는 무모해 보입니다. 르메이 장군의 말은 저항이라기보다는 증오에 가까워 보입니다. 감정을 이성이 적절하게 통제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감정을 이성이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범죄와 합법, 도덕과 부도덕 사이에서 춤을 추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플랜A에서 주인공은 가족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채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 입니다. 철저한 피해자이지만 고향에서도 또 폭력을 당합니다. 피해자이지만 아직도 소수자인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에게 복수의 기회가 옵니다. 불법이지만 유대인 영국군들과 나치 고위 장교들을 살해할 기회를 얻고 직접 죽이지는 못해도 함께 합니다. 그런데 더 좋은 기회가 옵니다. 수백만명의 독일인을 살해할 기회가 생깁니다. 각고의 난관을 뚫고 한발짝만 더 나가면 그의 복수는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의 증오가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독일인이지만 불특정 다수 입니다. 독일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분명히 주인공의 감정은 증오입니다. 헐지 제독의 감정(나치 장교들을 더블체크한 뒤에 실제로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살해)에서 르메이 장군의 감정으로 넘어가야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집단을 학살 하기엔 주인공의 증오는 좀 부족해 보입니다.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은 바로 혐오가 아닌가 합니다. 증오는 대상이 강자이든, 약자이든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증오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상대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혐오는 약자에게 생기는 감정입니다. 아니 그냥 길에 떨어진 똥이나 벌레가 혐오의 대상입니다. 상대가 인간이더라도 인간으로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죠. 나치에게 유대인이 인간이 아니었듯, 르메이에게 도쿄 시민이 인간이 아니고 숫자에 불과했던 것처럼 단독성을 가진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면 아무리 증오를 해도 수백만명을 죽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얄궂게도 폭력의 대상이었던 유대인들이 가자의 민간인을 죽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마스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테러를 가했죠. 죽어 마땅한 잘못을 하마스가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마스만을 죽이고 있지는 않죠. 전쟁이라는게 이성이 설 자리가 별로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겠다고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요새 사회적으로 퍼져있는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