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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바다로 둘러싸인 전라남도 서남쪽의 흑산도(黑山島)는 교통이 편리한 오늘날에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그런 점을 살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 곳으로 잘 활용되었습니다. 조선 광해군 시절에 유몽인(柳夢寅 1559~1623년)이 쓴 야담집인 어우야담(於于野譚)을 보면, 흑산도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지금의 전라북도 진안(鎭安)의 현감(縣監 사또)을 지낸 정식(鄭湜)이란 사람은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와 평소 친분이 있던 선비들과 같이 가족들을 배에 태워서 흑산도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는데, 흑산도는 육지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라서 일단 일본군이 오기 힘든 곳인 데다가, 섬을 둘러싼 바다에서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섬 안의 땅도 비옥해서 채소를 재배하기에도 좋아서 훌륭한 피난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정식의 예측대로 흑산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어도 일본군의 침략을 받지 않았고, 정식과 다른 선비들 및 그들의 가족들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난을 온 지 몇 달이 흐르자, 정식과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두고 온 고향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라도는 적의 침략을 받지 않고 무사하며, 거기 사는 사람들도 편안하게 지냅니다.”라고 알려주자, 정식은 “이만하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섬으로 피난을 온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도 정식처럼 “섬에서 사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고향에서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에 정식은 “그러면 며칠 후에 살림살이를 모두 챙겨 고향으로 돌아갑시다.”라고 결정했으며, 모두 그 말에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정식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샌 노인 한 명이 나타나서 그들을 상대로 “나는 흑산도의 주인이오. 당신들이 흑산도를 떠나겠다면 내가 순조로운 바람을 일으켜서 도와주리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들도 나를 위해서 대가를 주어야 하오. 나한테 좋은 말을 한 마리만 주시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정식은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노인이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가족들한테 자신이 꾼 꿈을 들려주자, 놀랍게도 가족들 역시 전부 같은 꿈을 꾸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반응에 정식은 “아무래도 이 흑산도를 지키는 신(神)이 나한테 말을 요구한 듯하니, 말 한 마리를 대가로 주어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헌데 정식의 장남은 귀신이나 도깨비를 믿지 않는 엄격한 선비였고, 아버지의 말에 반대했습니다.
“꿈이란 다 허망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버지는 어찌 요망한 잡신 따위의 말을 믿으십니까? 더구나 고향으로 돌아가면 배가 아닌 말을 써야 할 일이 있을 텐데, 흑산도에 말을 남겨놓고 간다는 건 안 될 일입니다.”
장남의 말도 듣고 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서 정식은 노인이 요구를 거부하고 그냥 가족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흑산도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정식의 꿈에 나타난 노인은 “당신은 내 요청을 무시했소. 그냥 말 한 마리에서 끝나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안 되겠소. 당신의 가족들을 흑산도에 남겨 놓고 떠나시오. 이번에도 거부한다면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사라졌습니다.
정식은 노인의 말이 심상치 않아 그의 요구대로 가족들을 남겨 놓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장남이 반대해서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식은 다른 선비들과 함께 각자의 가족을 데리고 배에 타서 섬을 떠나려 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선비들이 탄 배는 무사히 나가는데, 정식과 그 가족이 탄 배만 계속 같은 곳에 맴돌며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정식 일행이 탄 배는 서서히 가라앉더니, 이윽고 완전히 바다 밑으로 침몰하여 정식과 일가족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정식한테 말과 가족을 남겨 놓으라고 요구한 노인은 아마 흑산도에서 오랫동안 숭배를 받던 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식 일행이 일본군의 침략을 받지 않고 흑산도에서 무사히 피난 생활을 마쳤던 이유도 흑산도의 신이 보호해준 탓이었을 텐데, 흑산도의 신은 그 대가로 정식에게 자신한테 말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던 것이었겠죠.
그런데 그 요청이 무시당하자 신은 화를 냈고, 정식한테 가족을 남겨 놓으라고 했다고 그것도 거부당하자 정식을 향해 저주를 내려 그와 일가족을 모두 죽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고대 그리스 신화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도 신들이 요구한 제물을 바치길 거부한 영웅들이 신들의 분노를 사서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 있었으니까요.
출처 | 어우야담 |